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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그리스도의 탄생과 마리아의 헌신 (눅 1: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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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을 맞기 위한 마음의 준비

오늘 저는 성탄절을 한 주일 앞둔 시점에서 우리 모두 준비된 마음으로 성탄절을 맞이하기 위해서 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원래 기독교에서는 성탄절 전 4주간을 대강절(待降節, The Advent)로 지킵니다. 이 절기는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면서 성탄절을 기다리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므로 믿는 자들이 성탄절을 맞이하기 전에 이를 묵상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메시야의 탄생에 관한 예언들

그리스도의 탄생은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에 의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탄생에 대하여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 9:2) 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증거하기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고 했습니다.

메시야를 가리켜 이사야는 “큰 빛”이라 하였고 요한은 “참 빛”이라고 했습니다. 흑암이나 어두움은 죄악 세상을 가리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은 소망 없이 살다가 멸망에 떨어져야 할 운명에 놓인 인류를 가리킵니다.

메시야가 필요한 이유는

석가모니는 인간의 삶은 모든 것이 다 고(苦)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비참한 실상을 올바로 파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탈하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불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불교는 인간에게 자력(自力)으로 구원을 얻을 만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을 말씀합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에는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 라고 했습니다. 과연 어느 가르침이 옳을까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점점 또렷하게 깨달아가는 진리는 성경 말씀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가 옆 자리에 앉아 있는 고승 한 분과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아홉 살부터 절에서 생활했으며 그 때 연세가 95세라고 했습니다. 한 눈에 오랜 수양을 통해 고상한 인격을 닦은 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렇게 오래 도를 닦으셨으니 해탈하셨겠군요” 그러자 그 노승은 손을 내 저으며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자칭 부처라고 내세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노승은 너무나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과 대화하면서 저는 마음으로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십 평생을 도를 닦은 분이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면 일반 중생(衆生)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습니까? 자, 사람이 도를 깨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지만 60억이 넘는 사람 가운데 스스로 도를 깨쳐서 부처의 경지에 이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래도 불교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은 그 누구도 절대로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 인생들에게 구원의 빛을 던져주는 단서가 됩니다.

인간들의 전적 무능이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의 손길을 우리에게 내미신 동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무능을 철저하게 깨달아야만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갈망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죄인 됨과 절대 무능함을 일깨워 주십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택하신 방법은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파선되어 물을 잔뜩 마시고 탈진하여 표류하는 사람에게 해안가로 헤엄쳐 나가라고 말해 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 구명줄을 던져주는 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탈진한 사람이 줄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낼 수 있을까요? 그렇지요. 구조요원이 물속에 뛰어 들어서 그 사람을 안고 구명선 까지 헤엄쳐 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는 인간이 처해 있는 실상에 대한 진단에서부터 차이가 납니다.

심지어 성경은 인간의 영적 실상에 대하여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탈진한 정도가 아니라 이미 죽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스스로 살 길을 찾는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언급하신 성경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쉽게 대할 수 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

그 첫 번째 예언은 창세기 3장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하와를 꾄 뱀을 저주하시면서 하신 말씀이지만, 실은 인간들에게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최초의 복음 또는 원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곧 메시야, 그리스도, 구세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7장 14절의 예언도 중요합니다.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는 메시야께서 동정녀의 몸을 통해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으로서, 오실 메시야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심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은 탄생하실 메시야가 어떤 분이신지 더 분명하게 계시해 줍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성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발견합니다.

그런가하면, 이사야서 11장은 메시야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3)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4)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미가서 5장 2절에 메시야께서 탄생하실 장소가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 외에도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메시야의 탄생에 대한 예언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니요 성경에 예언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근거는 성경이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를 대망한 사람들

그리고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믿지만, 구약시대에 살았던 성도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을 학수고대하는 대망 신앙을 갖고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이 메시야의 오심을 대망하는 신앙인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성도가 나옵니다. 25절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란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또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데, 마침 부모의 품에 안겨 성전에 들어오는 아기 예수를 단번에 메시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품행이 나쁘기로 소문난 사마리아 여인도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과 대화하던 중에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요 4:25)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 당시 메시야에 대한 신앙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가브리엘의 방문과 마리아의 반응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해서 빼놓아서는 안 될 한 여자가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그 분입니다.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된 내역은 이렇습니다. 당시 마리아는 요셉이라는 청년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유대인의 정혼은 우리의 약혼과 비슷하지만 훨씬 법적인 구속력이 강합니다. 정혼한 남녀는 한 집에서 동거하지는 않지만 법적으로는 정식부부로 인정받았습니다. 정혼 기간에 남자가 죽으면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을지라도 그 여자는 법적으로 처녀 과부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나사렛 동네에 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천사의 출현에 마리아는 매우 놀랐습니다. 천사가 왜 나에게 이런 인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말하기를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했습니다.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은 처녀에게 아기를 낳게 될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충격적인 말입니까?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러자 천사가 대답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천사의 설명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였고, 천사는 떠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메시야의 탄생과 관련해서 가장 크게 헌신한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마리아일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메시야의 어머니가 될 사람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경건하고 순결한 처녀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첫째로, 결혼 전에 처녀가 누구의 씨인지도 모를 아기를 임신한다는 것은 유대 사회의 관습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기를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인 신명기 22장 23절로 24절에 이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23)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24)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마리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임신했다고 말해 보았자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 여자의 생사가 걸린 심각한 문제입니다.

둘째로, 그것은 정혼한 요셉을 배신하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그의 약혼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마리아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요셉은 배신감에 치를 떨 것이고 둘의 혼인 언약은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생활을 꿈꿨던 두 사람의 바램은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약혼자에게 버림받은 마리아의 일생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한 여자의 일생이 걸린 심각한 문제입니다.

셋째로, 그것은 가문에 수치를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 마리아의 부모와 형제들, 일가친척은 그 사회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근래에 런던에 살던 16세의 쿠르드계 소녀가 부엌칼로 11번이나 찔려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무슬림인 아버지가 레바논 출신의 기독교인과 사귄다는 이유로 딸을 무참하게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또 21살 난 무슬림 처녀가 유대인 남자와 사귄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고용한 청부업자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명예살인이라고 부릅니다. 마리아의 부모 형제는 이처럼 잔인한 행동을 할 리가 없다 할지라도 가문에 수치를 안겨준 마리아는 가족과 친지로부터 외면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외에도 마리아가 겪어야 할 고초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사려 깊은 마리아가 몰랐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기로 결심하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목숨과 가족과 사랑과 명예와 행복을 송두리째 희생할 각오가 없이는 내릴 수 없는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마리아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신실한 믿음을 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의 뜻과 상반될지라도 기꺼이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진실한 믿음이란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의 논리와 경험을 초월할 때라도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지체치 않고 순종했습니다. 이삭과 함께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나귀에 실고 불과 칼을 가지고 아침 일찍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명하신 모리아 산에 이르자, 이삭에게 나무를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쥐고 정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놓고 독자 이삭을 결박해서 나무 위에 얹어놓고 칼을 빼어 이삭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셨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비록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리지는 않았지만 여호와의 사자가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시행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같은 믿음을 귀히 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생명보다 귀한 이삭을 드렸고, 마리아 역시 자기의 전부를 드렸습니다.

메시야 대망 신앙을 가진 마리아

그리고 마리아의 순종은 그녀가 메시야 대망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가브리엘이 그녀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했을 때, 마리아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위해서 자기가 선택받았음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다니, 세상에 이처럼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한 몸을 희생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이 구원의 얻게 될 것을 생각할 때 마리아는 기쁨으로 자신을 드리기로 했던 것입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대답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함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귀한 일을 억지로 하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마리아가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저는 절대로 그리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했다면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인류 구원을 위한 이 귀한 일에 쓰임 받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을 헌신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 마리아

끝으로, 마리아의 순종은 사랑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했음을 보여 줍니다. 아기를 잉태하면 언젠가는 정혼한 요셉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약혼자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을 알고서도 모른 척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실재로 요셉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대단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 이하에 보면,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고, 이를 안 요셉이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이 일을 생각했다고 증언합니다. 요셉의 태도는 너무나 신사적입니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을 텐데도 소문내지 않고 가만히 파혼하기로 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요셉이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마리아 역시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메시야를 잉태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요셉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음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 권면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메시야를 낳을 적임자로 택하셨을 때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흔쾌히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녀를 높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만세에 칭송을 받고 여자 중에서 가장 복 된 자라고 일컬음 받게 하셨습니다.

이제 성탄절이 한 주 남았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되새기면서 성탄절을 은혜롭게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마리아의 헌신을 본받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로 다짐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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