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기도의 능력(왕하 19:14-19)

  • 잡초 잡초
  • 195
  • 0

첨부 1


왕하 19:14-19

오늘 저는 부흥과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사회가 진실을 잃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능력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가 ‘슬로건이 지배하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행동하려고 하지 않고 구호만 외칩니다.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국가는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북한을 보십시요. “수령이 가라면 우리는 간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매사 이런 식으로 멋진 슬로건이 판을 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엉터리요 공허합니다. 이것이 슬로건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약점입니다.
“나는 난폭운전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스티커를 붙이고도 쏜살같이 달리는 총알택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슬로건과 삶이 전혀 다른 모순된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정답을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교회마다 슬로건이 요란합니다. 어느 교회 슬로건은 “모이면 흩어지고 흩어지면 전도하자.” 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여도 기도하지 않고 흩어지면 딴 짓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슬로건은 무엇입니까? 바로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 입니다.

예레미야애가 1장 12절부터 22절은 고난당한 사람의 자기 고백과 같은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기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에 제대로 힘을 실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고난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고난은 고백적이며 주관적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애가 1장에서도 마치 고백하듯 고난당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고난과 돌이킴에 대한 자기 고백, 하나님의 판단이 옳다고 인정하며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는 호소 이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고난과 돌이킴에 대한 자기 고백입니다. 자기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문제는 바로 이 자기 고백이 없다는 점입니다. 자기 고백 없이 객관적으로 남의 일 이야기하듯이 나오는 사람들은 잘못 된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혼이 날까봐 내가 잘못 했다고 하는 아이는 얼마 없습니다. 다른 아이를 가리키며 째가 잘못 했다고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내 잘못인데 마치 남의 문제이고 나는 아무 문제가 없고 죄가 없는 것처럼 살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 은혜받기 위해서는, 성령받기 위해서는, 부흥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가 우선시 되어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애1:13-17(구약 1143)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베푸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고적하여 곤비케 하셨도다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케 하셨음이여 내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도다 주께서 내 지경 안 모든 용서를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소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밝으셨도다 이를 인하여 내가 우리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를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저희 가운데 불결한 자 같도다”

하나님께서는 불을 보내어 치셨고 덫을 놓아 걸려 넘어지게 만드셨습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을 당한다고 느낄 때 흔히 누구 때문에 안 된다거나 누가 나를 괴롭힌다거나 나를 함정에 빠뜨린다고 생각하여 원망, 분노, 복수심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애가’는 나를 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때, “하나님 제가 범죄했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사람은 회개가 가능합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주신 심판이라고 여길 때부터 회복의 능력이 발휘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4장에 소개되는 수가성 여인도 자기 고백 없이 남 얘기하듯 말할 때에는 예수님의 치유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라고 말씀하시자 자기 고백을 드러냅니다. 그 다음부터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병든자의 모습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자기 고백을 드리는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무엇입니까?
애가 3:41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다시 말해서 마음과 행동이 동시에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이란 겉으로 나타나는 변화만이 아닌 속의 변화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속의 변화란 행동의 변화까지 이끌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마다 계속 늦잠을 잡니다. 늦게 일어나서 허둥지둥 뛰어나갑니다. 그런데도 좀 더 일찍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이처럼 행동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깨달음은 아는 것에서 끝난 것이지 진정한 변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애 3:47-51(구약 1147)
“두려움과 함정과 잔해와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는도다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를 인하여 내 눈이 내 심령을 상하게 하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나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시내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백성들이 눈물 흘릴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부모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의 최고의 무기는 그냥우는 것입니다. 일단 울면 마음이 움직입니다.

자! 이제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졌습니까? 그 다음에는 기도하는 순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는 한 사람이 친구를 찾아가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청을 받은 친구는 한밤중이며 자고 누웠으니 떡을 줄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빌려달라고 했을 때 그 결과에 대해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11: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받아들여지지 않을 법한 일도 간절하게 청하면, 매달리면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냥 한두마디 기도해보는 것으로 응답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문이 열릴 때까지, 찾을 때까지, 구할 때까지 절박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빼 놓지 않는 사람이 바로 히스기야입니다.
히스기야는 좋은 시대에 왕이 된 사람이 아닙니다.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로 히스기야가 왕으로 있는 유다도 정복하려고 호심탐탐 노리고 있는 시절입니다. 정치적인 상황에서만 위기의 시대를 산 것이 아닙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는 아하스 왕입니다. 아하스는 영적으로 매우 타락한 왕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이방 종교의 전통을 따라서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잔인한 일을 행하였고(왕하 16:3) 또 여러 이방 신상과 우상을 만드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대하 28:4). 급기야 아하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중심지인 성전의 문을 폐쇄해버리고 맙니다(대하 28:34).
아하스가 왕위에 있을 때 유다의 영적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습니다. 믿는 자의 영향력이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시대였습니다. 아하스는 한마디로 최선을 다한 불순종, 흔들리는 않는 반역, 불타는 불신앙으로 일관한 악한 왕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스기야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불신앙의 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는 신앙으로 양육되지 못했고 아버지의 불신앙을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신자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 어려서부터 제사 지내는 것, 우상숭배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사람, 하나님을 대적하는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히스기야가 안 좋은 신앙의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타락한 신앙 앞에서 히스기야가 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바로 영적인 개혁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아비를 뒤따라 살지 않고 아비 닮기를 거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스기야가 일으킨 부흥의 비결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악한 세대를 본받기 거부하는 사람을 들어쓰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히스기야가 쓰임받은 이유는 그가 ‘거룩한 거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성경에 뿌리를 둘 때 일어납니다. 역대기에만 해도 13회, 성경 전체를 통해 100회 이상 나오는 하나님의 외침이 있는데 바로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조상이 신앙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단연코 거부해야 합니다. 비록 믿음의 선배라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는 그를 높여서는 안 됩니다. 비로 오래 믿었다고 할지라도 우상의 끈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삶에 동의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집안에서 홀로 신앙의 싸움을 하고 계시는 분이 계실 줄 압니다. 힘내십시요! 수천, 수만명의 사람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앙을 지키려고 하고, 문제를 극복하려고 할 때에 직면하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축복의 가시입니다. 항상 우리 주변에는 가시가 존재합니다.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시기하고 방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한나는 아이가 없고 브닌나에게는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언제든지 쫓겨나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시대에 살던 한나로서는 아이를 낳는 것에 사생결단을 해서라도 꼭! 아이를 낳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한나에게는 가시같은 존재가 있는데 바로 브닌나입니다. 성경 삼상 1: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바로 이 브닌나가 있었기에 한나가 더 열심히 기도하고 그래서 아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브닌나 덕분에 영적 성숙이 이루어졌고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영적 상태에 어려움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밤에 그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핍박이 심할수록 하나님의 만져주심과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여러분 깨닫고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위기의 순간이 닥쳐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고 부흥을 방해하는 문제에 부딪힐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문제를 풀면 됩니다.
기적은 위기의 때에 나타납니다. 기적이란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기적을 가장 많이 체험한 왕이 히스기야 왕입니다.
히스기야 시기에 앗수르 산헤립의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포위당하는 위기를 당합니다. 고대 전쟁에서 패배란 남자는 죽음을 , 여자와 아이들은 모두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포위된 히스기야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실직, 질병, 살 집이 없는 고통, 진학의 문제, 결혼의 위기, 영적인 문제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죽음의 위기보다는 덜 어렵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의 문턱에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왕하 19:3). 아이를 낳기는 낳아야겠는데, 아이를 살리기는 살려야겠는데 힘이 없는 것입니다. 어찌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사수해야겠는데 사수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스기야의 문제입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보낸 항복하라는 편지를 들고 성전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왕하 19:14-19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 열왕이 과연 열방과 그 땅을 황폐케 하고 또 그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저희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곧 나무와 돌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랍사게가 항복하라고 위협하며 소리를 높였을 때, 많은 사람들은 히스기야가 비상 회의를 열어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전에는 그런 회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포위되자 히스기야 왕은 편지를 주님께 보이며 기도합니다.
위기를 맞았을 때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제목’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막다른 골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자리’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도 환경적인 제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환경에 의한 속박, 질병에 의한 속박, 장애에 의한 속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언제든 기도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서 있는 곳을 기도의 자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출애굽기 3:4-5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은 어디든 거룩한 곳이 된다는 말입니다. 광야라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은 거룩한 땅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땅을 거룩한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이었습니다. 그가 머무면 궁에서도, 전쟁터에서도, 심지어는 피난 생활중에 있던 광야나 적국에서도 그는 훌륭한 기도를 드렸던 사람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도 기도와 찬양을 드렸을 때에 기적이 일어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좋을 때만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반대로 아주 극심한 고통중에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는 곳, 여러분이 계신 곳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땅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기도함으로 우리가 가야 할 목표가 무엇입니까? 바로 충만함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이 편히 쓰실 수가 있습니다. 충만이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속사람이 충만해지면, 겉사람이 깨집니다. 그때 흘러넘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이 충만함을 받아 사시기를 바랍니다.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이 세상에 진공은 없습니다. 무엇인가로 채워야만 합니다. 충만함을 잘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알코올 중독에 걸렸습니다. 오랜 기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는데, 술집 앞에서 다시 유혹의 물결이 밀려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길로 2달러 50센트하는 우유 뷔페에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마음껏 마셨습니다. 정말 양껏 충만하게 먹었습니다. 건드리면 실수할 만큼 많이 마셨습니다. 그랬더니 술 생각이 싹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법은 채우는 것입니다.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럼! 언제까지 채어야 합니까? 우리들은 한번만 충만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계속 충만해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콜라병의 충만과 드럼통의 충만은 다릅니다. 드럼통의 충만과 바닷물의 충만은 다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각 단계별로 충만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흘러넘치고 깨집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성장인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에는 성전에서 흘러넘치는 물의 환상이 나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나옵니다. 그 물이 발목을 차고, 무릎에 차고, 허리에 차더니 나중에는 헤엄칠 정도로 많은 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충만의 단계가 올라가서 넓어지고 깊어지면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큰 사람이 되십시요. 흘러넘치는 기도, 충만한 기도를 하십시요.

부흥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는데 막막하고 어렵고 힘들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꼭! 필요한 기도가 합심기도입니다.
첫째, 합심기도는 마귀를 정복하고 성령의 능력을 행사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18:18절을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합니다. 땅에서 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귀를 예수의 이름으로 묶는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리의 원수는 혈과 육이 아닌 공중의 권세와 정사들, 곧 마귀와 그 휘하 세력입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는 모두 이 마귀의 문제입니다. 시험과 고통의 배후에는 마귀의 세력이 있습니다.
이 마귀의 세력을 구체적으로 묶어놓고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도의 능력입니다. 고후4:4을 보면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묶는 일뿐만 아니라 푸는 일도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의 포로된 세력을 풀 수 있습니다. 마귀를 묶었으면 성령으로 풀어야 비로소 자유케 됩니다. 믿음과 순종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복과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합심기도는 주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합심하다’는 헬라어로 ‘숨포네오’, 즉 ‘동의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음악으로 화음을 맞추는 상태를 뜻하며 교향악단을 가리키는 ‘심포니’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음악적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가 갖자 자기 위치를 지킬 때,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룹니다. 마찬가지로 뜨거운 기도는 성령으로 하나 되게 만듭니다. 기도로 하나가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로 하나되는 저희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합심기도는 전체적인 목표를 갖게 합니다.
기도할 때는 공통의 목표가 생깁니다. 같은 기도제목을 놓고 같이 기도하는 것이 바로 하나의 목표점을 보고 달려나가게 해 주는 것입니다. 비전이 하나로 일치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과 입술로 고백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생각을 정리해 주고 꿈을 강화시킵니다.
막 11:24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넷째, 합심기도는 기도의 응답을 보장합니다.
마 18:19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합심기도를 가장 잘 들어주십니다. 개인기도는 잘못된 기도가 될 수 있지만 합심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관심과 주님의 관심을 놓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가 성을 포위한 상황에서 기도하고 그 기도는 이스라엘 전체의 기도가 되어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적들을 물리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히스기야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곧 죽을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생명을 건져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15년을 연장시켜 주시고 응답의 표증으로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가 십도 물러나게 하십니다.
성을 포위한 앗수르를 물리치기 위한 기도가 합심기도라면 히스기야의 병 회복의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입니다.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올 때 분석하지 마십시요.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어려움이 올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건가?’ 우리는 자꾸 분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같이 이사야서 38:9-20절을 말씀을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스기야의 개인적인 기도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히스기야의 기도는 구체적인 기도입니다.
“주여 사람의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 있사오니 원컨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주옵소서”(사 38:16)
기도는 구체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기도는 막연한 응답을 얻고 구체적인 기도는 구체적인 응답을 얻습니다.

둘째, 히스기야의 기도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사 38:14)
그는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고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간절히’라는 단어는 ‘온 힘을 다하여’, ‘긴장하고’,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정도의 간절함을 가지고 기도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는 격렬한 기도였습니다. 이것이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여러 선택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오직 “이것밖에 없습니다”라는 자세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이제 마지막으로 요일 5:14-15절을 같이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