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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경험는 삶(4) - 성경과 기도 (요 14:16-17, 롬 8: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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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설교 제목, 설교 본문, 내용에 대하여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다 잊었어도 애완견에 대한 이야기는 금새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개도 사랑을 받으면 주인을 알아보고 사랑에 대하여 반응한다. 비록 인격적 관계는 아니지만 사랑의 관계에 있다. 그 애완견의 행복은 오직 주인의 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행복도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신 하나님 품 안에 있을 때 보장되는 것이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며 인격적 관계이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거부함으로 인해 발생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가 되시고, 우리를 전폭적으로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가 그의 사랑 가운데 거할 때 우리는 더욱 더 진하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왕의 고백처럼,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역대상29:11-12).

다윗왕의 용맹과 베짱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신뢰, 사랑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신뢰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충고하고 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6:17)

오늘은 또 다른 면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대단히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방법이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다이내믹한 신앙생활을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우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가?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이다. - 이것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알고 있는 것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날마다 날마다 나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가?

정말 나의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하는 사람은 오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1.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우리는 성경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1)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하였다.
딤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완벽한 계시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첫 걸음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경을 펴서 읽는 일을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돕는 인도자의 역할이 아니라 성경을 펴서 읽는 순간 하나님과의 만남이 시작되는 것이다.

새벽기도후 첫 일과는 매일 성경으로 큐티하는 것이다. 그리고 맥체인 성경읽기표를 따라서 성경을 읽는 것이다. 이 시간은 나의 하루 일과 중에 대단히 중요한 시간이다.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묵상 본문 에스라서8:21, 아하와강가에서 금식을 선포, 평탄한 길을 간구함.
그제의 묵상 본문 에스라서8:15, 인원 점검하다가 레위인이 없음을 알고 사람을 보내 레위인들을 동참시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본문의 내용 중에서 유독 그 구절이 나의 마음을 사로 잡고 시선을 멈추게 했다.

헨리 불랙가비목사, “성경을 읽다가 한 구절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영적 진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감동이 오는 것은 내 마음 속에 내주 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또는 설교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감동이 오고 은혜가 되는 순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빨리 느껴야 한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영적진리를 깨닫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감각적이고 충격적인 체험에 매이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 깊이 있는 분명한 만남, 그 경험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하고 사랑하기 바란다.

2)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조정해야 한다.
조정이란 말은 조율이란 말이다. 어떤 사람이 시37편을 읽다가 어느 구절에 멈추게 되었다.
시37: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읽는 도중에 다른 사람에게 돈을 꾸고 수 개월이 지나도록 잊고 갚지 않은 생각이 났다.
그 말씀으로 인해 충격을 받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악인이 따로 없구나. 바로 나였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 날로 갚기로 결심했다.

조정이란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는 것에 그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 앞에서 “내가 어떻할꼬?”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의 마음 속에서 빚을 갚아야 한다는 강한 마음을 불어 넣으신다. 이것이 바로 말씀 앞에서 자신을 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정하는 것에 끝나면 안된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한다. 빚을 갚을 마음이 생겼다면 미루지 말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곧 순종을 의미한다.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불순종했다면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순종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여러분이 말씀에 감동만 받고 나갈 때 잊지 않기 위해서 기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성경을 읽으면서 감동받으면 그 말씀을 기록하고 느낀 점을 적어두라.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그 말씀을 기록해 두라.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열어서 읽고 점검해 보라.



2.기도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쌍방통행으로 교제하고 대화하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잘못된 고정 관념이 있다. 기도는 말을 많이 하고, 조리있게 하고, 크게 하고, 길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도는 대개 일방적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들으세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불쌍여기시거나, 안타까우셔서, 아니면 겁을 먹으시고 응답하실 것으로 믿는다. 사람이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는 말이 이런 경우라 할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소리질러서 크게 부르짖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언제인가?
공동체로 모였을 때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 그때는 입을 벌려서 함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는 말을 적게 하고 듣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는 것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생활을 힘들어 하는 이유는 기도를 종교생활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유창하고 조리있게 길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러나 대단히 잘못된 선입견이다. 사랑하는 사이에 격식도 수식어도 필요없다.

아내를 향하여, “사랑과 은혜가 풍성한 여보, 오늘 아침에도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오.”
아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전지전능하사 우리 가족의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고, 이 못난 아들의 학비와 학원비와 용돈을 주시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화하지는 않는다.

기도는 사랑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대화이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그의 백성들과 만나신다. 성경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인도하는 중매쟁이가 아닌 것처럼 기도 역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방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분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1)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해야 한다.
롬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는 기도를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도와주신다. 그것은 마치 자동차에 부착되어 있는 네비게이션과 같다. 지난 봄에 서울 길동에 있는 은평교회당에서 구원선 선교회의 월례회 모임에 참석했다가 찾지 못해 40분 동안을 방황한 적이 있었다.

내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면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강압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 도와주세요.”

2)욕심을 버려야 한다.
죠지 뮬러 목사,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먼저 자신의 뜻이 없어지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힘쓴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욕심, 이기심이다.
약4:2-3,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내 인생의 최대의 적, 최대의 방해꾼은 바로 내 안에 있다. 이기심, 욕심이 최대의 적이요, 방해꾼이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다. 주님과의 깊은 은밀한 대화를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원하는 상태까지 나아가야 한다. 기도의 목적은 자기의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찾아 가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떼를 쓰면 경우에 따라 부모님이 들어 준다. 신앙이 어릴 때는 잘 모르니까 기도를 잘 못해도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다. 그러나 장성하면 대화하기를 원하신다. 자기 생각, 자기 욕심은 버려라! 세미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3)영적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 말은 기도한 뒤 자신이 기도한 것이 응답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한 후에 잊어버린다. 또 어떤 경우에는 기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사건이 발생하므로 기도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서 엡4:32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를 했다.
엡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더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아! 아직 때가 안됐어. 내 마음에 저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 주기까지 기도 안 할거야.” - 사단이 유혹하고 방해하는 소리.

분명히 말씀으로 받았으면 이뤄주실 것을 믿고 계속적인 기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만약 포기하게 된다면 모든 일에 자기의 생각이 장애물이 되어서 쉽게 포기하게 될 것이다.

4)하나님의 침묵에 대하여 기다릴 것
나는 기도책을 가지고 있다. 기도제목 중에서 오랜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응답지 않으시고 침묵하는 제목들이 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다. 혹 내 자신이 기도의 응답에 대해 장애물이 있지 않나 자신을 점검하기도 한다. 그래도 까닭없이 응답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답답하고 무관심해지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응답이 늦어지는데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요11장의 주제는 나사로 부활이다.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급한 전갈을 보냈음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에는 이미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시신에서 썩는 냄새까지 났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하여 원망했다. 주변 사람들도 늦게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부활이라는 놀라운 일을 무리들에게 보여 주셨다.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일을 계획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하여 두 가지로 반응할 수 있다.
1.의기소침해지고 죄책감을 느끼고 소외감에 빠진다.
2.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기대하는 것이다.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는 성도는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해야 한다. 조급한 생각과 행동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히12:16-17,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나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 그 분 앞에서 너무 자기 주장, 욕심을 관철시키려 말자.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나를 반드시 복되게 하실 것이며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신뢰의 마음을 가질 때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오늘은 성경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대하여 증거했다. 바라기는 듣고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면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고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를 바란다. 종교적인 책임으로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만남으로 기도시간을 만들라.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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