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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흥분에 빠져라! (학 1: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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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최불암 씨가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자 부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애완 동물상점에 가서 개를 한마리 사왔어요."  "개?  무슨 종류를 샀는데?"  "세퍼트예요."  "어디다 뒀는데?"  "뒷뜰에 매 놓았어요.  한 번 가보세요."  세퍼트에게 한 번 가보라고 독촉하는 부인의 말에 최불암 씨가 "물지 않소?" 라고 물었더니 부인이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걸 빨리 알고 싶어서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가 쓴 '당신은 나무요 나는 흙입니다'라는 책에 보면, 이 분은 결코 화난 얼굴로 남편과 시어머니를 대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믿음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평안과 기쁨을 전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분노와 미움과 좌절을 안겨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단언하건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단은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킵니다.  그래서 성질을 돋우게 만듭니다.  그 심령 속에서 분노를 일으키게 만듭니다.  입에서 비난과 저주와 불평을 쏟아내게 만듭니다.  모임에서 열기를 식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들의 마음에 감화와 감동을 일으켜 주십니다.  그래서 온유한 성품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 심령에 평안과 기쁨이 충만하게 합니다.  입에서 찬송과 감사와 은혜를 쏟아내게 합니다.  모임에서 뜨거운 열기를 강하게 일어나게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을 살아오면서 어떤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이 시간 자신에게 성경의 잣대를 놓기 깊이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이요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향해서 이렇게 불렀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기독교인 가지고는 안됩니다.  종교꾼으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세상에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의 체취가 물씬나는 사람 속에 자신을 채우시고 나타내십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께서 공급해 주시는 감화와 감동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전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인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사람들에게 감화와 감동을 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인생을 살면서 사람과 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흑암의 권세인 상황과 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일평생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한 주간 동안 싸우던 사람들을 미워하지 말고 흑암의 권세인 상황과 싸운다고 하는 말씀을 붙들고 자신을 다시 세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사람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변화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변화는 관리하지 못하고 사람을 관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주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판단을 공동체에 주입시키려고 합니다.  자기 내면의 변화는 일으키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내면을 뜯어고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고치려고 하면 그때부터 고통이 옵니다.  사람을 뜯어고치려고 하면 그 순간부터 공동체는 파괴되고 맙니다.  옛말에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은 전설입니다.  부부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관리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 내면의 변화를 관리하십시오.  자기 내면의 변화를 잘 관리하라는 말은 한결 같이 변함없는 마음으로 충성하라는 말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달려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자기 내면의 변화를 잘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어야 합니다.

잎이나 가지를 치고 가꾸면 일시적으로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뿌리를 가꾸지 않으면 모든 것이 결국에는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문제는 뿌리의 힘, 내면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행동으로 옮기려면 반드시 내면의 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힘이 나의 생명 전체를 감격과 감동으로 지배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호와의 집에서 우리 모두가 여호와의 신으로 내면의 권능의 채움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와 같은 공허한 심령들 위에 생기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오늘 이 자리와 우리의 심령을 휘감아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무너졌던 심령들이 다시 세워지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습니다.  목사인 제게도 고민이 있습니다.  제 고민은 설교를 멋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원을 마치고 논문이 무사히 통과되어서 박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제 고민은 이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될 것인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약속의 통로가 될 것인가?"  보다 중요한 고민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생명 걸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달려가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아브라함이 받았던 축복을 우리 성도들도 받아서 누리게 할 것인가?"  답은 있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십시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지와 협력과 인정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단이 일으키는 불평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단의 저주의 통로가 되어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시기 바랍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의 통로가 되기 위해 은혜로운 생각과 은혜로운 말을 하셔야 합니다.  내 입에서 불평하고 비난하면서 은혜의 통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는 행동을 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복을 내려주시지 않습니다.  복 받을 만한 사람에게만 복을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인정을 받는 그 사람에게 개인의 축복과 가정의 축복, 그리고 가문의 축복을 일으켜주십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복 받을 행동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복을 달라는 것은 속된 말로 강도요 도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십시오.

고린도후서 1장 12절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세상에서 처신할 때에, 고린도 교인들을 상대로 처신할 때에 육체의 지혜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인간의 잔꾀와 재주를 부리려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모두 분토와 같이 내버리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게 되고, 또 그가 그렇게 살게 된 것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육체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행한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헌신과 희생을 말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했습니다.  죄로 더럽혀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와야 깨끗해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와야 아름다워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더 많이 공급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 앞에서 헌신과 희생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바로미터가 됩니다.

성경에는 그 어디에도 '방법'이나 '수단'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교묘하게 행동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환경의 변화에 약삭빠르게 적응하기 위해 바람개비처럼 방향을 바꾸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도록 자신을 회칠하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방법이란 꼭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기질을 모방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변치 말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변치 말고 끝까지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첫 사랑과 첫 은혜를 소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지지와 협력과 인정을 얻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데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적인 방법을 연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성령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붙들고 믿음으로 달려가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시야를 넓히십시오.  사람의 지혜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십시오.  아십니까?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어느 때나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찾고 있다는 사실일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 이 땅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그가 가정을 일으켰고, 민족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적 감동입니다.  하늘로부터 감동이 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곳에 무엇인가를 알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주시는 영감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영적 감동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공급해 주시는 감동에 민감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감동에 민감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황무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감동을 주고 감동을 받는 일입니다.  우리 마음에 감동이 없다는 것은 저주입니다.  감동이 없는 삶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괴로운 일입니다.  감동은 은총입니다.  감동은 축복입니다.  우리 마음에 감동이 있어야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에 깨달음이 옵니다.  지금 여러분의 심령에 말씀을 들을 때에 감동이 오고 가슴이 벅차다면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늘 우리 교회 교우 여러분 모두가 감동을 주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성령에 감동되십시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학개가 쓰여졌던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의 우상숭배와 범죄로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하여 끊임없이 주변 나라의 위협을 받다가 북쪽의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남쪽의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를 통해서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바사 왕 고레스는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의 기물들도 돌려주면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지 70년만의 일입니다.  정말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70년만에 돌아와 보니 그 땅에는 이방 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방 민족은 갖은 방법으로 성전 건축을 방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성전을 건축할 재원도 부족했습니다.  때문에 성전 건축은 시작되었지만 계속 진행되지 못한 채로 16년 동안 내버려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차 성전 짓는 일에 무관심해 졌으며 그들 자신의 집을 짓는 데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잿더미 속에서 무너져 있는데 그들은 아주 화려한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이 바로 학개서에 흐르고 있는 배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고 영적 좌절이 계속되던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게 됩니다.  당시 영적 흑암과 좌절의 시대를 깨뜨리고 다시 한번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피게 한 것은 다른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삶의 흑암기와 위기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기를 만났을 때에 세상적인 지혜와 방법으로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기 상황 속에서 망하게 되었다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것으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위기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을 더 찾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팽이를 보십시오.  팽이가 거의 다 돌았을 때에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쓰러집니다.  그러나 그때 채찍질을 하면 다시 중심을 찾고 열심히 돌아갑니다.  우리에게 시련의 채찍질이 필요한 이유도 똑같습니다.  시련의 채찍질이 주어지면 다시 주님을 찾게 되고, 우리의 영혼에 활력이 생기게 됩니다.  위기 상황에서 중심을 잃어버리고 비틀거리면 반드시 쓰러집니다.  그러나 말씀에 뿌리를 박고 예수님 중심적인 삶을 회복하고, 교회를 꽉 붙들고, 믿음을 붙들고 나가면 쓰러질 것 같지만 중심이 있는 오뚝이가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우리도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항상 말씀을 중심에 두십시오.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 강하게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교회 역사를 보면 부흥이 있기 전에 먼저 말씀의 부흥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듣기 좋아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교인이 많아질 때에 그 교회는 부흥하게 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꿀맛처럼 들려지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에 심령 부흥이 있게 되고,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흥분시키셨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우르'입니다.  이 말은 '일어나다, 잠에서 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마음이 흥분되었다"는 말은 "백성들의 영혼에 거룩한 열심이 타올랐다"는 말입니다.  어떻게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붙잡았을 때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래서 우리에게도 거룩한 열심히 심령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거룩한 영적 흥분이 일어나야 합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흥분'이라는 말은 감정이 북받쳐 일어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흥분은 별로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흥분해서 일을 그르친다.  흥분하면 되는 일도 안 된다.  순간적인 흥분이 평생을 망친다.  이런 흥분은 결코 바람직한 흥분이 아닙니다.  이런 흥분은 일평생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흥분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좋은 일에 흥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일에 흥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성만 가지고는 일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감정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감정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이성을 불신하지 않는 것처럼 감정도 불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감정적인 요소도 필요합니다.  머리는 냉철해야 하지만 가슴은 뜨거워야 합니다.  신앙 원리에는 냉철하고 신앙생활에는 뜨거워야 합니다.  제자들이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의 새 술에 취하여 감동과 흥분에 빠졌던 그 경험을 오늘 우리도 해야만 합니다.

약 백여 년 전 기독교 선교 연맹을 창설한 심슨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성령에 의해 흥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영적 감격이 사라져 버린 시대, 하나님의 은혜를 수없이 경험하고서도 그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시대에 우리는 영적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영적 감격을 잃어버린 영혼은 불쌍한 영혼입니다.  거룩한 영적 흥분에 빠져보지 못한 사람의 심령은 메마른 사막과 같습니다.  그에게는 먹어도 마셔도 입어도 벌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격을 찾아야 합니다.  거룩한 열정의 불씨를 되살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심령에 거룩한 흥분이 일어날 때에 꿈과 같은 비전도 반드시 이루어지는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거룩한 영적 흥분에 빠져보십시오.  그러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충만하면 흥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기대감으로 충만해야 합니까?
먼저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고 있고, 또 쓰임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았습니다.  "나랑 같이 국가를 위해서 청와대에서 일해 봅시다"  이 전화를 받는다면 흥분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 된다는 사람은 내일 당장에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셔야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것입니다.  마음에는 흥분과 기대감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서 쓰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실에 흥분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영적 간경화증에 걸린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불러서 쓰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쓰실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흥분되고 있습니까?  모세를 찾아오시고 그를 역사의 주역으로 쓰셨던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나를 찾아오셔서 이 땅의 주역으로 쓰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어디에서, 어떤 모양으로 쓰실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충만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발견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지명 당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나를 어떻게 쓰시는지를 경험하고 체험하십시오.  그래서 거룩한 영적 흥분에 완전히 빠져보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신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흥분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다음으로 우리가 어떤 기대감으로 충만해야 합니까?  나와 내 가정을 축복하신다는 기대감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서 누리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이 복을 받고, 그래서 축복의 가문으로 세움을 받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정을 어떻게 축복해 주실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하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정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것이 분명하다면 여러분은 영적 흥분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정에 어떤 복으로 채워주실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 가는지 구체적으로 첵크를 해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떤 기대감으로 충만해야 합니까?  교회 부흥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부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전을 바라보면서 흥분하는 것이 부흥입니다.  사람에게는 재미를 위해서 살 것이냐, 영광을 위해서 살 것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부흥을 체험하지 못하면 향락과 재미를 위해서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말은 나와 내 가정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집을 세워 가는 영광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부흥을 바라보는 인생에는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찬란한 영광이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십시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생존의 문제도 다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가 6월 24일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유대력에 의하면 7월 1일은 유대인의 신년인 나팔절이고, 10일은 전체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의식일인 대속죄일입니다.  그리고 15일부터 한 주간은 초막절(추수감사절)로 지켰고, 7일의 마지막 날에는 대성회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정을 잘 소화하려면 6월 말은 추수를 서둘러 끝내야 하는 1년 중에 가장 바쁜 때입니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보내야 하는 때입니다.  이처럼 바쁜 때이지만 그들은 "바쁘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짜증내지 않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집을 위한 시간이 먼저였습니다.  거룩한 열정으로 흥분하기 전까지는 자기의 집에 빨랐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집에 빨랐습니다.  시간이 남아서가 아닙니다.  시간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은 그의 앞날의 시간들을 복된 시간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들 모두가 정신없이 바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일에 마음이 하나가 되어 헌신할 때에 서로가 흥분하고 감동했던 것입니다.  아십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하는 헌신과 희생이 더 강한 영적 흥분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국 영적 흥분에 빠져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뜨거운 감동과 열정을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감동의 책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수없이 나옵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다윗이 그랬고, 여호수아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역사하실 때도 매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감동은 우리들 생활 속에서 엄청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감동은 누가 시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 감동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을 체험하면 감동하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면 감동하게 됩니다.  결국 감동은 말씀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더불어서 감동 받을 수 있는 자기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감동해보셨습니까?  감동 체험을 못하면 몸이, 정신이, 영혼이 무너집니다.  인간이 진정 건강하려면 그 영혼이 성령을 체험하고 감동해야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영적 흥분에 빠져서 크게 감동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언제 누군가를 감격시켜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감복하실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을 증언하면 그 증언을 듣는 사람들이 감격하고 그 감격하는 장면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감복하시지 않겠습니까?

모름지기 사람은 기뻐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기뻐하면 뇌하수체의 작용에 의해서 여러분이 잘 아시는 엔돌핀이 흐릅니다.  그게 나오면 사람이 건강해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라 감동을 받으면 엔돌핀보다 1천배 더 센 다이몰핀, 즉, 다이너마이트 같은 엔돌핀이 나온다고 합니다.  사람이 감동을 받으면 다이몰핀이 흐르는데, 이것은 아주 나쁜 병도 다 제어할 수 있는 호르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으로 감동 받아서 기쁨보다 환희에 넘치게 될 때에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현을 치니까 사울이 그렇게 아팠던 머리가 나았다고 했습니다.  그의 일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감동을 시키기는커녕 한 마디 탁 뱉으면 그것을 들은 사람이 밤새도록 잠 못 자고 침대 위에서 대굴대굴 구른다고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  남은 감동시키면서 산다는데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왜 1부, 2부, 3부 예배가 있는 지 아십니까?  교인들끼리 싸우고 나서 꼴 보기 싫은 사람 안 보려고 그래서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설이니까 설로만 들으십시오.

본문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미지근합니다.  크리스천은 사회의 소금이라고 자처하는데, 지금 그 소금이 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의 불로 태움을 받으십시오.  무너져 가는 나의 신앙의 제단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화 감동시켜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거룩한 영적 흥분에 빠져서 비전을 향해 달려가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내 가정을, 내가 섬기는 교회를 어떻게 만들어 가시고 축복하시는지 이 기대감과 흥분을 심령에 담고 복음의 능력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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