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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으로부터 자유하려면? (눅 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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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부터 자유하려면?
누가복음 6:1-12

서론)
1858년 뉴욕의 어느 가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고 시력도 극도로 나빴습니다. 게다가 천식까지 앓아서 앞에 있는 촛불을 끌 힘도 없는 호흡 곤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하여 드디어 열 한 살이 되던 날 아버지는 이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가진 장애는 장애가 아니란다. 네가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고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와 함께 한다면, 오히려 너의 장애 때문에 모든 사람이 너를 주목할 것이고 너는 진실로 역사에 신화 같은 기적을 남기는 놀라운 삶을 살 수 있단다."
그 후 그는 23세가 되던 해에 뉴욕 주를 대표하는 의회의 의원이 되었고, 28세에는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뉴욕 주지사가 되고, 부통령을 거쳐 미국 역사의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미국의 신화를 재건하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06년에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였던 이 사람은 바로 데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입니다.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한 사람의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볼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자연의 영향, 과학의 영향, 경제의 영향등 많은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을 말하라고 하면 그것은 인간일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수가 없기 때문에 항상 누군가의 영향을 받고 지냅니다. 그리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변 사람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서 자살을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이 학생도 자신에게 왕따를 주는 학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저는 이런 뉴스를 볼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왕따시키는 애들을 신경쓰지 말고 그냥 학교생활에 충실하면 안되나?”
우리가 삶을 살면서 이렇게 왜곡되고 부정적인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을 통해서 그 비결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출발점으로
1. 예수님은 반대자를 포용했습니다.
지금 본문은 안식일의 문제 때문에 예수님과 바리새인이 관계가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장면입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사이를 가다가 제자들이 밀을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라고 하면서 반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윗이 옛날에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사람에게도 준 일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면서 인자가 안식일을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논하면서 왜 다윗이 진설병을 먹는 이야기를 합니까? 옛날 다윗과 그의 동료들이 쫓겨다닐때 위험에 처해서 성전에 들어가 숨어서 목숨을 구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성소에 있는 진설병(떡)을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배고픔을 면한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진설병은 따로 구별되어서 제사장외에는 다른 사람이 절대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먹으면 먹은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런데 다윗과 그의 친구들은 제사장들만 먹을수 있는 진설병을 먹고도 아무 해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설병처럼 따로 구별시켜 놓은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따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인들은 양을 치고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제사장은 제사장의 역할만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제사장을 살리기 위해서 진설병을 따로 구별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설병을 다윗이 먹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진설병이 다윗과 그의 동료들의 배고픔을 면하게 해서 그들의 생명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도 똑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따로 구별해 놓은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을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은 그들의 배고픔을 면해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될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오른손이 마른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안식일이었습니다.
6절에 보니까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이 일부러 안식일만 골라서 치유사역을 하신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손마른 사람을 고친것도 안식일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친것도 안식일입니다. 또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귀신들려서 허리가 꾸부려져 펴지 못하는 여자를 예수님이 고쳐주십니다. 그날도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안식일만 골라서 이런 일들들 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꿔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일부러 안식일날 이런 일들을 해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고 싸워서 예수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예수님이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마른 사람을 일부러 많은 사람들의 한가운데에 세웁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이 말씀을 하시고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11절에 보니까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사실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관계는 이전부터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마다 그들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는 바리새인들을 비난하거나 저주하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계속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난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려면 그들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에 행한 일들에 대한 사역의 정당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르는 것을 일깨우고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트집에 하나하나 사역의 정당성을 밝혀서 그들 스스로 잘못된 부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예수님이 바로잡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싸우려고 했다면 천사를 동원해서 일을 내던가 아니면 사람들을 동원해서 폭동을 일으켰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트집잡고 반대하는 사람까지 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포용하시는 분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떼를 쓰고 반항하기도 합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을때에는 자신이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앙탈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포용하십니다. 우리가 깨달을때까지 하나하나 설명하시면서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포용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문화권내에서는 반대자를 포용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유교문화 때문에 윗사람의 의견에 반대를 했다가는 곤욕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신앙인들도 포용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피아노를 사서 오른편에 놓자,왼편에 놓자 싸우다가 갈라진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없다로 싸우다 갈라진 교회도 있습니다. 너무 심하게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둥글둥글 다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울 총각과 경상도 처녀가 결혼하였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우리 국수 끓여 먹자”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국시지 국수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둘이는 국수라는 둥 국시라는 둥 말다툼하다가 이장에게 어느 것이 옳은지 묻기로 하였습니다. 이장이 말했습니다. “국수와 국시는 재료가 다릅니다. 국수는 밀가루로 만든 것이고 국시는 밀가리로 만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부부가 물었습니다. “밀가루와 밀가리는 어떻게 다릅니까?”“밀가루는 봉투에 넣어져 있는 것이고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겨 있습니다” 또 이 말을 들은 부부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봉투와 봉다리는 어떻게 다릅니까?”“봉투는 기계로 찍은 것이고 봉다리는 손으로 붙여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둥글둥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의견을 다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서로 포용하며 삽시다.

이렇게 포용하게 되면
2. 본연의 일에 충실하게 됩니다.
12절을 보세요.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1절에는 어떻게 말씀합니까?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예수님이 안식일날 병고치는 사역의 정당성을 밝히자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분기가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근거가 옳은것인가? 하는 고민도 하지 않고 그들 속에 화가 가득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포용하지 못하니까 분노가 남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그들을 포용하니까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대조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이후에 상황이 어떻게 전개가 됩니까? 마가복음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하고 의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당은 친로마를 표방해서 정치적으로 헤롯을 지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시말하면 바리새인은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헤롯당은 정치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서로 의논을 한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대단히 심각합니다. 아마 우리중에 이런일이 벌어지면 난리가 날 것입니다. 친척, 친구를 찾고 여기저기를 쫓아다니면서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산에 가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12절을 보면 “이때에....”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하고 있는 ‘그 때’ 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도하러 갔습니까? 위급한 상황을 하나님께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기도했나요? 아닙니다. 그뒤 13절을 보면 제자들을 부르고 그중에서 12명을 택했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많은 제자들중에서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훈련시킬 12명을 선발하기 위해서 밤새도록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주변상황은 어떻습니까? 자칫하면 예수님이 궁지에 몰릴수도 있습니다. 죽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자신이 해야할 본연의 일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종교적으로 어떻게 궁지에 몰아 넣을까를 생각하면서 대책마련하고, 헤롯당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위협을 가할까? 고민하면서 대책을 마련하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대책마련한다고 제자들하고 대책반을 수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 어떻게 행동을 하든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 어떤 일을 벌이든 하나님이 주신 자기 본연의 일에 충실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포용하니까 그들이 어떤 일을 벌이든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포용하지 못하니까 자기 본연의 일에 충실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벌이려고 의논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의 본연의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진실된 율법인지를 알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본연의 일은 안하고 어뚱한 일만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 줄기세포 문제 때문에 세계가 떠들썩합니다. 황우석 교수는 황우석 교수대로, 노성일 이사장은 노성일 이사장대로, 김선종 연구원은 연구원대로 정신이 없습니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작년에 한말이 다르고, 올해 한 말이 다르고,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어제까지 동료였는데 금방 적으로 돌변하고 난리가 아닙니다.
각자가 왜 이렇게 말이 다릅니까? 서로가 왜 이렇게 비난을 합니까?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떳떳하게 일하면서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감싸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앞서갈수 있는 얼마나 좋은 기회였습니까? 부정을 저지르면 안되겠지만 서로 더 연구를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로 비난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면에서 바리새인들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본문에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기 보다는 오히려 분이 가득해서 예수님을 죽이는데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혹시 우리들 가운데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은 없나요?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가운데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주변상황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떳떳합니다. 잘못한 것이 없어요. 떳떳하니까 당당하고 예수님이 해야할 일을 꾸준히 수행하고 있는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변의 상황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데 흔들리면 안돼요.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의 일이라고 하면 꼭 교회일이나 교회일에 관련된 것만 주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의 모든 일이 전부 주의 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에 소명을 주신것입니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주의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주의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십니다. 설령 직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도 하나님이 반드시 그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일도 못하면서 남의 일에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은지 몰라요. (감내라 대추내라. 이렇쿵 저러쿵....)

예수님이 이런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번을 물어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예언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넘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순교할 것을 예언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옆에 있는 요한을 보면서 묻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물어요.
그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무슨 말입니까? 남의 일에 신경쓰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내 일이나 잘하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어떤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도 그 상황에 흔들리거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일에 충실했습니다. 여러분도 주변 상황 때문에 흔들리거나 영향을 받지 않고 주의 일에 충실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예수님은 자신의 반대자를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포용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반대자들이 어떤 일을 벌이든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본연의 일에 충실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의 일에 충실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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