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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심한 사람도 쓰신다 (막 9: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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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야고보의 동생으로, 베드로와 더불어 으뜸 되는 세 명의 제자 중에 하나다.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어부로 동업했고, 나중에는 사람 낚는 어부로서도 동역자가 되었다. 안드레와 함께 침례요한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랐다(요1:35-40).

‘요한’은 “여호와는 은혜롭다”는 뜻이지만, 그러나 형 야고보와 함께 ‘보아너게’(분노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으로, 과격한 사람이었다. 사마리아인에게 불을 내려, 다 죽이기를 원했다(눅9:54). 주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해달라고, 간청할 정도로 출세욕이 컸다(막10:37).

본문을 보면, 요한이 어떤 마을로 복음 전하러 가던 중에,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고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왜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를 보았다. 이때 귀신들린 한 소년이, 땅 위에 구르면서 소리지르고, 자기 몸을 뜯고 있었다.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이 미처 손을 쓰기 전, 낯선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 그래서 요한은 “감히 당신이 어떻게 우리 예수님의 이름을 쓸 수 있소. 당신은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권세도 받지 못한 사람이니, 그 이름을 사용하지 마시오”라고 했다고 주님께 보고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39-4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 한 그릇을 주면,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하셨다(41).

예수님은 눅9:50에서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폭넓게 사람을 바라보셨으나, 요한은 상대적으로 그 이해의 폭이 좁았다. 우리는 나와 똑같지 않다고, 저들은 틀렸다고 배척해서는 안 된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하라.

1. 속이 좁은 사람이 되면, 사람들을 해칠 수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사칭하여,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귀신을 쫓아내는 좋은 일을 했다. 그렇지만 사람을 건강하게 치료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 일이 자기들에게 미칠 득실만을 계산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주체가 되지 않으면, 좋은 일을 하는데도 훼방 놓고, 폄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에 덕이 되는가?’를 기준 삼지 않고 ‘내게 이익이 되는가? 나를 따르는가? 아니면 내 편인가?’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총체적으로 경험하는, 편가르기, 흑백논리, 그리고 집단이기주의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교회에 나중에 온 사람이 좋은 일을 하려고 할 때, 양보해 주면 어떤가? 그런데 내 자리를 뺏어간다고,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며, 시기 질투하고, 텃세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대적으로 만들지 말라. 더불어 함께 일하는 사역을 너무도 못하는 편협한 마음을 가졌다. 요한은 자기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속 좁은 마음을 가졌다. 이렇게 속이 좁게 되면, 사람들을 해칠 수 있다.

저는 어렸을 때, 축대를 높이 쌓은 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우리 집에 저보다 8살 많은 형 친구가 어머니와 함께 놀러왔는데, 우리 집 축대에서 낭떠러지 밑으로 소변을 봤다. 그때 저는 소변을 보는 형의 친구를 뒤에서 삽으로 밀어버렸다. 왜 우리 집에 와서, 소변보느냐며 밀어버렸다.

형의 친구는 약20M 밑으로 떨어졌고, 수백 바늘을 꿰매는 사고가 생겼다. 낭떠러지 밑으로 소변을 좀 누면 어떤가? 그런데 왜 우리 집에서 그러느냐고 좁은 속으로 밀어버려, 수백 바늘을 꿰매는 큰 사고가 났다. 속이 좁았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어서 일어난 사건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 우리 교단만 제일이고, 다른 교회, 다른 교단은 평가절하 하는 교파주의가 바로 이런 부류다. 더불어 함께 일하는 사역에 있어서, 우리는 너무 미흡하다. 요한은 자기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속 좁은 마음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대적이 아니면, 다 포용하는 넓은 마음이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일하는데, 원칙을 제시한다. 원칙은 기준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원칙을 내세우기 전에, 그 원칙이 어떤 원칙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을 배제하기 위한 원칙인지, 아니면 좀 더 많은 사람을 품기 위한 원칙인지, 이 결정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원칙을 가지고 품으려 하셨다. 그러나 요한은 원칙을 내세워, 항상 사람들을 내쫓는 자리에 있었다. 지금도 원칙주의자라 불리는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데 그 원칙을 사용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원칙을 확대 해석하여, 많은 사람을 폭넓게 품기 원하셨다. 살다 보면 까다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까지 폭넓게 품으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서 성취할 수 있는 그런 작은 비전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자기 혼자서 이룰 수 있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반드시 함께 뛰는 사람이다. 따라서 나만 옳다고 생각하며, 타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마음이, 요한에게 필요했다.

요한은 타인을 포용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는 편협한 인물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그는 변했다.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나? 그는 많은 사람을 품고 사랑해주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다. 예수님을 만나면 다 변화된다.

너무나 많이 변했기에, 자유주의자들은 “요한서신을 쓴 사람은 요한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생겨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요한은, 야망으로 가득 차 있고, 화를 잘 내며 속 좁은 소심한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요한서신의 저자는 사랑의 사도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2. 어떻게 변할 수 있었나?

요한은 예수님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그의 삶과 인격이 점점 변화되었다. 변화는 예수님과 가깝게 교제하는 것에 비례하여 나타난다.

신앙의 변화는, 얼마나 교회를 다녔느냐보다, 주님과 얼마나 가깝게 교제했느냐에 따라 비례한다. 요한은 누구보다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누구보다 오랫동안 주님을 섬겼다. 그래서 요한은 훗날 가장 이상적인 제자의 표상으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제자가 되었다.

요한은 변화산에도, 겟세마네 동산에도, 예수님과 함께 갔다. 특별히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 곁에 앉아,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요13:21-25). 요한은 예수님께서 끌려가실 때, 대제사장의 뜰까지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다(요18:15-16).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곁에 있었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쁜 숨소리와 마지막 유언을 들었다. 예수님은 특별히 요한을 신뢰하셔서,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고, 예수님 대신 평생 자식으로 봉양했다. 요한은 예수님께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사랑하시는 제자”, “또 다른 제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드러내기 위해서, 복음서를 기록했다. 남들보다 높아지려는 야망으로 가득했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이름조차도 밝히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남들 앞에 튀고 싶었던 사람이, 자신을 감추고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원래 극성스러운 어머니 밑에서, 1등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사람이다. 뭐든지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후, 섬김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도행전 이후로 가면, 베드로에게 점점 더 중심이 실리고, 요한은 단지 그의 동역자로만 묘사된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서 앉은뱅이를 고칠 때, 베드로가 주도적인 사역을 했고, 요한은 베드로 곁에서 기도하며 돕는 일만 했다(행3:).

과거의 요한 같으면, “왜 너만 나서느냐? 너 한번 했으니까, 이번에는 나도 한번 해보자”며 싸웠을 텐데, 그러나 이제 그는 섬기는 자리에 만족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타인의 성취를 즐거워하는 자로 변화되었다. 모자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3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믿음, 소망, 사랑이다. 그런데 ‘믿음’에 관해 담은 내용이 요한복음이고, ‘소망’에 관한 담은 내용이 요한계시록이며, ‘사랑’에 관해 담은 내용이 요한서신이다.

요한은 그만큼 깊이가 있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해 정통했던 인물이 바로 요한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겸손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돕는 사람이 멋있는 인생이다. 겸손히 섬기는 자는 오래간다. 사도 요한은 90세까지 살았다. 이런 사람은 오래 사랑을 받게 되어 있다.

3. 사랑이 넘치는 사도가 되었다.

이렇게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속이 좁고, 성미 급하고, 야심만만하고, 편견과 이기심 많던 사람이 헌신과 친절과 사랑의 사람으로 변했다.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사랑 넘치는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은 편애하지 않으신다. 그는 자기가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느꼈기에, 사랑의 사람이 되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할 수 있다.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요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감격 속에 살았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라고 거룩한 사랑을 고백했다. 예수님의 큰사랑을 받은 요한은, 큰사랑을 할 수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느끼면, 우리 안에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하게 된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두려움도 이길 수 있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오자, 제자들은 다 도망쳤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제일 먼저 돌아온 사람이, 바로 요한이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앞으로 끌려가실 때,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고, 또 그곳 여종이 한패라고 추궁하자,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까지 퍼부었으나, 요한은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따라갔다. 끝까지 갔다.

오직 요한만이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서 있던 제자였다. 악의와 독설이 쏟아질 때, 도망가지 않고, 적진 한 가운데 서 있던 사람이 요한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들이,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친 마리아를 요한에게 의탁하면서 “네 어머니니라”(요19:27)라고 하셨다. 예수님 바로 옆에 있었기에, 요한은 이런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목마르다”(요19:28)는 말씀과 “다 이루었다”(요19:30)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만 들은 말씀이었다.

만일 요한이 끝까지 예수님 곁에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목마르다는 사실도 몰랐다. 또 다루셨는지, 반만 이루었는지도 모르고, 요한은 군병들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는 내용까지도 기록했다(34).

그가 예수님 바로 옆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온전한 사랑 때문이었다. 요일4:18에서 그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고 하였다. 사랑하니까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고백이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우리와 마지막까지 같이 해줄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인간의 용기를 너무 믿지 말라. 아무리 용기 있는 사람도, 절박한 상황에서는 도망치느라 바쁘다. 베드로는 용기가 있었다. 풍랑이 일어나는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고, 칼을 빼들고 설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용기는, 끝까지 가지 않았다. 다급해지자 도망치기 바빴다.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을 길러야 한다. 정말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 옆에 끝까지 함께 있을 수 있다. 또한 사랑하면 큰일을 할 수 있다.

피아노를 열심히 연습하면, 그 곡의 80%는 표현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음악을 완성하는 나머지 20%는, 사랑에서 나온다고 한다. 음악을 사랑하고, 피아노를 사랑해야 가능하다. 완성하는 그 부분은 기능으로 되지 않는다. 최고의 완성은 사랑에서 나온다.

목사에게 사랑이 들어가면, 성도를 변화시키는 설교가 나오고, 과학자에게 사랑이 들어가면, 어려운 사람들의 삶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발명품이 나온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사랑을 가지고 만들면 모든 사람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고, 건강을 책임지는 좋은 음식을 만들어낸다. 문제는 사랑이다.

옛날에는 미워하거나 보복하는 인생을 살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보복과 폭력이 아니라, 희생적인 섬김과 사랑임을 배우게 되면서, 그의 메시지는 사랑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죽지 않았지만 살아있는 순교자였다.

그가 처했던 순교적인 상황에서, 믿음으로 죽는 일도 어렵지만, 믿음으로 살기는 더욱 어려웠을 수 있다. 야고보처럼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요한처럼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도 귀한 일이다.

결론이다.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 질서를 세웠다. 바울은 교회의 기둥, 교리를 세웠고, 요한은 교회의 신앙, 믿음 소망 사랑으로 지붕을 만들고 그 안을 채웠다. 우리도 요한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서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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