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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기쁘시게 사용하는 사람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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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4일에 탤런트 차인표 신애라 부부가 한살배기 여자아이를 입양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두 사람은 한 살 된 여자 아이를 입양했는데 아이의 이름은 예수님의 은혜라는 뜻으로 ‘예은’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아이를 키워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어린아이를 맡아서 키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하나님은 예수님의 양육자로서 요셉과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얼마나 많은 좋은 가정들이 있었겠습니까? 능력 있고, 재력 있고, 권세가 있는 많은 가정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의 권력을 가지지도 못하고, 종교적으로도 제사장 집안도 아니고, 물질적으로도 가난한 요셉의 집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어린 예수님의 양육자로 삼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좋은 외적인 조건들을 모두 버리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요셉의 가정을 선택하신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양육자가 된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실로 오늘 말씀을 통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요셉을 보면 19절의 말씀처럼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이보게 친구, 내가 자네를 아끼고 사랑하고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자네와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네.” 요셉은 “그럴 리가 없네! 마리아는 아주 정결하고 깨끗한 여인이라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한 두 사람이 하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이 정말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확인되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는 마리아를 정결한 여인으로 믿음이 좋은 여인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임신했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그의 마음은 아마도 황당함과 더불어 마음에서 치솟아 오르는 배신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순결하던 마리아가 그렇게 청순하고 깨끗한 마리아가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그녀가 나를 배반하고 딴 남자와 잠자리를 갖이 했다니 하는 생각으로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율법대로 하면 정혼한 약혼녀 마리아는 사람들 앞에 내 세워져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끔찍한 죽음을 당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녀와 결혼해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식을 키울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오랜 시간 밤잠을 자지 못하면서 고민하였고, 또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 이제 이 정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 조용히 마무리해서 그녀도 살리고, 그녀가 좋아 하는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도록 내가 길을 열어 주자!”

  그가 이런 결론에 도달히고 막 실행하려는 때에 그의 꿈에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아이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이제 마리아와의 조용히 모든 것을 끝내려고 결심한 순간 주님의 천사는 말하기를 마리아를“네 아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주면서 “두려워말고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천사의 말은 내가 행동하려고 했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말이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하면서 깊은 생각 가운데 내린 결론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신의 고집대로 밀고 나가겠습니까? 아니면, 순종하고 희생하면서 따르겠습니까?

1:24절에 말씀에 보니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다”라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말씀을 듣자마자 머뭇 거리지도 않고 바로 실천하며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내가 착하고 선하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의로움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양육자 요셉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와 입장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러하면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귀한 도구였습니다. 이처럼 요셉의 가장 위대한 점은 바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말씀에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고,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순종을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고, 이러한 순종이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의인들의 공통적인 성품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말씀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을 성경은 무당과 우상숭배의 짓거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주 간단한 진리를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복을 받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어떤 복을 받습니까? 신명기 28장에 보면 민족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몸의 소생인 자식들이 복을 받고,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영원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자신에게 불합리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없고 자신이 감당한 짐이 있지만 순종하면 하나님은 그에게 큰 복을 주시고, 의인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자로 보냄을 받은 주의 종에게 순종하는 믿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기쁘게 사용하신 요셉은 남의 죄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19절에는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탕자는 죄를 지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그의 모든 죄를 덮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우리의 죄를 덮어 주고 감춰주고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덮어 주고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저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내려 오셔서 “내가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가지고 너희를 저주하고 심판하노라”고 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는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열 두 영도 더 되는 천군과 천사들을 보내어 나를 못박는 이 원수들의 영혼들을 갈기갈기 찟어 놓아 주소서”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간음 중에 붙들린 여인의 죄를 덮어 주셨고, 창녀였던 마리아의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 주었듯이 덮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 지성소라는 곳에 가서 피를 뿌리고 백성의 죄를 속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 지성소는 법궤를 덮는 뚜껑을 말하는데 바로 이 뚜껑을 지성소라고 불렸습니다. 지성소라는 말은 “덮다 또는 용서하다. 지워버리다”라는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과거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씩 소와 양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하나님을 만났던 지성소는 죄를 덮어 주는 장소요 죄를 지워버리는 장소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피를 통해 우리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으시고 지워버리시며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시간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는 것을 믿고, “나는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고백만하면 여러분은 모든 죄에서 벗어나고,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씻어 주시고, 덮어 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요셉이 성경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기록되고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 주시고, 용서해주시고 지워 버리시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요셉이 마리아의 죄를 덮어 주고 용서하고 씻어 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덮어 주고, 용서하고 가려 주고 지워 버리는 사람을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의 허물과 약점이나 실수를 덮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습니다. 몸에 열이 나서 그런지 벌거벗고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둘째 아들이었던 함이 아버지가 벌고 벗고 자는 것을 보고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 하는 것인데 형제들에게 말하고, 며느리에게 말하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뒷걸음 쳐 와서 옷으로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 주었습니다. 가려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어나 이 사실을 알고 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함은 저주를 받았고,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 이 사람은 복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요셉이 의롭게 된 것은 그가 감정에 의지하지 않고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0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요셉은 자신의 정혼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당황했지만 그는 자신 속에서 솟아오르는 분노와 격앙된 마음으로 감정적으로 충동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율법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충분히 율법에 따라 마리아를 처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사회적 배경에서는 아마도 가장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요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셉은 사회적인 풍습과 제도 그리고 율법의 규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했던 정혼자의 엄청난 배반에도 불구하고, 자신 속에서 불타오르는 증오와 미움이라는 격한 감정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끊어 오르는 감정을 억제해 가면서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마리아의 생명을 살리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시대에 마리아와 같은 사건은 재판 과정 없이 동네 사람들에게 끌려가 돌에 맞아 죽어도 누구도 항변할 수 없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녀에게 결코 정죄라는 율법의 잣대나 굴레를 씌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율법적으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지만 그는 율법이 아닌 사랑과 희생의 정신으로 그녀를 구할 방법을 냉철하게 계속해서 생각하고 가장 좋은 길을 지혜롭게 선택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닌 깊은 생각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혜롭게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레위와 시므온이 그들의 누이 다말이 세겜 사람에게 강간을 당한 후에 일어났던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레위는 너무나도 분노에 찬 나머지 세겜 족속을 잔인하게 칼로 난도질하여 죽였습니다. 그들의 분노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라”(창49:7). 그들의 분노는 인간적으로 볼 때 누가 보아도 할 말이 있는 의로운 분노였습니다. 동생이 강간을 당한 것을 누가 참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감정에 의해 폭발한 분노의 복수를 기뻐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의 분노로 인해 그들은 저주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욥기서 5:2절에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잠언서 12:16절에는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고 했습니다. 분노로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분노를 절제하지 못한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집어 던져 말씀 판을 깬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의 죄악을 보고 분노하여 하나님은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으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반석을 두 번이나 지팡이로 두드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결국 모세조차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것이 감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면 안 됩니다. 요셉처럼 보다 신중하고 깊이 있게 앞뒤를 깊이 생각해 보고, 재어 가면서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요셉은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의 죄를 덮어 주고, 그녀를 살리기 위해 깊이 생각하는 요셉을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이 요셉을 선택하고, 그에게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양육자와 멘토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생각하는 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사용하시는 의로운 사람은 절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24절과 25절에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요셉은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피가 뜨거운 결혼 정년기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혼자를 자신의 집에 데려와 함께 동거했지만 절대적으로 동침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옆에 아리따운 여인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잠자리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성들에게 있어서 성적인 어떤 문제가 있지 않는 한 생리적으로 이겨내기 참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않아야 합니다. 요셉은 오직 천사가 전해 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아이가 태어 날 때까지 육신의 정욕을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어느 시대나 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정욕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절제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야 말로 의로운 사람이 갖추어야할 영적인 도구요 무기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7절에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라 절제하지 못하는 인생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사용하시는 도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성령을 거스리게 되고, 결국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수 없는 부패한 그릇이 되어,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5-8절을 보겠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원합니까? 하나님께서 쓰시는 귀한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육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축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육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8:12-14절을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육체의 정욕의 생각을 이기고 하나님이 기쁘게 사용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용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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