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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날 같은 하루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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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을 축하하며 감사하는 절기이자, 이제 최후의 그 날이 되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인 대림절 한 복판을 지나고 있다. 이 대림절은 교회력이 다시 시작되는 절기이기도 하다. 그런대 우리가 지키는 교회력의 시작이 종말을 기다리는 절기인 대림절과 함께 시작한다는 것은 교회의 시간 개념이 철저하게 종말론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최후의 그 날, 즉 종말을 의식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종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주적 종말이요, 또 하나는 우리 각자 개인의 종말이다. 우주적 종말이란 만물의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최후의 그 날에 대해서 성경 말씀은 300회 이상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의 순간 맞이하게 될 이 우주적인 종말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반드시 다가올 순간이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 하루가 그 마지막 최후의 순간을 향해서 한발자국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 당하게 될지 모르는 개인적 종말을 향해서도 매일 매순간 달려가고 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이 개인적 종말 앞에 놓여 있다. 이 개인적 종말은 순서가 없고, 남녀노소도 가리지 않는다. 어느 순간 홀연히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공격한다. 그 때 우리는 개인적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II. 몸 말

1.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
  유명한 애플 컴퓨터의 CEO인 스트티브 잡스(Steve Jobs)라는 사람이 있다. 그가 지난 6월 12일에 미국 서부의 명문대학인 스탠포드대 졸업식에서 이런 연설을 하였다. 그는 17세 때 한 경구를 읽고서는 그것이 그의 생의 큰 전환점을 이루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경구는 이런 것이었다.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If you live each day as it was your last, someday you will most certainly be right.)
그는 이 글에 감동을 받고, 그 후 50살이 되기까지 33년 동안을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는 일을 할 것인가?”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그리고 그는 이 질문에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렇다. 크게는 다가오는 우주적인 종말의 그 날과 좁게는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을 순간 순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다. 더군다나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날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다가오는 그 날은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다가오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오늘이라는 삶의 순간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에 대해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열심히 사랑하라. 은사를 받은 청지기답게 서로 봉사하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다가오는 그 날을 우리가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해 주신다. 

2. 기도하는 삶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가오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을 앞에 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마지막 때가 되면 이 세상은 엄청 혼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 날이 가까워 올수록 난리에 난리의 소문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고,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는 말세가 되면 교회의 내부에서도 많은 문제들이 일어날 것임을 말씀하셨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 24:11). 그리고 교회 안에 불법이 성해진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주님께서는 말세가 되면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도 말씀하셨다(마태 24:12). 그러므로 이렇게 종말이 다가오면 세상은 더욱 혼란해 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하고, 우왕좌왕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라는 “소프로네사테”는 “분별력을 가져라” 혹은 “마음을 잘 추스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근신하여”는 “침착하다” “냉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넵사테”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라는 말은 “무엇이 중요한 가,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가를 분별할 수 있는 침착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영어성경은 여기 “정신을 차리고”를 “keep cool under any pressure”라고 번역을 했다. 즉 어떤 압력 하에서도 냉정하라, 어떤 상황에서도 분별력을 잃지 말고 정신을 차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위기의 순간에, 큰 환란이 닥쳐오는 순간에도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 비결은 바로 기도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이 정말 내가 해야 할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사실 어떤 위기에 처할 때, 그리고 너무나도 과중한 짐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복잡한 일들 때문에 바쁠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아니 무엇부터 해결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우리는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된다. 기도할 때 우리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우선순위를 깨닫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지막 때에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기도해야 한다. 주님 만날 날이 다가올수록 우리는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주님 앞에서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결산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우리는 세월을 아껴야 한다. 그런데 세월을 아끼려면 우리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덜 중요한 것들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게 된다. 생각해 보십시오, 임종이라는 절박한 사건 앞에서는 모든 것의 우선순위가 바뀔 수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 주님과의 결산이 곧 있을 것임을 알고 있는 정말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이 정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나는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그 날을 어떻게 맞이할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들의 대답이 기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이다.   

3. 사랑하는 삶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가오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무엇보다 더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종말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뜨거운 서로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8-9절을 보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라”
앞서 소개하였듯이 주님께서는 말세에는 불법이 성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요즘 날로 악해져 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여기서 “열심히”라고 번역된 “엑테네”라는 말은 “뜨거운” “열렬한”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 단어는 원해 달리는 말이 근육과 힘줄을 최대한으로 뻗어서 힘껏 달리는 모습을 말한다. 그러니까 말세를 당하여 우리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사랑을 최우선으로 행해야 하고, 말로만이 아니라 뜨겁고 열렬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열심을 다해 사랑을 하는 것인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1) 허물을 덮어주는 삶
먼저는 서로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즉 우리는 서로 서로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줌으로 진정한 사랑을 이룩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준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언 10:12)
그러므로 사랑의 첫 단계는 바로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다 모자라고 늘 실수를 하면서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들이 아닌가?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여러분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 때 주님께서 오시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떤 삶을 주님께 보이고 싶은가?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허물을 마구 들추어내어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는 모습을 주님께서 보신다면 기뻐하실까? 여러분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무엇을 하다가 그를 맞이하고 싶은가?   

(2) 기쁨으로 대접하는 삶
그 다음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정 사랑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서로 기쁨으로 대접할 것을 말씀하신다. 사랑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 대접하는 가운데 드러난다. 여기 본문에서 “대접하라”는 단어는 “필록세노스”인데, 이 말은 “사랑하는”이라는 의미의 “필로스”와 “나그네”를 의미하는 “크세노스”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나그네에게 사랑을 베푸는”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려면 초대교회의 상황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박해받는 상황에 있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면서 이리 저리 쫓겨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고, 교인들은 서로 서로 그런 나그네들을 숨겨주고 대접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신분이 탄로가 나서 도망을 다니고 있는 교인들을 대접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런 사람들을 숨겨주다 들키면 자신도 신분이 드러나 위태롭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숨겨주며, 대접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했다. 사실 자신들도 힘든 상황에서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거나 대접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원망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힘든 가운데서도 “원망없이 형제를 대접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고,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행위였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그 사랑의 대접을 반드시 인정해 주시고 상급을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가오는 그 날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너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대접했느냐?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나를 돌아보았느냐? 내가 목마를 때에 내게 물 한잔 준 적이 있느냐?”
그리고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을 곧 그에게 한 것으로 인정해 주실 것이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 동안 주님께서 다시 오시길 원하는가? 형제를 향하여 미워하고 저주하고 비난의 말을 쏟아 붙고 있을 때 그 분이 오시길 원하는가? 아니면 상처받아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자를 대접하고 돌보며 사랑하는 가운데 그 분이 오시길 원하는가? 오늘 여러분 주변에 누가 있는가? 상처받고, 방황하며, 헤매는 자가 보이는가? 삶의 시련으로 인하여 눈물짓고 있는 이가 보이는가? 다가오는 그 날이 임하기 전에, 아니 이 해가 다가기 전에 그런 나그네 된 사람들을 집으로 초청하라.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고 대접해 보라.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들은 천국을 맛보게 될 것이고,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4. 선한 청지기로 봉사하는 삶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가오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 봉사하라고 말씀하신다. 10절을 보라.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성한 청지기로 섬기고 봉사하는 삶에 대해서는 본문 11절에 보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청지기 정신으로 말읗 하든지 행동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섬기고 헌신을 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는 그 날에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가 가진 재물과 부동산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날이 오면 우리는 모두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진정 다가올 그 날에 대한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러한 모든 것을 가치 있는 일에 쓰려고 할 것이다. 진정 종말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의 가진 모든 재능과 은사를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고, 우리의 재물도 선하게 사용하고자 할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때가 가까운 것을 아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고 말씀한다. 그렇다. 우리는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으면 좋을까?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고 있는 그 순간에 주께서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임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주님의 섬김의 본을 받아, 우리의 팔을 걷어 부치고 봉사의 띠를 띠고 수건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있는 순간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아까 설교 초두에 소개한 스티브 잡스의 연설 중 일부를 다시 소개한다. 그는 그 졸업연설에서 자신의 암에 걸렸던 순간을 이렇게 소개한다.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지요.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 동안 해줄 수 있는 것을 단 몇 달 안에 다 해치워야 된다는 말이었고,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하루 종일 받았습니다. 저는 마취 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할 결과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 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고 싶어가지는 않습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시오...”   

III. 나가는 말 

그렇다. 우리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다. 비록 우리가 사는 동안에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즉 인류의 종말의 순간이 다가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개인적으로 언제든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이 다가올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그 마지막 순간이 가까이 오고 있다면,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늘을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결산의 마음으로 “하나님, 제가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기도하며, 주께서 사랑하신 사람들을 나도 열심히 사랑하며, 주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봉사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바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그런 삶이야말로 우리 주님께서 인정해주시는 가장 복된 삶이고 가장 복된 순간이다. 우리가 날마다 그 날 같은 하루를 살다가 우리 개인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거나, 혹은 날마다 그 날 같은 하루를 살고 있는데 우리 주님이 오신다면 그 얼마나 복된 순간이겠는가?
여기 “그날 같은 하루를 날마다 살고 싶다”는 한 시인 목사님의 기도가 있다. 
그 날 같은 하루를 날마다 살고 싶다(고훈 목사)
죽은 줄 알고 20년 가슴에 묻은 아들, 총리되어 나타날 때,
이제 나는 죽어도 가하도다, 감격하고 하루 종일 울었던,
야곱과 요셉의 그날 같은 하루.
말씀이 있어, 외아들 바치러 모리아산 올라, 아들 가슴에 꽂는 순간,
아브라함아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한 줄 알았다 하시며,
칼 빼앗으시고 야훼이레 복 내리신, 아브라함과 이삭의 그날 같은 하루.
세상으로 나가, 타락하여 허랑방탕하다, 거지꼴로 아버지 집에 돌아와,
아들로 받지 말고 품꾼으로 받아 달라고, 눈물로 회개하여,
잃어버린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버지에게 다시 받은,
탕자의 그날 같은 하루.
믿는 자 핍박하러 갔던 다메섹에서, 주님만나 거꾸러져,
육의 눈멀고 영의 눈 떠, 세상 모든 것 배설물로 여기고,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의 그날 같은 하루.
실패한 사업장에 찾아오신, 주님 영접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졌다, 만선의 기적보고 회개하며,
모든 것 버려두고 주님 따랐다 대사도가 된,
갈릴리 베드로의 그날 같은 하루.
죽어 썩어 장사된 지 나흘 된 무덤에, 주님 찾아와 “나사로야 일어나라”
하시매, 시체가 살아나 온 세상 다니며 많은 사람을, 주님께 돌아오게 했던,
다시 산 나사로의 그날 같은 하루.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는 말씀으로, 생명 건지시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으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창녀 같은 여자 성녀로 변화시킨, 그 날 하루를 날마다 살고 싶다.

우리는 오늘 어떤 하루를 살고 싶은가?
우리는 오늘 어떤 하루를 살다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려는가?
(주승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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