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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땅에 떨어져 죽자! (요 12: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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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수님은 몇 일전, 베다니라는 동네에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이 둘로 나누어집니다. 요한복음 11장 45절,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은 저를 믿었다고 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목격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46절을 보니, 그 중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고자질했다는 건데요. 무엇을 고했다? 예수의 하신 일을 고했다! 곧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신 일을 고자질했다는 거지요.

살다 보면 이런 사람 꼭 있습니다. 기적을 선물로 주어도, 그 선물 받아 향유하지 못하는 <어떤 자>가 꼭 있습니다. 그리곤 쪼르륵 달려가서 오히려 고자질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자>의 고자질은 언제나 더 큰 문제를 야기 시킵니다.

요한복음 11장 47절,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로 모으고 가로되,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어떤 자의 고자질이 공회를 소집하게 합니다. 그리곤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의논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예수님의 기적 앞에 두려워 떨며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고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이 11장 48절인데요, 다 함께 읽어볼까요? / 11:48 / (읽기) /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그랬습니다. 저들이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는 자기네 땅, 자기네 기득권을 빼앗길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결정적인 발언을 합니다. 11장 50절,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 도다!> 예수 한 사람이 죽고, 대신 온 민족이 살아남는 것이 마땅하며, 그것이 모두에게 유익한 길이라는 선언이지요. 예수 한 사람 죽여 우리 모두가 다 살자는 거지요.

대제사장의 이 발언이 있은 날부터, 저들은 아예 내놓고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기 시작합니다. 53절,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 하니라!> 또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어서 고하여 그를 잡게 하라고 포고령을 내립니다(57절).

이런 죽임의 위협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0절을 보니,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합니다. 왜? 11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가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요, 그러면 저들의 땅을 빼앗길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였나요? 요한복음 11장 16절을 보면,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 저를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시니, 도마가 나서서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아니,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다니요, 그러나 도마의 이 말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 주님과 함께 죽겠다는 각오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 앞에서, 부디 <어떤 자>는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 베풀어 주시는 기적을 목격한 후, 바리새인들에게 쫓아가 고자질하는 그런 <어떤 자>는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다시 오시는 주님, 마음 열고 영접하시고, 주님 주시는 기적의 선물, 감사로 받아 향유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어떤 자>는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 2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악한 무리의 움직임을 아신 주님, 11장 54절, 빈들로 나가십니다. 그러나 유월절이 가까이 오자 계속 빈들에만 머물러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 소명을 이루기 위해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만 했습니다. 해서 우리 주님, 다시 베다니로 오십니다. 12장 1절, 유월절 엿새 전의 일인데요, 예수님이 베다니에 다시 오시자 마르다는 음식을 장만하여 주님을 대접하고, 마리아는 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립니다.

그렇게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네 집에서 하루를 지내신 예수님, 이튿날, 유월절 닷새 전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러자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맞으러 나가,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도 직접 외쳐 볼까요? / 12:12-13 / (읽기)

바로 그 때였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 요한복음 12장 20절을 보니, 명절에 예배하러 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갈릴리 벳새다 출신 제자 빌립에게 와서, 예수님을 뵙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빌립은 곧 안드레에게 가서 이 일을 말하고, 둘이 함께 예수님께 가서 여쭙습니다.

우선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왜 헬라인 몇이서 열두 제자 중 빌립을 찾았을까 하는 점이요, 빌립은 또 왜 예수님께 직접 가지 않고 먼저 안드레를 찾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만, 아마 빌립이란 이름이 헬라식 이름인 점으로 보아, 저가 헬라어에 능했기 때문이라 추정되며, 한편 빌립이 안드레를 찾은 이유는 이방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유대인들의 전통과 관습 때문에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를 먼저 의논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런데, 이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 만나겠다든지, 만나지 않겠다든지, 답변은 주시지 않고, 전혀 엉뚱한 말씀을 주십니다. / 12:23 / (읽기) / 한 마디로 때가 왔다는 겁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겁니다.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말씀만 들으면, 예수님이 곧 엄청난 승리를 거두게 되신다는 말씀 같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권력 및 유대 정권과 맞서 싸워 이김으로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아마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은, 우리 예수님이, 예루살렘 전체를 접수하여 권좌에 앉으시는 모습을 연상하며 매우 흥분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통념에 따르자면 영광이란 전쟁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곧바로 영광이란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주십니다. 직접 들어봅니다. / 12:24 / (읽기) / 여기 보니,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데요, 아니, 방금 전에 영광의 때가 왔다고 하신 주께서, 곧바로 이어 주시는 말씀이 땅에 떨어져 죽자고 하시다니요. 영광과 죽음, 도무지 만날 수 없는 두 단어가 여기서 만나고 있습니다. 영광을 위해 땅에 떨어져 죽자는 겁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서 민족적인 영웅의 모습을 보기 원했고,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영웅의 모습을 보기 원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헬라인들과 제자들의 질문 앞에서, 밀알의 비유를 통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진리를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짧은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그리고 이번 대림 절기에 왜 다시 오시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선, 23절에 나오는 <영광>이란 단어는, 국가적 차원의 부흥과 그에 따른 영광을 암시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드디어 입을 열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긴장과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수백 년을 기다려온 영광의 때, 이스라엘이 다시 일어서는 때가 왔구나!>

그러나 우리 예수님, 다음 순간, 저들의 이런 통념을 여지없이 깨뜨리십니다. 그런 영광이 아니라는 거지요. 아니, 그런 건 영광이 아니라는 거지요. 나와 함께 얻어 누리게 될 영광은 전쟁을 통해 싸워 쟁취하는 영광이 아니라는 거지요. 내 자신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얻을 수 있는 영광이라는 거지요. 마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죽지 않으면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영광이라는 거지요. 한 마디로 역설인데요, 그러나 진리이지요. 역설적 진리 말입니다.

# 3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밀알로 오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 이 땅에 밀알로 다시 오십니다. 우리 주님, 땅에 떨어져 죽기 위해 이미 오셨고, 또한 땅에 떨어져 죽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은혜요 그래서 감사인데요, 본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나, 그 동등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하늘에서 이 땅으로 떨어져 죽기 위해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밀알로 오시는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우리 함께 땅에 떨어져 죽자는 겁니다. 땅에 떨어져 죽자, 죽어야 산다, 죽어야 영광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사는 밀알입니다. 밀알로 오시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 제자들, 내가 먼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영광의 결실을 거둘 수 있는 밀알입니다. 영광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해서 주신 주님의 말씀, 다시 읽으며 가슴에 새깁니다. / 12:24 / (읽기)

그렇다면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결실을 맺으며 영광을 얻게 된다는 말씀인가? 이에 대하여 몇 가지 가르침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대림 절기를 사는 우리에게 소중한 지침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밀알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밀알은 자기를 주장하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 내가 왜 썩어야 합니까? 반문하거나 거부하는 법이 없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네, 죽겠습니다! 너 자신이 썩어 새 생명의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느 경우에도 밀알이 자기를 주장하여 창조 섭리에 따른 명령을 거역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그리 하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며 이 땅에 밀알로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기꺼이 땅에 떨어져 죽는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 현대인들에게 자기를 포기하라는 말, 쉬운 말이 아닙니다. 땅에 떨어져 죽자는 말, 도무지 따라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가능성 같습니다. 우린 나 자신이 조금만 손상되는 것 같아도, 치를 떨며 분노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밀알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 그래도 땅에 떨어져 죽자 하십니다. 자존심도 버리고, 자기 권리도 포기하고, 자기주장도 다 내려놓고, 그저 땅에 떨어져 죽자고 하십니다. 그래야 영광을 얻을 수 있다 하십니다. 해서 우리의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부탁합니다.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십시오.>(벧전 5:3)

<주장 하는 대신 땅에 떨어져 죽겠습니다.>

2. 밀알은 자기를 스스로 높이지 않습니다.

밀알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일 줄을 모릅니다. 그저 밀알은 낮은 데로 임하여, 땅 속으로 파묻힙니다. 자기를 높이기는커녕 아무도 보지 못하는 땅 속에 스스로를 감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 하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낮은 땅으로 내려 오셨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는 인카네이션(incarnation), 곧 성육신이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곧 밀알로 오시는 주님의 성탄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낮아지셨습니다. 의인이 죄인이 되신 것이요, 주인이 종이 되신 것이요, 영광을 버리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입으신 것이요, 왕자가 스스로 거지가 된 것이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죽어 영광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현대인들에게 자기를 높이지 말라, 스스로를 낮추라는 말, 쉬운 말이 아닙니다. 요점은 오히려 자기를 높이는 시대입니다. 문제는 너도 나도 스스로를 높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이름에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런 것처럼 과장하는 거지요. 실속 없이 바람만 들어간 인생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는 영광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많은 결실을 거둘 수 없습니다. 밀알은 스스로를 높이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셨던 겁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겸손 하라. 명성은 인간이 주는 것이니, 감사하라. 자만은 자아가 주는 것이니, 조심하라.>

그렇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 스스로 높이는 대신, 우리 땅에 떨어져 함께 죽자 하십니다. 옆의 분과 함께 대림절 인사 나누며 다짐할까요?

<스스로 높이는 대신 땅에 떨어져 죽겠습니다.>

3. 밀알은 자기를 희생합니다.

밀알은 새로운 열매를 맺기 위하여 자기를 완전히 희생합니다. 밀알이 자기를 위하여 남겨 두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것, 그것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 하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셨습니다. 우리 예수님, 십자가를 지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러 오신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 편에서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니 값없이 받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 예수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점입니다.

대림 절기는 낭만적인 절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죽기 위해 밀알로 오시는 절기입니다. 우리를 향해 땅에 떨어져 죽자고 초청하시는 절기입니다. 모든 것 다 희생하고 우리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자고, 오늘 이 땅의 마구간을 향하여 가자고 초청하시는 절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내가 주장할 것이 많습니까? 하나님의 뜻보다 내 고집이 더 우선합니까? 나를 스스로 높이고 싶은 마음에 초조하십니까? 모든 것 다 희생하고 땅에 떨어져 죽자는 주님의 말씀이 부담스러우십니까? 그리스도의 겸손을 내 몸으로 익혀가고 있습니까?

# 4
지난 12월 5일부터 8일까지, 주님의 은혜 가운데, 동광 트레스 디아스 제1회 영성훈련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성격 상, 자세한 간증을 드리지 못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다녀오신 어떤 분들에게 물으셔도, <참 좋았습니다. 다음에 꼭 참석하시지요!>라는 인사 이외에 더 듣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금번 동광 트레스 디아스 제1회 영성 훈련을 통하여 주신 분명한 깨달음은, 하나님께서 동광 교회를 엄청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영성 훈련 기간에 얼마나 큰 은혜를 주시는지요. 웃다가 울다가, 울다가 웃다가, 정말 꿈처럼 영화처럼 지나간 3박 4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이번 영성 훈련에 봉사자로 참여한 마흔 한 분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아하, 그래, 이 분들이 바로 밀알이었구나, 이 분들이야말로 오늘 주신 말씀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모범을 보여 주신 분들이구나, 그래서 이번 영성 훈련에 큰 은혜가 임했고, 하나님 영광 받으셨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제 눈에선 다시 감사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마흔 한 분의 봉사자 가운데, 황현주 자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극단 미리암 소속의 뮤지컬 배우입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자이고요, 얼른 보기에 공주 같아서 험한 일을 해 본적이 없는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3박 4일 동안 맡게 된 봉사부서가 식당이었습니다. 이 추운 날씨에, 아침 먹고 나면 치우고 바로 점심 준비하고, 점심 먹고 나면 치우고 바로 저녁 준비하고, 저녁 먹고 나면 치우고 다음 날 아침 준비해야 하는 벅찬 일정이었지요.

이번에 훈련받으러 참석한 분 가운데는 시각장애를 안고 있는 우리 박두종 집사님도 계셨습니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식사 때가 되면 박두종 집사님이 걱정되었습니다. 익숙하지 못한 환경에서 제대로 식사를 하실까? 그런데요, 바로 그 황현주 자매가 박 집사님을 위해 시중을 들어 주시는데요, 식사 때마다 손수 반찬을 따로 담아 상을 미리 차려 놓고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기 김치 있고요, 여기 계란 반찬에, 여기 콩나물 있고요, 여기 물이에요, 국 뜨거우니 조심하시고요.>

그렇게 하기를 3박 4일 내내, 옆에서 그 모습 보면서 얼마나 감사하고 눈물이 나는지요. 저 젊은 처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존심 강하고, 무대 위에서 박수만 받던 뮤지컬 배우가, 봉사를 해도 자기를 과시할 만한 상대에게 하고 싶을 텐데, 우리 박 집사님을 저토록 극진히 섬겨 주다니, 그래, 이거야, 이게 밀알이지, 다른 게 밀알인가? 그러고 보니, 그 자매 얼굴이 천사 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금번 동광 트레스 디아스 제1회는 41명의 밀알들이 땅에 떨어져 죽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마흔 한 개의 밀알이 스스로 땅에 떨어져 죽는 모습을 보시고, 넘치는 은혜와 함께 큰 영광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애 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동광 트레스 디아스 자체가 서울 본부의 공인 하에 그 첫 문을 열수 있도록 애를 써주신 트레스 디아스 서울 공동체의 운영위원장 이철지 장로님, 그리고 지난 3개월 이상 눈물로 기도하며 크게 애를 쓰신 우리 교회 장옥희 집사님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합니다.

말씀 마당을 닫겠습니다. 우리 주님, 밀알로 다시 오십니다. 오셔서 땅에 떨어져 같이 죽자 하십니다. 우리 주와 함께 죽으러 갑시다. 땅에 떨어져 같이 죽자 하시는 주님의 음성 가슴으로 듣고, 아멘으로 순종하시어, 마침내 큰 영광 가운데 많은 결실 맺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장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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