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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의 외치는 자 (막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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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목사님이 시골에서 교회를 섬기면서 동네 분 중 한 사람에게 아무리 전도해도 안 믿더랍니다. 한번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예수 믿으면 비용이 들기 때문에 비용이 아까워서 교회를 안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분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예수 믿으려고 하면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웃으면서 "담배 값 정도 듭니다" 그랬더니 "생각보다 비용이 얼마 안 드네요" 하면서 예수 믿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담배를 끊고 담배 값을 주일마다 헌금하더랍니다. 후에 세례 받으라 했더니 세례를 안 받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세례 받으면 십일조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예수 믿는 비용이 갑자기 비싸져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찾아오더니 묻더랍니다. "목사님, 십일조를 하는데 농사 비용을 빼고 십일조를 합니까? 아니면 무조건 수확의 십일조를 합니까?" "믿음대로 하는 겁니다"라고 답하시자 그 분은 말합니다. "농사 비용 빼고 나면 얼마 안 남는데요." 그러더니 쌀 한 가마니를 십일조하고 그 다음에 세례를 받더랍니다. 그 다음 해에는 농사지은 십일조로 쌀 일곱 가마를 가지고 왔더랍니다. "아니 왜 이렇게 많이 가지고 왔습니까?" "목사님,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 싸구려로 예수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비싸게 믿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는 모습이 어떠하십니까? 싸구려로 믿으십니까? 아니면 비싸게 예수를 믿으십니까? 여러분에게 성경에 나타난 예수를 비싸게 믿었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 라고 자신을 표현합니다. 그는 자신은 나타나는 인격 이전에 비 인격체인 소리에 불과하다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살았던 세례요한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광야의 외치는 자인 세례요한처럼 살아야 합니다.

첫째 주의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신문에 훈훈한 미담이 있었습니다. 서울대 의대에 어떤 부부가 88억이 넘는 재산을 기부했다는 소식입니다. 폐암과 위암을 조기 진단해서 치료할 수 있는 연구기금으로 써달라고 많은 재산을 기증한 것입니다. 부부는 둘 다 암에 걸렸지만 치료를 잘 받아서 완치가 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조기 진단에 따른 완치의 기쁨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기쁨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서울의대 역사상 외부로부터 받은 최고액의 기부금을 희사했던 것입니다. 특히 감동을 주는 것은 기부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싶다는 학교측의 요청에 두 사람이 극구 손을 내저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성경의 말씀대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주님이 오시는 길을 닦고 예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기심과 질투, 탐욕으로 인해 굽어지고 골이 패인 마음들을 곧게 하고 평탄케 해서 예수께서 기쁨으로 오실 수 있도록 예비하는 사람들입니다.

2절 말씀에 "그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3절은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고 반복해서 나옵니다. 여기서 길이란 마음의 길을 의미합니다. 고대에는 왕이 어느 지역으로 행차할 경우 선구자가 먼저 가서 왕이 탄 마차가 지나가기 쉽도록 주변의 사람들을 모아 길을 고쳐 평탄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불신의 골짜기가 메워져야 합니다. 무관심의 골짜기가 메워야 합니다. 서로 용서하며 서로 화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편견,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버릴 때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시기하는 마음, 비판적인 마음, 지나친 탐심과 욕심, 거짓이나 속임수를 가지고는 절대로 주님을 영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이 돋보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의 오심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소망을 가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인생을 예수님으로 인하여 정리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치유와 소생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길을 예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광야에 나가기는 하나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마음이 되지 않습니다.
나의 골짜기가 메워짐이 없이, 높은 산이 낮아짐이 없이, 굽은 것이 곧아지지 않고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심지어 변화되지 못하고 상황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 하시면 모든 상황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자기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제국 박물관이 있습니다. 전시된 작품가운데 유명한 그림이 한 장 있습니다. 로마의 데오도시우스 황제와 밀라노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가 논쟁을 벌이는 모습의 그림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데살로니가의 반란이 일어나자 무고한 양민 1,500명을 학살합니다. 로마교회는 황제를 죄인으로 정죄 했습니다. 그런데 정죄 받은 황제가 교회에 들어가려 하자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회개하지 않고는 들어올 수 없다며 막아섭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성경에 보면 다윗도 죄인이었는데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느냐, 나도 들어가겠노라" 하자 암브로시우스가 말합니다. "당신이 다윗의 죄를 모방하겠다고 하면, 다윗의 회개도 모방하여 다윗처럼 회개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교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본문 4절 이하에 보니 회개하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듣고 당시의 사람들이 요단 강에 나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15절을 보면 예수께서도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 하신 말씀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이 시대의 죄인들을 향해서 회개를 선포하여야 합니다. 만약 회개의 복음을 외치지 않으면 죽은 교회요 죽은 기독교입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회개하라는 설교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 하고 회개하라는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우리의 모습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죽기까지 외쳤던 메시지나, 예수님의 메시지가 회개하라는 말씀이었던 것을 필히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회개하고 자복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직분을 가졌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근본적인 회개를 하지 않고 강퍅한 심령으로 가증스러운 종교적 의식만 반복하고 있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회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이 지은 죄에 대해서 어떤 죄들을 회개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으니 한 어린이가 손을 듭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의 죄는 발견하지 못하겠어요. 그런데 누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확실히 알겠어요". 이 어린이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나의 죄는 안보이고 다른 사람의 죄만 크게 보이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대개 열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열심만큼이나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자신이야말로 '조잡한 욕심꾸러기' 이며 '세련된 이기주의자' 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헐뜯는 데에 너무나 능숙한 자들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마음 아파하며 죄를 자복하는 자들이 복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사명의 깨달음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이런 깨달음이 있을 때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죄와 허물을 솔직하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자신의 업적과 공로를 허물어버리고 자복하며 하나님을 향해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주님 앞에 낮아져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에 코리덴 붐 여사가 있었습니다. 유럽을 돌면서 엄청난 부흥운동을 전개하신 분입니다.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가는 도시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녀의 메시지와 간증이 끝나면 사람들은 끝없는 박수 갈채를 보내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기뻐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이를 궁금히 여긴 기자가 묻습니다. "코리 여사님! 기쁘지 않습니까?" 이때 그녀는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나귀가 착각하면 쓰겠습니까?".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사람들이 호산나하며 환호를 질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향한 갈채요,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환영입니다. 그런데 나귀가 그것을 자기에게 보내는 박수와 환호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귀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높여야 내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7절에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고 고백합니다. 자신을 주님 앞에 굽혀 그의 신발 끈도 풀지 못하는 존재라며 스스로를 낮춥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은 더 감동적인 고백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자신의 분수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신의 위치를 망각함으로써 공동체에 혼란을 초래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당시 세례요한은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메시야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결코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신발 끈을 푸는 것은 노예의 직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주님의 신들메를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라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우리가 영광된 자리에서 물러날 때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광야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를 가지고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실 마음을 준비합시다. 회개합시다. 자신을 낮추며 서야 할 자리, 있어야 할 자리를 정확하게 알고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바르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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