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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아온 아들의 비유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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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둘째가 아버지에게 와서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며칠일 후, 이 아들은 재산을 정리하여 먼 나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아버지의 간섭을 벗어나서 자유를 만끽하며 원하는 대로 돈을 물 쓰듯 쓰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벌지는 않으면서 낭비만 하다 보니 얼마 못가서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까지 들었습니다.

궁색해진 이 아들은 하는 수 없이 어느 집에 머슴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그를 들에 보내 돼지 치는 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무슨 대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를 나누어 먹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나마 배불리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서러움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배고픈 서러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제야 이 아들은 떠나온 고향집을 떠올렸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도 양식이 풍부한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마침내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지친 발걸음을 옮겨 고향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저 멀리 아버지의 집이 보입니다. 아들의 얼굴이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집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받아주실까 생각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한편, 아버지는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날도 아버지는 대문을 열어놓고 문밖을 바라보고 있던 중에 아들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가 되어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아버지는 단번에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 나옵니다.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랑곳없이 종을 불러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그 날 저녁, 아버지는 온 동네 사람을 다 불러서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상태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며 융숭한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지에 관하여 말해 줍니다.

첫 번째로,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을 떠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보살핌과 단란한 가정의 질서를 싫어하여 자기 몫의 재산을 챙겨서 먼 나라로 간 둘째 아들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을 창조하시고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에덴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을 가리켜 법치국가라고 합니다. 독재자나 절대군주가 통치하는 나라에서는 권력자가 제 마음대로 다스리지만 법치국가에서는 의회가 제정한 법에 의해서 국민의 권익을 보장합니다. 그러나 제 나라의 법률을 다 알고 사는 시민은 아무도 없습니다. 현대는 국민 생활에 필요한 법을 계속해서 만들기 때문에 그 누구도 법을 다 알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볼 때 법이 많은 것은 그만큼 살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단 한 가지 법을 주셨다는 사실은 에덴동산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런데 아담은 사단의 말에 넘어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 대하여 이같이 기록했습니다. “1)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뱀의 말을 믿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것입니다. 지음 받은 존재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마음을 품은 것이 곧 교만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뱀의 말을 믿은 것이 곧 불신앙입니다. 이처럼 아담은 그에게 생명과 온갖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배은망덕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물론이요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들이 얼마나 몽매무지하고 어두움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도처의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세요. 그러면 인간들이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을 떠나서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을 섬겨왔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와 불의가 가득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악한 귀신들이 인간들의 마음을 점령했다는 증거입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져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담은 그 영이 죽었으며 그의 육신도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고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에서 쳐 죽이는 비극이 생겨났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에게 임한 부조화는 말할 수 없으리만치 심각했음을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살생과 착취와 반목과 질시로 인간들의 삶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세계 도처에서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천재지변과 인위적인 재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은 국가나 민족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늑하고 사랑이 넘쳐야 할 가정 안에서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가정이 사랑의 보금자리로서의 역할을 잃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 가운데 살기를 포기하고 마귀의 말을 믿고 행한 결과가 이처럼 무서운 비극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렘 2:19) 하신 성경 말씀은 조금도 틀림없는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불행을 청산할 길은 없는 것일까요? 그 방법은 불행의 원인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집을 나갔던 아들이 뉘우치고 돌아왔듯이, 죄인들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무한하신 사랑으로 용납해 주십니다.

한번은 사람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와서는 “모세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에 양심에 가책을 받은 저들이 하나 둘 돌을 내려놓고 돌아갔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세관의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불의한 죄인의 표본처럼 대우받았는데 삭개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대접하는 자리에서 말하기를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일은 골고다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날 골고다 언덕에는 예수님과 함께 두 강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했으나 다른 한 강도는 자기 죄를 뉘우쳤습니다. 이 강도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할 때 즉시로 사죄의 은총을 내려 주셨습니다. 어떠한 흉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예수님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생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을 동안, 은혜 받을만한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구원받는 길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고행이나 수양을 해서 도를 깨쳐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선을 많이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구체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길 때 비로소 삶의 목적과 가치와 보람을 찾게 되며 온갖 저주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생명이 넘치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갑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을 가지고 허랑 방탕하여 창기와 함께 다 탕진해 버렸듯이,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선한 일에 사용하라고 주신 건강과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가지고 죄짓는데 낭비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더 이상 낭비할 것이 없는 결핍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언제까지 유지할 줄 알았던 젊음도 사라지고, 건강에는 적신호가 켜지고, 별처럼 빛나던 재능은 녹슬고, 재물도 더 이상 즐거움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가진 것을 다 낭비하자 크게 흉년이 들어 궁핍해 진 둘째 아들과 같이, 자기 욕심과 세상의 즐거움을 위하여 살던 사람들의 결국은 심한 결핍 상태에 처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떠난 자의 심령은 흉년을 만난 밭과 같아서 아무런 선한 것도 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지 않으시니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황폐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품에 거함으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생명과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가지고 선한 일에 힘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마귀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이 아들은 수중에 돈이 다 떨어지고 그 땅에 흉년이 들자 그곳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살게 되었는데, 그는 이 가련한 아들을 들에 보내어 돼지 치는 자로 삼았습니다. 이 아들을 종으로 삼은 사람은 죄인들을 종으로 삼아 부리는 마귀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섬기든지, 마귀를 섬기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은 마귀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마귀의 종이 되는 것처럼 비참한 상태는 달리 없습니다.

마귀의 종 된 사람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욕심에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이 아들이 들판에서 돼지들과 함께 지내며 돼지 먹이를 먹고, 그것도 부족하여 돼지와 먹이를 다투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방탕할 수밖에 없고 썩어질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의 아비이며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하여 오기 때문에 이런 마귀의 종이 되면 끊임없이 도적질 당하고 속임을 당하며 더럽고 헛된 것을 위해서 수고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섬기는 자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성도님들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순종함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영적으로 죽고 잃어버려진 상태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껴안고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죽었던 자요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 역시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요 고아와 같이 버림받은 상태입니다. 육신은 살아 활동하지만 그 영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죽은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영원한 멸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님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셔서 영원히 함께 있게 하셨으며, 성도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이제, 이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된 연유에 관해서 알아봅시다.

첫 번째로, 이 아들은 고난 중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본성이 어리석어서 자기에게 무언가 믿을 만한 구석이 있으면 절대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려 하지 않습니다. 목을 꼿꼿이 세우고 교만하게 굽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채찍을 사용하십니다. 그렇게 믿던 건강이 사라진다거나, 하루아침에 부도가 나서 망하게 된다거나, 집안에 슬픈 일이 생긴다거나, 하여튼 이모저모로 역경에 봉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무능을 절실하게 깨닫게 만드셔서 교만을 깨뜨리시고 아집을 꺾으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무능을 깊이 자각하면 할수록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 역시 고난을 통해서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외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파선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선장이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걸렸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자기의 죄를 고하고 자기를 들어 바다에 던지면 풍랑이 잠잠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니 물결이 잔잔해 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삼야를 지내야 했습니다. 후끈거리는 열기와 악취로 숨이 턱턱 막히는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룁니다’ 라고 회개하였고, 하나님의 명하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비록 고통스럽기는 했으나 고난은 요나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과 역경이 다가올 때 낙심할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는 기회로 선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아들은 고난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만약에 이 아들이 ‘나의 아버지는 너무 까다롭고 인색해서 내가 찾아가면 당장 내쫓고 받아 주지 않으실거야’ 라고 생각했더라면 집에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그러면 아버지께서 그를 용납해 주실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되,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시며 기억조차 하지 아니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그 많던 재산을 다 어디에 허비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도 무슨 면목으로 찾아왔느냐?” 나무라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말하는 아들의 말에 아들의 상징인 가락지를 손에 끼워주라고 종에게 명했습니다. 이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랑과 인자와 긍휼이 한량없으신 분이시므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절대로 멸시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용납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실 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누추함이나 부끄러운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으로 용서를 베풀어주시고 사랑의 품에 안아 주십니다.

세 번째로, 이 아들은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는 지체 없이 실행에 옮겼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달았으면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자기 죄를 알면서도 회개를 뒤로 미룬다면 영적인 비참함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향을 180도로 돌아서는 결단이 요구될 때 지체 말고 실행해야 합니다. 이 같은 결단이 없이는 진실한 신앙인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택할 것이냐, 세상을 택할 것이냐?’의 양자택일이지 중간은 없습니다. ‘생명이냐, 사망이냐? 축복이냐, 저주냐? 충성이냐, 거역이냐? 사랑이냐, 미움이냐?’의 양자택일입니다.

둘째 아들은 이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좋은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아직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 나와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입맞춤으로 아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그 때 아들은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길 때 진정한 참회와 복종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 자신의 죄인 됨을 알게 되며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한량없이 큼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평생 주님을 전하는 일로 수고했으나 그가 말년에 쓴 편지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의 부족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우리의 생각으로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 때에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신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버지가 아들의 누더기를 벗기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혔듯이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에게 ‘제일 좋은 옷’인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 주십니다. 그리고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었듯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셨습니다. 발에 신을 신겨 준 것 같이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겨 주십니다.

우리는 다 비유에 나오는 아들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났던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한없으신 사랑으로 새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즉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기꺼이 몸과 마음을 바쳐 섬김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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