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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길을 예비하십시오! (눅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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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상황(狀況) 

      본문은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방식은 조금 특이합니다. 1-2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출현하던 당시의 정치 종교적인 상황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1절 말씀을 다같이 보시기 바랍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누가는 그 당시 모든 정치 군사적인 권력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었던 4명의 실력자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각자에 대해서 간단하게 부연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디베료(Tiberius, 42 B.C.-A.D. 37)는 예수님 당시에 로마를 통치하던 로마의 제 2대 황제였습니다. 디베료는 본래 로마의 초대 황제 아구스도(Augustus Caesar), 즉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 63 B.C.-A.D.14)의 친자가 아닌 양자였습니다. 아구스도 황제의 친자가 뒤를 이어 시저가 될 가능성이 완전히 끊어졌을 때 양자였던 디베료가 로마의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하들이나 백성들은 마지못해서 디베료를 황제로 추대했을 뿐, 자신의 군왕에 대해서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 당시에 로마 황제가 유대 지방에 파견했던 총독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주후 26년경에 중간 계급 정도의 신분에서 유대 총독이라는 최고위층으로 벼락 출세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유대인 신하들을 능멸하고 반감을 불러오게 하는 일을 자주 했습니다. 빌라도가 역사적으로 유명한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사형선고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경멸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워하기도 했던 총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분봉 왕 헤롯과 빌립, 루사니아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먼저 헤롯은 주전 4년경에서부터 주후 39년까지 갈릴리 지역을 주로 다스렸습니다. 로마 당국은 헤롯을 ‘유대인들의 왕’으로 불렀는데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매우 위험한 통치자였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방 신전들을 지어서 우상 숭배를 적극 조장했습니다. 헤롯은 특히 자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충(不忠)의 기미가 엿보일 경우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한 잔인한 폭군이었습니다.

      헤롯의 동생 빌립은 헤롯에 비해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데 주전 4년경부터 주후 33년경까지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이 빌립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루사니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누가의 기록대로 본다면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있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와 같이 그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실력자들의 이름을 차례로 열거한 다음에 예루살렘의 최고위층 종교 지도자 두 사람을 언급합니다. 안나스와 가야바입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였는데 혈연 관계로 맺어진 두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을 무대로 종교 영역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누가가 세례 요한의 출현에 대해서 말할 때 왜 이와 같은 정치 종교적인 상황을 언급했을까요? 세례 요한이 발탁된 시대적 상황이 어둡고 혼탁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그 때의 상황은 혼란과 분열과 절망과 죄악이 온 누리에 가득찼던 시대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 혜성과 같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II. 발탁(拔擢)

      ①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여러분, 2절 후반부를 보세요. 누가는 이와 같이 그 당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던 6명의 이름을 차례로 언급한 다음에 갑자기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어둡고 혼탁한 시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뜻밖에 빈들의 세례 요한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메신저, 즉 사자(使者)로 요한이 발탁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입니까? 마 3: 3에 보면 세례 요한은 빈들, 즉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石淸), 즉 돌에서 나는 생 꿀을 먹으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궁궐이나 성전을 기반으로 한 실력자들과 달리 오직 하나님의 뜻만 구했던 빈들의 영성을 가진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요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당시 예루살렘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최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들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빈들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했던 야인(野人) 중에 야인(野人) 세례 요한 위에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가 1-2절에서 그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진 통치자들의 이름을 쭉 소개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 요한 위에 임했다고 선언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 임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화려한 제의(祭衣)를 입고 영광스러운 제사를 주관하는 대제사장들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정반대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 빈들에서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로 생식(生食)을 하며 살았던 요한 위에 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당시 로마나 예루살렘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던 정치 종교 지도자들 위에 임하지 않았고 빈들에서 생활하던 일개 무명 선지자 요한 위에 임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왜 하필 세례 요한 위에 임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 즉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불의하고 혼탁한 시대 상황 속에서 왜 하필이면 세례요한을 발탁해서 쓰셨을까요? 그것은 세례 요한의 맑고 고운 영성과 의로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만한 그릇을 물색하셨는데 요한의 맑은 영성과 공의를 사모하는 마음을 아시고 그 위에 말씀을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영광과 권력과 이권에 욕심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 위에 임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복잡한 사람들 위에 임하지 않습니다! 비록 이름 없는 일개 무명의 선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맑은 영성을 품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의를 목말라 하던 세례 요한 위에 임했던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위에 임했던 것이지요!

      ②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세례 요한은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만 세례 요한은 언제나 세례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요한’과 쉽게 구분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 강 주변의 온 지역을 찾아다니며 세례를 주었습니다. 마 3장에 보면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란 말 그대로 물로 정결케 하는 정결례(淨潔禮)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그냥 세례가 아니라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는 말입니다. 요한은 단지 물로 세례만 준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하나의 외적 결과요, 표시에 불과했지, 그 세례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회개였습니다!

      여러분,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를 뜻하는 희랍어 ‘metanoia’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과 함께 방향을 바꾼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어서 의도적으로 어떤 행위를 그만두고 정반대의 방향을 선택한다는 뜻이지요! 죄악된 일을 하다가 그것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마음을 바꾸어서 그 죄악된 삶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회개는 반드시 ‘죄사함,’ 즉 ‘죄의 용서’를 불러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해서 악한행실을 고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자 결단할 때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주홍같이 붉은 죄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진홍같이 붉은 죄도 양털같이 희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하지 않고서는 죄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이유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사람들을 물 속에 집어넣다가 다시 빼내는 정결 예식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내적인 회개와 죄사함의 외적 표시로서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마치 학교의 교과 과정을 다 마칠 때 수료증이나 졸업장을 주어서 학생이 교과 과정을 다 이수했다는 사실을 외적으로 입증해주듯이 세례 역시 우리가 회개함으로서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내적 사실에 대한 외적 증명에 다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바른 순서는 ‘회개’→‘죄사함’→‘세례’이지 세례가 제일 먼저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회개와 죄사함 없이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세례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외적 세례 하나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는 것, 이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세례 요한은 또 무엇을 했습니까?

    ③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도록 만왕의 왕, 만유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예비했습니다.

      여러분, 본문 4-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누가는 구약 성경 사 40: 3-5절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지요. 세례 요한의 사역은 한 마디로 말해서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군대 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높은 분이 부대를 방문한다 하면 몇 주 전부터 부대 안이 발칵 뒤집히는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조그만 대대에 군단장이나 군사령관 혹은 육참총창, 혹은 대통령이 방문한다 하면 대대 안이 벌집을 쑤셔놓은 듯 요란합니다. 높은 분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방문할 수 있도록 길을 닦고 보수하고 대대적인 청소도 하고 해서 난리를 피웁니다. 특히 대통령이 최전방을 방문하되 헬기가 아닌 차량으로 방문한다고 할 경우 구부러진 길을 바로 하고 웅덩이는 메우고 해서 편하고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준비를 합니다.

      본문 4절이 바로 이와 같은 준비 과정을 보여줍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세례 요한은 정성을 다하여 길을 닦고 준비하는 사명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일개 사단장이나 군단장이나 군사령관, 육참총창, 대통령이 온다해도 최선을 다해서 영접할 준비를 하는데 온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먼저 길을 곧게 합니다. 혹시라도 적이 매복할지도 모르는 커브길을 없애고 직선길로 곧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골짜기는 메웁니다.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만듭니다.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만듭니다!

      왜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준비를 합니까? 만왕의 왕, 만유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쉽고, 편하고, 안전하고, 영광스럽고, 빨리 도착하실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세례 요한은 바로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편히 오실 준비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길을 닦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앞으로 한 2주일 정도 있으면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오시는 성탄절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정성스레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의 길을 닦고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의 모든 굴곡을 평탄케 해야 합니다. 미움, 시기, 질투, 탐욕 등으로 일그러지고 골이 패인 우리의 마음을 믿음과 사랑과 자비로 메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길을 닦기 위하여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회개와 죄사함’입니다. 세례 요한 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으며, 그 다음에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던 것처럼, 우리 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야 하며,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굽어진 우리의 마음을 곧게 펴고 깊게 패인 마음의 골짜기를 메우고 평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 6절이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여기에서 모든 육체는 단지 모든 인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모든 육체를 뜻하는 희랍어 ‘para sarx’는 온 우주의 피조 세계 전체를 통칭하는 용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이 땅 위의 모든 피조 세계에까지 구석구석 미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1)“하나님의 말씀이 세례 요한 위에 임해서”, (2)“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3)“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게 될 때”, (4) 결국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비롯한 온 피조 세계가 구원을 얻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오신 목적이 바로 온 피조 세계를 구원하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III. 마음의 길을 닦으십시오!

      얼마전 신문에 훈훈한 미담이 하나 있었습니다. 서울대 의대에 어떤 부부가 88억이 넘는 재산을 선뜻 기부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폐암과 위암을 조기 진단해서 치료할 수 있는 연구기금으로 써달라고 그 많은 재산을 기증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둘 다 암에 걸렸지만 치료를 잘 받아서 완치가 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분은 자신들부터가 조기 진단에 따른 완치의 기쁨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이 기쁨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서울의대 역사상 외부로부터 받은 최고액의 기부금을 희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기사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은 것은 특히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로, 이 부부의 기부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싶다는 학교측의 요청에 두 사람은 극구 손을 내저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해서 남에게 알린단 말입니까?” 하면서 성경 말씀 그대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노부부가 서울의대를 방문하는 자리에는 마흔 전후의 아들 2명도 동행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기부 의사를 선뜻 동의해준 자식들의 마음도 참 기특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부는 자식들에게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자 유산”이라는 탈무드의 교훈을 늘 강조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엄청난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병원에 기부하겠다고 했을 때 자식들 역시 기꺼운 마음으로 부모님의 뜻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자식 농사도 잘 지은 것이지요!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순간적으로 이 가정이 기독교 가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귀에는 탈무드를 가르쳤다는 말부터가 예사롭지 않게 들렸습니다. 어쨌거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들려온 참 아름다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은 미담이 들려 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주님이 오시는 길을 닦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또 누구겠습니까? 이기심과 질투, 탐욕으로 인해 굽어지고 골이 패인 우리 마음을 곧게 하고 평탄케 해서 예수님께서 기쁨으로 오실 수 있도록 예비하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크리스마스가 두 주정도 남았습니다. 만왕의 왕, 만유의 주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쉽고, 안전하고, 평안하고, 영광스럽게 오실 수 있도록 마음의 길을 닦읍시다! 맑고 고운 영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받읍시다! 무엇보다도 굽어지고 깊게 패인 우리 마음의 굴곡들을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곧게 하고 평탄케 합시다! 바로 이렇게 할 때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하 만민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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