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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와 보혜사 성령님 (요 1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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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한해를 보내면서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는 일어났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일어났던 일들 중에 아쉽고 안따까운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해를 결산하면서 교회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믿음 생활에서 실족을 하여 뒤로 물러나는 분들을 대면하는 일입니다. 신앙에서 실족하게 되어 한번 뒤로 물어가게 되면 회복하는 것이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왜 우리는 실족합니까? 실족하지 않았으면 좋은데 종종 우리의 신앙이 실족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나름대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실족이 일어나려면 사소한 것에서 실족합니다. 말한마디에서도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족의 흔적들은 우리에게 상처가 되어서 알게 모르게 신앙생활을 위축하곤 합니다.

먼저 바라기는 교회가 실족의 원인제공을 하지 않도록 함께 조심해야 합니다. 실족하신 분들을 대면해서 조심스레 말을 하다보면 말로인해서 오는 상처들이 큰 것을 봅니다. 믿음이 있는 분들 입장에서는 무심코 던진 말일지 모르지만 약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저희 교회의 경우에는 목장교회에서 서로 마음을 열고 우리의 신앙을 나눕니다. 그때 기대했던 기존신자들의 부정적인 말과 은혜가 안되는 말들은 약한 신자들에게 큰 상처가 되고 실족의 빌미를 제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신앙에 실족하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들이 힘을 키우고 능력을 키우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27년전에 제가 중학생이었던 때였습니다. 제가 처음 자전거를 배우다가 실족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배우다가 좀 실력이 늘어서 비탈진 도로에서 내려오는 것을 연습하던 중이었습니다.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면서 커브를 틀다가 그만 달리는 속도를 제대로 통제하지못하고 결국 담벼락에 부딪혀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부딪힌 자국이 저의 오른쪽 팔에 아직도 문신처럼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저는 자전거를 탈때에 그때의 상처 때문에 스스로 위축되곤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지만 자전거를 타고 갈때에 장애물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그 장애물을 피해가고 넘어가고 다스려갑니다. 그러나 운전실력이 좋으면 실족을 최대한 줄이고 자전거를 잘 탈 수 있습니다. 몸과 하나되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보면 요즘은 산악자전거라고 하여서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장애물도 너끈히 감당하는 것을 보곤 합니다.

오늘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이 세상에서 실족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을 떠나면서 세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좋은 약속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오늘 성도들에게 우리 주님이 주시는 최대의 약속 가장 큰 선물은 무엇입니까?
바로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성령님만큼 중요한 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 하신후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면서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계속 우리와 함께 육신의 모습으로 계신 것 보다 더 유익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육신의 모습을 가지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실 수 밖에 없지만, 성령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일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역사하는 범위와 깊이가 완전히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 성령없이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앙에서 실족하고 실패자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맨손으로 힘센 사자와  싸우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함께 신앙생활 하지  못하는 성도는 다 세상과 시험앞에서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신앙생활 하는 성도는 다릅니다. 그는 아무리 악하고 냉랭한 세상시험을 만나도 결코 믿음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승리자가 됩니다. 이들에게 신앙은 결코 장식품이 아닙니다. 삶의 능력입니다. 이 모두가 성령님이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역사하시는 것일까요?

1. 보혜사 성령님께서 동거하면서 우리 속에서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성도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구체적인 처소가 어디입니까? 바로 성도들 속에 거하여 계십니다.
요한복음 16:7에 우리 주님은 제자들을 떠나면서 보혜사 성령님을 너희에게로 보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님께서는 제자들을 포함한 성도들에게 찾아오셔서 함께 하여 주십니다.
요한복음14:16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합니다. 여기 한번 성도를 찾아온 성령님은 절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하되 우리 속에 함께 하여 주십니다.7절에 보면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함께 하는 성도들의 몸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3:16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도들에게 성령이 찾아오시어서 그 속에 함께 거하시는 이 일은 구약에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 에스겔36:26에서 “또 새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신을 너희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일어날 그 놀라운 일들을 에스겔을 통해서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의 소생입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의 환상은 바로 골짜기의 마른뼈들이었습니다. 골짜기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습니다. 이 골짜기의 뼈가 누구입니까? 바로 영적으로 죽어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이 죽은 뼈가 소생함을 얻습니다. 어떻게 소생함을 얻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살겟느냐 묻습니다. 그러자 선지자는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네 주께서 뼈들에게 명하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합니다. 생기가 닿자 골짜기의 마른뼈들이 살아나는데 극히 큰 군대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로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주님의 백성의 부흥이 이와 같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성령님을 모신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함께 하는 그 사람은 골짜기의 마른뼈가 생기를 얻어 군대를 이루는 것같이 성령의 사람은 능력의 사람이요 승리의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먼저 내 안에 성령이 계신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한번 임한 성령님은 절대 떠나는 법이 없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여주십니다. 날마다 함께 하여 주십니다. 지금 이 순간도 함께 하여주십니다. 내가 세상에 있을때에 항상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할 것은 그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임하여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어떤한가 그 마음을 따라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얼마나 인격적이고 예민한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따라 일을 하십니다. 그 성령님을 우리가 속일 수 없고 거역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우리를 잘 알고 우리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혜사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일하시는 마음의 사람으로 그분께 여러분을 내어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성령님이 원하시는 욕심대로 우리의 마음을 내어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이땅에서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쁨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화평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속에는 성령님도 계시지만 나의 옛사람의 소욕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육체의 소욕은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갈5:17에서 육체의 소육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은 지금 여러분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옛사람의 욕심이 일어나고 못된 습관 죄성이 발동하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못된 죄는 떠날지어다’라고 하십시오. 모든 못된 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끊으십시오. 버리십시오.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나의 욕심을 따라 행하던 옛사람의 습관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잇습니까?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견고한 진과 같이 마음에 요새를 틀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그런데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대장 예수님은 강한 능의 용사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구하시고 그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려분의 마음에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심으로 새마음의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2. 보혜사 성령님께서 세상에서 성도를 도우십니다.

8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님께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해서 세상에서 도우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도우시는가 하면 종합적으로 도우십니다. 성령님의 이름을 7절에 보면 보혜사라고 합니다. 이것은 원어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합니다.이 뜻은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해석가들은 변호자,위로자,권면자,돕는자,상담자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뜻이 가능한 용어를 성령님을 소개하는 것은 성령님이 다양한 역할을 종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성령님은 성도들을 위해서 때로는 변호자로 위로자로 권면자로 돕는자로 상담자로 그렇게 종합적인 서비스를 하면서 돕는분이십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에서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성도들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15:18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세상과 교회는 서로 대적관계에 서있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 때문입니다.주님이 이 세상에 오셧을 때 사람들이 주님이 잘못하지 않았는데 왜 주님을 책망하고 대적합니까? 자기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제일 의로운줄 알았는데 주님이 오니까 자기의 더러운 것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절로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성도를 대적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 누가 성도들을 도와줍니까? 우리 성령님께서 성도들 편을 들어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옳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 그런 불의하고 죄악된 세상을 따라가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을 통해 주님을 세상에 자꾸 나타내고 선전하십니다.이렇게 성령님께서 주님을 증거할 때 결국 이 세상에 죄에 대하여,의에 대하여,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우선, 성령님은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증거되는 곳마다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마10:34 “나는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십니다.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라고 합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죄를 알게 해주었기 때문에 결국 핍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떠나고 성령이 나타나는 곳은 바로 주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온 것은 세상을 더욱 살기 좋게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결국 세상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사는 것이 죄인지 알게 해주기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분명히 미친 사람 취급을 할 것입니다. 아니 예수 안 믿는  것이 어떻게 죄입니까? 오늘 이 자리에도 예수 안 믿는 것을 죄라고 인정하는 데 주저하는 분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분명히 교회에서 그렇게 듣고 배웠지만 솔직히 예수 안 믿는 자가 왜 살인자 보다 더 큰 죄인인지 모르는  신자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 자기 지식으로만  신앙생활 하는 자 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과 깨닫고 믿어지는  것은 다릅니다. 분명히 예수 안 믿는 것은 죄입니다. 죄 중에도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죄는 지옥가는 길목에서 다 용서받을  길이  있지만 이'예수 안 믿은 죄'만큼은 용서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령님은 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증거되는 것은 의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떳떳히 설 방법을 아십니까? 죄가 하나라도  있는 자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마음 중심까지 보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 있을 수 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  모든 사람들이 결국 한번은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그 인생의 성패가 결정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돈을 벌어도 이것부터 해결해 놓고 돈을 벌 것이고 국회의원 대통령도 다 좋지만 이 문제 해결 못한 자는 지금 헛되고 헛된 것에 정신 팔려  살고 있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대통령도, 재벌도, 박사도 다 소용없습니다. 오직 죄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온전히 의로운 자만이  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수로 우리가 죄 하나 없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선다는 말입니까? 누가 그 방법을 아시는 분 계십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죄를 씻을 방법이 없습니다. 죽음밖에는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고독하게 되는 지 알 수 없습니다.  부모도 남편과  아내도 자녀들도 그때는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나 혼자 나의 죄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설 수 있는 그  길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10에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부활  승천하여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을 붙잡을 때 죄인인 우리도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다는  바로 이것은 오직 성령님만이 알게 해 주시고 또  믿게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세째, 성령님은 심판에 대하여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증거되는 것은 심판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미래는 커녕 5분 뒤에 될일도 모릅니다. 미래를 아는 것은  지혜롭게  사는 힘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내일 될 일을 알 수 있다면, 오늘 우리는 얼마나 지혜롭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일년 뒤에 될 일을 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은  이와같은 것과는 비교 할 수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의  제일  마지막에 될 일에 관한 것입니다. 마지막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여기서 모든  것이 결정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에는 어떤 일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 세상을  움직여가는  악의 세력인 사탄이 심판을 받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11에서 예수님은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사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의 죄가 적나라하게 들어나고,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완전히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최종 심판의 때가 다가옴을 느끼며 최후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있을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한번 죽는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9:27)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을 알지 못하는 자는 세상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근심, 두려움, 유혹, 탐심, 시기 질투,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오직 방법이 있다면 심판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난뒤에 길거리에 담대히 나가서 사람들에게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2:40)고 외친 것입니다. 심판을 아는 데서 인생을 사는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생활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성령님의 도움을 힘입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풀 서비스로 도우실 것입니다. 언제든지 도움을 구할때마다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알게 하시면서 실족하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면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실줄 있습니다. 성도는 성령의 도움을 받을때 세상을 이기면서 살게 될줄 믿습니다.

3. 성령님께서 성도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13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요17:17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합니다. 성경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말씀은 ”진리의 성령“께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벧후1: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기록한 진리이기 때문에 성령이 있는 사람만이 말씀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인간이 사물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시력이 있어야 하고 객관적인 빛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어둠 속에 있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아무리 빛속에 있어도 시력이 좋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본래 우리는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찾아오셔서 우리 속에 이제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제 시력이 회복된 것입니다.그러나 성령이 들어왔다고 “진리가운데로 인도”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인도할 때 그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가운데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되리라”는 것이 3번 나옵니다. 13절,14절,15절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성령”께서 “아버지의 뜻”“주님의 뜻”을 우리에게 밝히 가르쳐알게해주시는 것입니다. 15절 “아버직께 있는 것은 다 내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깊고 오묘한 하나님을 비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바울은 고전2:13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성도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때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을때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교회를 알았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으로 알았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종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실족하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신앙에 잘못 아는 것으로 인하여서 신앙의 많은 손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미혹”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대개 이단들의 경우 성경을 잘못 알고 문제가 일어납니다.그리고 가끔 성도들 중에서 성경 전체의 맥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떤 한 문구에 매여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어리석을 범하는 것을 봅니다.성경을 한 부분만 가지고 전체 진리로 보면 곤란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더 이상 세상에서 우리가 실족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아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님이 나와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교사이신 성령의 지도를 받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성령이 역사하는 성도는 실망과 핍박의 세상에서 담대한 주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바르게 살아가고 승리하면서 실족하지 않고 살 줄 믿습니다.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도움을 입어 능력있는 승리자로서 삶을 우리 모두가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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