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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도리 (눅 15: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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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도리
누가복음 15:3-32

오늘 또 지난 주일 오후에 계속해서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세가지의 비유 중에 오늘은 제 둘째 번것 은전을 잃어버린 비유올시다. 이미 서론에서 우리에게 꼭 지난번 양을 잃어 버린 비유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은 이 비유에 세가지 다 각각의 세가지의 장면, 위치라는게 있는데 혹은 영어로 말하면 stage 라는 게 있는데 그 첫째는 원래 정상위에 있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것이 상실되었다는 사실이고 세째는 다시 복귀한다는 것이올시다. 정상위에서 상실했다가 다시 정상위로 복구하는데 그게 정상이라는 것을 생각할때 그 잃어버렸다는것 양 혹은 은전, 아들 그것들이 정상위에서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할때는 그 잃어버린것을 찾는 주인격이 주격이 거기있어요.

양은 목자가 찬고 은전은 소유주였던 여인이 찾고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떠났다는 훨씬 그 심오한 신령적 문제가 제일 중요한 의미로 씌어있는 까닭에 아버지가 찾는다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찾으시는 것이요. 잃어버린 사람이니까 잃어버린 사람을 정상위로 복구하시는 것이고 그러면 그 주인 되는 찾으시는 그 분과 그 잃어버림을 당한 스스로 상실이 되었던 것과의 관계가 다 세가지가 있어요. 양과 목자의 관계, 은전과 주인과의 관계, 잃어버린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런데 양과 목자와의 관계의 현실성은 목자는 양을 사육하고 인도하고 보호해 주고 그래서 양이 충분히 존재한 구실을 하도록 하는데 있어요. 도 은전은 여인이 소유와 소유된 물건과의 관계에 있어서 단순히 법적 소유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쓰일때 쓰일수 있는 위치에 늘 있어야 한다는 것이올시다. 그런데 그 쓰일수 있는 위치에서 떠났을 때는 상실한 방편인 거예요. 그런고로 무생물인 은전고 그 주인인 여인과의 관계는 심정의 무슨 독특한 서로 주고 받는 애정이라든지 이런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점에 있어서는 양과 목자도 반드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여인 측으로 볼때는 은전에 대한 애착은 있어요.

그러니까 순전히 이 경우의 관계에 고귀한 도덕적인 양상은 여인이 그 은전을 잃어버린것 때문에 아쉬워하고 그런고로 열심으로 찾고 찾아서 마침내 찾으니까 잃어버렸다 찾았다는 그 기쁨, 그것을 자기만 갖지 않고 이웃을 불러서 같이 이웃에게 이야기하면서 기쁨을 나눴어요. 그런 관계가 있고 마지막에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정상한 이치가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집이요. 아버지가 여기서는 항상 주인격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이 상실했다는 것이 중요한 비유의 가르침이올시다. 그래서 정상위로 돌아가려니까 자연히 아버지의 봏와 인도와 지지 가운데로 다시 돌아가는것이올시다. 이제 이와 같은 상태를 우리가 주의를 해야 하는데 은전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 은전은 돈이니까 마치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아닙니까?’하니까 ‘돈을 그럼 나한테 갖다 보이라’고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신 대로 돈을 보이시고 ‘이 화상과 여기 명각된 이 그림은 뉘것이냐? ’ 하니까 ‘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그러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돌리라 하신 이 말씀, 여러분 기억하실거요.거기에 화상과 글을 보시고 가이사의 것이라..... 드라크마는 그때 로마에서 쓰던 데나리온과 같이 비슷합니다. 드라크마가조금 비싼편이예요. 한 데나리온은 그때 사람들 장정 한사람의 하루 노임이었어요. 그런걸고 봐서 그것을 암만 다른걸로 표기를 해봐도 어른이 하루 일해서 벌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비슷할 거요. 드라크마는 조금 강세예요. 그런데 그걸 열닢을 가지고 그것을 보면서 즐겼다 말씀이요. 즐긴 종류가 무엇이었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니고 어떤 사람들은 억지로 해석하는 식으로 마치 이건 장식품이다. 돈을 가지고 목에다가 주렁주렁 매달아서 장식을 쓰인 것인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으니까 그게 하나가 이빨이 빠진 것같이 빠져서 그거 없으면 안되겠다. 전체가 다 소용없다고. 뭐 이렇게 하는것은 누가 교묘하게 그런 소리를 하느데 뭐 그렇게 신빙할 만한 그런 증거도 없고 도 그때 풍속으로도 그렇게 억지로 붙여서 해석할 만한 것이 없어요.

혹시 아프리카 토인들이 돈 같은 둥굴둥굴한 그것을 목에다가 장식을 하고 다니고 있으니까 그런것을 보고서 그런 교묘한 생각을 한 지 모르지만 어떤 외국사람이 세계에 교회의 운동을 하러 돌아다니다가 서독에서 왔겠지요. 서울에 와서 시내 어떤 큰 교회에서 설교하는 소리를 라디오로 이 사람이 들을때 그런소리를 하더라구요. 그런걸 우리가 중시할순 없어요. 그런데 그 장식품 목걸이로 썼다는 것을 중시할건 없고 여인이 그 열닙을 가지고 있으면은 사람들이 어떤 일정한 돈을 자기가 모아 가지고 그걸 갖고 있을때 가지는 어떤 야릇한 일종의 안도감도 있고 애착도 있고 또한 기쁨도 있고 그런거요. 그걸 꼭 언제든지 그걸 애용물로 자기 보물같이 간직한다는 것 보다 필요에 따라서는 그걸 쓸수도 있고 그런거요. 그러니까 문제는 그 여인에게는 그것이 사랑스러운것  귀한 것이요. 그런데 그중에 하나를 잃었어요.찾다 못찾으면 뭐 할수 없지. 단념하든지했겠지만 적어도 이것을 밖에 가지고 돌아다닌 일도 없고 그 방안에서 때때로 꺼내보고서는 자기가 흐믓해 하고 좋아하고 또 무슨 어려운 일이 있다든지 할것 같으면 곧 내게 열드라크마가 있으니까 그러면 충당이 되겠지 하고 재빨리 혼자 생각도 하고 이런건 충분히 되겠지 하고 재빨리 혼자 생각도 하고 이런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요. 그랬든 것인데 그것이 그만 하나를 잃어 버려서 열드라크마까진 없이 아홉개쯤 있는데 이 아홉을 갖고 어떻게 해봐야지 하는 이런 생각도 하게 되고 이렇게 해서 하나 잃어 버렸다는 것이 좌우간 어디로 까닭없이 없어졌다는 것이 자기에게 그냥 견딜수가 없는 까닭에 이건 기어코 찾아야지 지가 갔으면 어디가. 방구석에서 있겠지.그러면 필시 이것은 그 방안에 있는 무슨 가구가 있다면 장농같은 것이 있었다면 그 아래에 어둡고 먼지 앉아있는 곳으로 굴러서 들어갔을 거란 말이요.그러한 까닭에 그 어두운 방안을 밝히 비추려고 등불을 켜서들고 가구들을 옮겨 놓고 방을 쓸면서 그걸 찾으니까 먼지속에 방구석어디 가구밑에 저 사람 손에 잘 안 닿는 대로 혼자 굴러간 그 놈이 거기 놓여 있는 것을 쓸어서 찾았다 말이요.  은전의 액면도 있고 무슨 그림이 있다든지 그림도 있고 그림이라면 여러 종류의 그림, 그때 가이사의 그림있는 그드라크마는 원래 헬라에서부터 전해온 것이 까닭에 가이사의 그림을 그렸는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그림을 그렸는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그림을 그렸는지 알수 없지만은 그런것들이 요컨데 통화로서 그때 시세로는 자기 가치를늘 지니고 이쓴ㄴ거요. 그런데 그것이 방 구석에 가 있는 동안에 그 액면이 없어진 것도 아니구 거기 반짝 반짝 빛나는 동안에 그 액면이 없어진 것도 아니구 거기 반짝 반짝 빛나는 어떤 화상이나 그림이 어디로 간것도 아니고 씌어있는 글들도 어디로 간것도 아니구 법률에의해서 그것이 쓰일수 있는 통화의 가치가 어디로 없어진 것도 아니오 아무 변동이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갖고 있는 무슨 사회적인 지자란ㄴ것도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은 그것 자체가 쓰일수 있는자리, 정상한 위치에있지 아니하고 오직 구석으로 들어간 까닭에 자리르 옮겨놓고 그 옮겨논 자리는 그걸 쓸 여인이 자유롭게 손대서 갖을수 있는 자리고 알리지도 못하고 그런 자리에 있는 까닭에 이것이 잃어버렸다는 간단한 사실 하나가 그 모든 액면과 그림 혹은 갖고 있는 사회적인 가치를 넘어서서 무용지물이 되게 했다는 데가 이 드라크마 교훈의 큰 것이있어요.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서 그 현상이 완전히 없어진것도 아니고 또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모든 가치가 일푼은 상실된 것이 없을 지라도 그 있는 위치가 정상위가 아니고 그걸 쓸려고 하는 주인의 손엣 벗어나서 주인도 모를자리에 그냥 묵혀있으면 완전히 낭비요. 부패하고 마는거요. 이와같이 그 가치의 상실이라는 것이 어데서 일어나는 것인가를 깨우치기 위해서 이 비유에서 우리에게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하신거요. 어디서 가치를 상실하는건가? 자체가 가진것 액면의 가치를 상실하는건가? 아니면 자체에 아무 변동이 없는데 왜 가치는 온전히 상실해서 의미가 없는가? 그 한가지요! 정상한 위치에서 벗어나서 주인이 그것을 관계하에서만 쓴다면 거룩한 약속, 언약하에 있는 그 사실에서는 벗어나서 약속의 거룩한 은혜가 미치지 않는 자리에 있을 때에 그것은 소용없는 것이요. 완전히 폐물에 불과한 거요. 다 그 형상을 지니고 다 그 명예를 지니고다 그모양을 지니고 하나도 다른건 손실이없는 거요. 온전히 가치는 일푼도 없는 것이란 말이요. 다른 건 다 구비했다고 거기 일푼도 가치가 없는 것이요. 이것이 중대한 것이다. 라고 우리 주님은 그걸 가르치는거요. 우리 개개인도 개개인이 마땅히 있어야 할 정상한 위치는 그게 어떤 자린가? 누구와 무슨 관계 가운데 있는 자리인가? 를 생각하라. 하는 것이요. 우리가 개개인이 각각 궁극적으로 어떤 개인이 최종적으로 체험적 관계를 가지고 서 있는 자리는 아무리 부인을 해도 부인할수 없는 자리는 창조주요 대 주재가 되신 하나님이시요.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자될것 같으면 구주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계획과 경륜가운데 있다는 사실, 내게 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안 믿는 사람은 제 길을 자기가 계획하지만 믿는 사람은 자기 계획대로 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디에 쓰시려고 하나님이 그걸 갖고 기뻐하실려고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말이요.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한 드라크마지만 여인은 그걸 기뻐했단 말이요. 찾았으니까. 그걸 기뻐한 걸 보면 굉장히 거기에 대한 기쁨을 갖고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요. 이와같이 하나님도 우리엑 대해 쓸모 없고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손에 있어서 거룩한 관계 가운데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 앞에 기쁨을 드릴수 있는 존대인것이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자행자지해서 멀리 들어가든지 어떠한 실수로 여기 은화라는 것은 자기가 자행자지해서 자기가 살며시 들어간 것은 아니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좌우간 그 놈이 굴러들어갔어요. 굴러간 정도요. 그런데 사람은 하물며 지혼자 굴러가질 않고 제 의사와 제 정욕이라는 것이 끌고선 굴러가고 있는 것이요. 이렇게 가면 무가치한 위치에 있는 거요. 모든걸 다 지니고 형상도 하나님이 만드신 형상 그대로 반듯한 신혼을 다갖고 있어요. 그리고 사회적인 위치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법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사람관계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이 인정할 만한 가치도 소위 그러한 실질가치가 아닌것들은 명목상의 가치는 그대로 다 남아 있지만 실질적으로 쓸모가 없게 된거요. 그래서 그의 일생이라는 것은 공치는 거요. 실질적으로 쓸모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하다고 높다고 칭찬할지라도 그런 사람은 오판이고 사람들이 잘못알아서 그런거고 실지로는 그 사람은 벌써 낭비의 생활이요.아니 어떻게 하나님과의 정상한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특별히 우리 시자가 벗어나는 것이 어떻게 무서운 현실인가를 알고 남도 바라볼때는 아무것도 변동이없다고 생각해요. 모양도 글도 명각된 것도 반짝반짝 빛나느 것도 다 그냥있어요. 그러나 일단 제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주인이 쓸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아니하고 저방구석에 먼지 속에 혼자 들어 앉아 있을 동안에는 아무 유익이 없어요.이러한 중요한 사실은 흔히 지나치기가 쉬운거요. ‘자기가 조금 자행자기 하더라도 관게없겠지’ 그래서 자기가 먼지 속으로 들어가는거요.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손이 쓸수 있다는 그 거룩한 언약의 위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안 쓰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언약 강ㄴ데그 사람을 두시고 쓰시는 거요. 이 언약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그 은혜의 계약이라는 은예의 언약이라는 그 은혜의 언약 가운데 있는 것인데 그 은혜의 언약이라는것은 내가 포기하고 내가 은혜의 주는바 은혜의 위치에서 벗어나는 바로 이러한 일은 사람들은 잘 모른단 말이요. 그 사람이 인간으로서 이 사회가 무인의 계약, 하나님이 쓰시는 사회의 계약 가운데서 국권에 의한 재정하에서 어떤 일정한 가치를 표시하고 있는 것, 물건으로서 표시할것, 물건을서 대치할것, 그걸 불편하니까 통화라는 것으로 표시하게된 건데 사회계약이 있다. 사회계약이 없어진것도 아니고 다있어요. 그러나 자연계약 가운데서 사회 인간이 인정도 안없어지고 명목상 가치그 인정이라는 평가라는 그러고서 긍정적으로 옳다고 하는 이런것이 있으면서 실질상 하나님 보시기에 소용없는 것이 있단 말이요. 그런 사람이 하기 쉬운 것이라 그거요. 지난번에도 말씀했지만 우리 주 예수님은 지금 베뢰아에서 앞으로 몇주일 약 두어주일 뒤면 십자가에 달리실 거요. 그러므로 당신이 하시는 그 위해선 일을 당신이 이루어 나가시려고 하는 그일을 과거에 걸어오신 길고 꼭같이 전진해 나가시는 거요. 그러면서 당신이 하시려하는 그일의 중요한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제목들로서의 종자들 추종자들, 그런 사람을 불러놓고 첫째 개인이 됐든지 하나님이 쓰시는 거룩한 에코노미의 형식이 됐든지 그 가치를 상실할때는 오나전히 무용지물이다. 이 히브리 사람들아! 민족은 그냥 있고 헤브라이즘은 그냥 갖고 있고 그 많은제도에 의한 여러가지의 행사와 또한 재위와 여러가지 너희가 찬란하게 차리고 꾸면내는 역사적인 배경조차 그냥갖고 있으면서 너희들의 위치가 정상한데 있지 아니하고 나와의 정당한 관계를 아직도 맺을 줄을 모르고 멀리 멀리 떠나서 내가 접근해서 정당한 관계를 맺으려고 할때 저들은 돌을 들어 나를 치려고 하고 내가 너희를 암닭이 병아리를 모으듯 모으려고 할때 너희는 그대로 네길을 걷지 않았느냐? 마치 먼지 속에 들어있는 은화와 같이 너희가 그 많은 그 찬란하 역사의 후세의 역사의 자랑하고있는 헤브라이즘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희가 다자랑하고 훌륭하다고 하는 역사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역사의 정점이 여기 나타났는데 그정점을 너희가 무시하고 이제 무엇이 너희에게 가치가 있느냐?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한 백성으로 이 땅에 존재할때 존재하는 최대의 목적이란 의미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그릇으로서 쓰이지 않을 것 같으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암매 가운데 있는 민족과도 다른 것이 없고 자기 나름대로의 제멋대로의 한 개성을 가진 약소소수민족에 불과한 거지! 그것이 의미있고 가치일수가 없는 것이요. 그런데 가치의 총집중 총집약라는 그 분이 오셨는데 그 분을 맞아들여서 자기네 속에 포함하고 머리에 두지 아니하고 배척하고 배제하고 나갔어요. 이렇게 해서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의 거룩한 계약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제멋대로 자기의 히브라이즘이라는 한 민족과 한 민족의 역사위에서만 살려고 했다 그말이요. 이것이 무가치한 일아라는 거요. 그것은 오늘나 교회도 마찬가지인것이요. 교회는 모든 제의를 다 가지고 제도를 가지고 교회의 찬란한 의식을 가지고 수를 가지고 통계를 다 가지고 그리고 사회적인 발언권고 가지고 사회적인 계약 가운데서 교회에 대한 사회가암흑세대와 같고 큰 기대를 스스로 느끼고 우리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 고통스러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대답해야겠다는 것을 우리도 느끼고 있다고 의식한다 같이, 딱 나서고, 그러면서 무슨 가치있는 일을 하느냐? 큰 집을 짓고 많은 사람을 모아가지고 들어와서 굉장하게 교회의 재위를 행하고 있으면은 의식을 행하고 무슨 회의를 행하고 그럴때 그게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상하냐? 주되신 분과의 관계는 주종의 관계는 명백하냐? 그리고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너희는 지금 듣고 있고 주의 말씀을 듣는자 답게 생활하고 있느냐? 그걸 물으실거요. 이런점에 대해 주의를 해야해요. 그렇지 않으면 잃어버린 은화와 같은 것이요. 잃어버린 은화를 주되신 분은 찾는것이요. 돌아오너라! 그러나 좀체로 히브리 사람은 못 돌아가듯이 좀체로 오늘날 배교하는 교회는 돌아갈 길 없어요.돌아가기에는 너무도 멀리가버렸어요. 그리고 돌아가기에는 너무도 둔감해요. 이제는 너무도 고집이 세요. 이 속에서 이 강한 경향 속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존재하는거요. 그 경향에 대해서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이걸 배제하면서 순결하게 나갈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 비유에서 보는바 중요한 교훈이예요. 그러면 은전의 가치비유에서 우리가 깊이 중요히 느껴야 할것은 참으로 존재의 의미는 뭐며 참으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참된 가치는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정상한 위치에 있지 않다면 이야기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이야기요. 왜냐하면 정상한 위치에 있지 않으면서 거기서 백번공론을 하고 이야기를 해봐도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를 회복할 수는 없는 것이요. 거기서 무엇을 하면 훌륭하겠다.무엇을 하면 위대하겠다. 무엇을 하면 보람이 있겠다. 보람도 위대도 아무것도 없는거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상한 이치에서 주되신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를 맺고 그 지시와 인도 가운데서 행보하지 않는 이상에는 의미가 없는 것이요. 화려하고 찬란하게 남이 다 꿈꾸는 행복을 따라서 추구해서 가겠지만 의미가 없는 것이요.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다 가는 그길이 나도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하고 그러고 나가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있어요. 열심으로 부모밑에서 자라났다가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하고 좀더 좋은 학교 좀더 높은학교 이래감녀서 공부하여 자격을 좀더 많이 얻어서 사회에 나가서 좀더 나은 자리에 그렇게 나가는 거요. 그러면서 참된 가치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 이렇게 하면 가치 있는 일이다. 이렇게 하면 행복이 증진되는 일이다. 자기의 행복과 번영과 보람과 출세, 이상 달성이란 것 갖고 논하고 있으나 하나님 앞에 정상한 위치에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가 주가 되고 나는 종이 되서 그가 너를지시하려고 할때 그 지시를 받을수 있는 진원점이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그분은 누군가? 그것도 없고 어떤 것이 정상한 위치인지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인간경영을 하는 그것, 받는 사람이다 남이 하는대로 다 하고 남이 행복하다는것을 자기도 행복이라고 추구하고 이렇게 완전히 가치의 전도라고 할런지 가치의 변화라든지 새로운 위치에서 새로운 인간이란 것은 무엇인가? 내 생활은 어떻게 벼내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나를 무엇 하시려고 세상에 보내셨는가?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시는 그 선한 일이란 어떤 일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가 다알지 못하는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게 진짜로 중요한 사실인데고 이것보다는 이세상 사람이 갖는 그 일반적인 생각이 더 중요한 거요. 거기에 종종 곁들여서 옷에 꽃는 꽃과같이 꽃을 안 꽂는 것보다는 꽂으면 위로도 되고 조금은 도움이 된다해서 이런거 없어가지고 더 많은 출세를 하고 행복을 얻고 세력을 얻고 잘 되고 훌륭할 것이면 그걸 적당히 처리해 가면서 훌륭한 길을 택할거요. 그런 사람도 많아요. 자기와 신앙이라는 것은 어디로 가고 자기의 행복 인간들이 다 가고 있는 그 행복의 길을 마치 그 무슨 환상을 뒤좇는 것 같이 디좇고 나간다 말이요.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명확한 시앙과 또한 명확산 교회의 태도를 강하게 분명히 갖고 살려고 할때 자기의 생활이 희생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사람도 있지만 차마 희생을 감수할 수가 없고 희생 않고 가는 동안에는 좋고 참신하고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그래 자신의 장래와 내자신의 번영과 출세와 행복이라는 걸 전적으로 희생하고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찾는 것은 자기의 인간적인 번영과이 세상 사람이 다 가면서 행복스럽다고 하는 소위 일반패턴에 의해서 자꾸 가려고 하는거요. 비상한 시기에 임한 사람은 비상한 생활태도를 하는 것이지만 그 비상한 것을 취할만한 각오도 없이 정신이 없어요. 제 1세기의 교회 교인들이 왜 가장 위대했다고 우리가 역사상 말하느냐? 그 사람들은 그 세다와 시대의 요구를 알았어요. 그게 뭐냐하면 비상한각오로 우리가 안정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시대에 난 사람이 아니다! 종교개혁시대에 그래도 그만큼 숭명을 들고 나서고 의미를 갖는 이유가 무엇이요? 거기도 비상한 각오들을 하고 집고 전토를 버리고 망명의 길을 다 떠나가지고 수 많은 사람이 카톨릭 국권이 강력한 국가에 살던 사람들은 그냥 내 몰려 가지고 나가고 혹은 학살을 당하고 그 무엇때문에 그렇게 되었는가? 혹 적당히 카톨릭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평안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복음이 전혀 없는것도 아니니까 그대로 살지 그 무엇 어쨌다고 그렇게 나섰느냐 말이요. 이렇게 비상한 각오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지어지는 게고 하나님께서도 그 나라를 전진시키시는 것이지 안일한 가운데서 이 세상 사람이 가는  그 길을 그냥 다 가고 어떵든지 가급적 평안과 요동없는 것과 안정가운데서만 살려고 하는 가운데 그리고 자기도 남과같이 집도 가지고 가구도 훌륭한것 가지고 좋은 가정을 가지고 좋은 자녀를 가지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그랬으면 그게 부러울 것이 없지만은 그것이 부러울것이 없는것입니까? 히브리서 11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나간 길은 생각도 상상할수도없는 일일것이요. 아브람도 만일 그랬다면 아브라함이란 사람 생겨나지 않아요. 갈대아 우르에서 도시민이 도시민 답게 살아야지 내가 어떻게 다시 완전히 원시인 같이 화합니까? 하고 대뜸 내 생활이 적응성이 없어서 안되겠다고 아마 했을 것이요.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선 것이요. 이것이 위대한 신앙을 요구할때에 필연적으로 사라이 지불하는 댓가고 위대한 신앙을 요구한다는 이유는 그것이 아니면 그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증거하는 일에 적응하는 그릇이 없는 까닭에 그러는 거요.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오늘날 오구하는 그 요구에 적응할 수있는 능력이 있는가를 스스로 다 생각해보세요. 없다면 공연히 여기 오려고 하는 이유가 없어요!

이와같이 비상한 때는 비상한 태세를 취하는 것이요. 이세상 국가도 전쟁이 날것 같으면 평소에는 집에서 집안을 다스리고 평한히 식구들을 데리고 잘 살지만 전쟁이 나면 나라가 부를것 같으면 장정들은 다 지원하고 가는 것이요. 가서 전선에 서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요.이렇게 비상한 때도 있는 것이요. 그리고 때때로 그런 부름이 오는 거요. 주를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것 없이 그냥사는것 아니오. 오히려 이세상의 물질에 물리적인 전쟁보다 더 치열한 전쟁이 있을때 전쟁에 허야 할 것이요. 그럴때 자기가 물질적으로도 고생하는 거요. 왜 위대한 성도가 다른 길로 갔으면 훌륭한 사람 유명한 역사의 기록에 남을 만한 인물이 될뻔 했는데 다 포기하고 오직 교회를 생각하고 가난하고 괴롭고 어려운 길을 험한 길을 갔는가 말이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실뿐 아니라 결코 하늘에서 받을 상이 적지 않을거요. 이런것을 생각할때 가치란 것은 어디가 있느냐? 너희 생각하는 대로 다른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서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일단 정상한 위치에서 한번 떠나면 주인과의 정당한 관계에서 우리가 빗그러져 나가면 저들은 아무도 가치있는 것이없다. 네게 모든 걸 다 포기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아무것도 손실된것 없다고 했지만 네가 있는 자리 하나 때문에 아무것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이걸 명심하라는 거요. 나 있는 자리 하나가 나빠서 모든 가치가 다 상실되고 만거요. 그 은전은 은전으로 의미가 없어요. 먼지 하나만도 못한거요.

오늘날도 더욱 마찬가지 인것이요.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딘가? 나는 주님과 어떤 관계에서 살아야 할건가? 이것을 떠나서 이 세상 사람이 가는 식으로 무엇을 해 보겠다고? 할라면 하지! 낭패요! 하나님이 안 불러 내셨으면 정상적인 소위 패턴에 의한 길을 가는 것이 반드시 죄짓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개인으로 불런내셨던지 교회로 불러 내셨으면 거기에 적응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요. 성약교회는 성약교회로서 불러내심을 느끼고 있어요.만일 느끼고 있지 않는다면 무엇때문에 성약교회가 따로 있을 필요가 있어요? 이 시대에우리가 부름을 받았으면 불림을 받은 자 답게 비상한 생각을 늘 해야되요. 남들이 다 하는 걸 우리는 못할 것인 많고 남들이 간다는 길에 좌지 우지 할 수 없어요. 우리는 우리길로 가면 되는 것이요. 그렇게 은전의 가치상실이라는 것을 갖고 생각할때 심오한 의미가 우리에게 정신차리게 하는 데가 있어요. 다만 정상위에서 떠났다는것 이것이 상실이요. 상실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자체에 아무 변동이 없는데 다만 앉아 있는 자리 서 있는 자리 하나가 달라서 그리고 주인과의 관계가 떠나 졌다는 것 이것 하나에서 아무것도 없어졌다 완전이 없어졌다. 완전히 무가치한거요.죽은 거와 마찬가지요. 그렇게 되는 것이라구요....

(기도)

거룩하신 주님이여 주님과 저희와의 관계가 명확하게 주종의 관계로 서 있어서 주여 주여 부를때 저희는 주의 종으로서 주께서 분부하시는 말슴을 늘 귀가 열려있고 주님의 인도하시는 손을 늘 잡고 가는 바 그리하여 그 길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일지라도비상한 지혜로 또한 비상한 각오를 갖고 우리 주님과 함께 가는가? 그렇지 않고 이 세상 사람이 다 행복스럽다, 인간의 대도가 하는넓은 길로 모두 다가는 그길을 가는 것인가? 이것이 우리 앞에는 항상 중요한 과제로 소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길을 걸어라. 넓은 문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한다든지 돌아볼것 없이 저희의 갈길을 바로 찾고 바로 깨닫게 합소서. 이리하여 주님의 것 다웁게 저희의 생이 허무하게 끝나는 일이 없도록 확실히 의미를 가지고 주께서 받으실 만한 열매를 맺고 살아가게 하시고 받으실만한 열매를 맺어 주님에게 기쁨을 드리는 교회로 확고하게 서서 나가게 합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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