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마리아인의 사랑법 (암 5:4~8, 요일 4:7~12, 눅 10:25~37)

  • 잡초 잡초
  • 308
  • 0

첨부 1


오늘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우선 서울에서 지방에 갈 때 내려간다고 하듯, 수도 예루살렘에서 지방 여리고로 가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지형 면에서 보면, 예루살렘은 해발 760m정도 되는 상당히 높은 도시이며 여리고는 해발 258m의 상당히 낮은 동네입니다. 그러므로 지형적인 면에서 내려간다고 표현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은 교통이 발달되어서 서울에서 30km정도는 멀지 않습니다만 옛날의 30km는 굉장히 먼 거리였습니다. 여러분이 옛날에 산길을 따라서 다른 동네에 갈 때를 떠올려보시면 충분히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언덕도 넘고 산도 넘고 구렁도 넘어야 하는 힘든 길이었습니다. 산이 워낙 험해서 강도 만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이야기도, 이러한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내려가던 제사장은 이렇게 강도만난 사람을 못 본 척 하고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을 도와서 성전 예배를 드리던 레위 사람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이 발견하고는 싸매주고, 업어서 여관까지 데려다주고, 돈 까지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1년에 한 번씩이라도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제사장이었고, 제사장을 도와주는 보조원으로는 레위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사람 등 성전 예배에 고용된 사람의 수는 전국적으로 18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이 사람들은 성전에서 멀리 살 수 없어서 여리고를 중심으로 하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들은 24개조로 나누어서 1년에 한 번씩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성전 예배를 드리고, 그 곳에서 오는 헌금으로 1년 동안 먹을 것을 받아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강도만난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갔다고 하는 것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은 예루살렘을 통과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마리아를 점령한 앗수르는 사마리아의 혼을 어지럽히기 위해서 혼혈이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을 데려다가 사마리아 사람들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혼혈을 하면 민족주의가 약해지고 문화, 사상, 종교, 이방 신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의 혼은 희석됩니다. 그리하여 유대 백성들은 순수한 피, 문화, 신앙을 배반했다고 하여 사마리아를 싫어하게 됩니다.

물론 사마리아 사람의 잘못이 아닙니다. 단지 강요당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는 더러운 땅이 되었고, 사마리아인은 예루살렘을 통과할 수 없는 변방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온 사마리아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온 것을 보면 굉장히 특권을 가진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강도를 만난 사람은 유대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조차 더럽다고 부르기 싫어하는 유대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이러한 유대 사람을 가까이 하고 싶었겠습니까. 양반이 천민을 싫어하면 천민도 양반을 싫어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유대인이 어떻게 해야 영성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질문했더니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율법에 뭐라고 써 있는가. 유대인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대로 하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해라.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하고 이웃 사랑을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영성을 얻는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매 주일마다 설교하고 기도하던 대제사장과 레위인은 왜 강도만난 사람을 비켜가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아예 모르던 사마리아 사람은 왜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까. 오늘 여기서 문제가 제기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세상에 있는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럼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과 율법에 적힌 계명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천지창조 때부터 앞으로 있을 세상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 하늘과 땅 사이가 연결이 되지 않고 끊어지게 되면, 두 개의 사랑은 별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문제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별개가 된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율법이 만들어졌을 때, 모세가 받은 율법 중에는 이러한 규율이 있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 여기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인 기준은, 과부. 고아, 이방인, 나그네이다. 이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과 이웃을 사랑하는 봉사가 전혀 별개의 것이었기 때문에, 하늘과 땅이 별개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두 개를 연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스스로 내려오시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하늘이 땅의 옷을 입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성탄의 시작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이 가장 낮고 천한 곳에 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구약시대의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유대인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제사장, 레위사람, 사마리아 사람 중에 누가 가장 영생을 얻는 방법에 접근한 것 같은가? 유대사람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처음의 질문에서는 세 사람의 신분이 분명했습니다. 제사장, 레위사람, 사마리아 사람. 그러므로 직설적으로 대답했다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답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사람은 “자비를 행한 사람”이라고 간접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고상하게 답변을 하려던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의 “사” 자도 언급하지 않으려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유대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었다고 자부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도 잘 지켰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켜도, 이성적으로 내 이웃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자들에게는 사랑의 끈을 끊어버렸습니다. 이웃이 나에게 맞지 않으면 이웃을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의 끈이 끊어졌습니다. 너무 높이 계신 하나님과, 너무 낮은 사람 사이가 멀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우리의 삶은 변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오셔셔 함께 고통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육신의 고통은 인간들만이 겪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도 함께 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소외를 당할 때면 하나님도 함께 소외를 당하십니다.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가장 낮은 곳에도 함께 계십니다.

구약의 사랑은 공의라는 이름으로 끊고 처벌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뒤를 이어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죄악을 처벌하시지만, 처벌하신 다음에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부어 주십니다. 예수님처럼 내 이웃이 누구인지 묻지 않고 무조건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살리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지 마시고 이웃을 직접 만나러 가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이 그곳에 임하십니다.

제가 책에서 존경하는 주기철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해방되기 전에 평양에 있는 산정연 교회에서 목사님으로 계셨다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서 일본 헌병에 끌려가셨습니다. 그리고 4년 동안 고문당하시다가, 해방되기 전인 1944년 4월 20일에 옥사하셨습니다. 이 분이 돌아가시기 전, 1940년 2월에 하셨던 아주 유명한 설교가 있습니다. 그 설교의 제목은 “다섯 가지 기도”입니다.

다섯 가지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죽음의 세력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둘째, 오랜 고난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셋째, 저의 80세 노모와 처자식을 주님께 맡깁니다. 넷째, 하나님, 제가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해 주십시오. 네 번째는 신사참배를 앞두고 한 기도입니다. 그 내용을 일부분 인용해 보겠습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신사에 절을 올릴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려 합니다. 평양이여, 평양이여, 동방 예의의 나라 예루살렘이여. 대동강이여, 대동강이여, 백년 천년 흐르며 나와 함께 울지 않겠소. 바칩니다, 바칩니다, 이 작은 목숨 주님께 바칩니다. 나의 사랑하는 조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하나님의 의에 살고 하나님의 의에 죽읍시다. 하나님, 하늘의 의가 이 땅에 임하여 이 땅에서 일본에 의해 죽지 않을 민족을 만들어 주십시오. 제가 기꺼이 희생물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기도입니다. 제 영혼을 주님께 맡깁니다. 제가 십자가 붙들고 쓰러질 때에 제 영혼을 받아 주세요. 옥중에서 사형장에서, 제 목숨이 끊어질 때 제 영혼을 받아 주세요.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저의 고향입니다. 더러운 땅을 밟던 제 발을 씻겨주셔서 천국의 꽃밭을 걷게 해 주세요. 죄악에 찬 세상에서 고통받던 저를 깨끗하게 씻어주셔서 영광 앞에 세워주세요. 제 영혼을 맡깁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늘과 땅이 연결되게 해 주세요. 하늘나라와 이 땅이 죽음으로 인해 끊어지지 않고, 영원한 사랑의 생명으로 연결되도록 만들어 주세요.

생명이 끊어질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은, 끊은 것도 다시 잇습니다. 파괴된 것도 다시 만듭니다. 심판을 받은 사람도 회개시켜서 다시 세워줍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치유를 주십니다. 찢어지는 가난 가운데 오셔서 풍부함을, 소외된 자에게 오셔서 위로를 주십니다. 여러분도 그 사랑을 전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제는 누가 내 이웃인지를 묻지 마시고, 우리를 연결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냥 사랑하십시오. 손으로, 발로, 눈으로, 그냥 돌보며 위로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의 의와, 땅의 의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를 연결한 사랑으로 산다. 사랑이 있어야 진정한 의가 살아납니다. 사랑은 다시 살리는 존재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의 일도, 장래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랑은 끊어진 것을 다시 잇고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주는, 죽음과 영생을 연결시켜주는 끈입니다. 오늘 이웃과 하나 되는 이러한 사랑이 여러분에게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