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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착하고 충성된 자의 신앙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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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유명과학자들 간에 일어나고 있는 알 수 없는 일들로 국민들이 조롱당하고 있는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소위<줄기세포>논쟁입니다. 서울대학교[황우석 교수]와 미즈메디 병원[노성일 이사장]간의 줄기세포 존재여부와 실수에 대한 책임전가 설전을 들어보면 도무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차피 밝혀지겠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며 서로에게 책임 떠넘기기 작태를 보면서 우리들은 찹찹해합니다.

인간세상의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그 누구도 결코 혼자서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할 수도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답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게 되는데 그 모임을 일러서 혈연 공동체, 지연 공동체, 학연 공동체라고 하여 이것들을 중시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더 중요시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공동체라고 하는 모임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각자의 책임을 느끼며, 주어진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공동체란 묘해서 똑같은 마음과 한 생각을 가지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희한한 일도 생기고 사건도 사고도 일어나는 세상을 보노라면 별의 별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걸 실감합니다. 이 다양한 사람들 중에는 먼저<탓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사에 다른 사람 탓하기를 좋아하면서 결국하고자하는 이야기는 자기는 모든 일의 희생자라고 떠듭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 마디로 책임회피에 능숙한 사람들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사는 이사회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비난하며, 경영자와 노동자는 서로를 비난합니다. 교사들은 교육 행정가를 비난하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부를 비난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비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비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두 번째는<변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는 않지만 모든 일에 변명하기를 즐겨합니다. 그 변명 하나로 어떤 실패나 실수도, 어떤 무책임도 정당화시키는데 익숙하고 이걸 즐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공동체를 망칩니다.

그런가하면 세 번째는 매사에<책임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인생의 성공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실패마저도 늘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때 실패도 다시 성공으로 바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일들을 자신이 완벽하게 책임 질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조절하며 살아갑니다. 미리 성공할 수 있는 일만을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면 책임을 다하여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위대한 자유란<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 뒤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성경 히 11:24-25의 내용을 보면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을 잠시 잠깐 죄악의 낙을 누리는 일이라고 여겨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 생각하는 믿음이 있었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공주의 아들 대접 받는 것이 좋습니까? 종살이 하는 것이 좋습니까? 물어보나마나한 비교가 안 되는 조건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책임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없이 책임을 기꺼이 수용하려는 것은 그만큼 성숙 하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몇 가지 정해진 카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성별, 부모, 환경 등 몇 가지가 조건 지워집니다. 그러나 이 카드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버릇처럼 남을 탓하는 사람과 매사에 변명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실패자라고 봐도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을 선택하여 받아들이고 그 일에 대한 분명한 책임감을 가지는 사람은 성공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탠포드 대학>하면 공부를 아주 잘하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부잣집 학생들이 가는 명문대학으로 유명합니다. 이 학교에서 한 학생이 수학 시간에 그만 지각을 하였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이 막 나간 후에 칠판에는 두 개의 문제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그것이 숙제인 줄 알고 집에 돌아와 열심히 그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두 문제 중의 한 문제는 풀 수 있었지만 다른 문제는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수에게 찾아가 솔직하게“교수님, 어제 숙제 내주신 것 가운데 한 문제는 풀었는데, 하나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담당교수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칠판에 적힌 두 문제는 숙제가 아니라[아인슈타인]도 풀지 못한 문제를 소개한 것인데 그 학생이 한 문제를 풀었기 때문입니다. 그 학생은 당연히 교수가 숙제로 내 준 것이고 그것을 풀어야하는 것은 학생으로서의 책임이라 생각했고 그 책임에 밤을 새워 천재 수학자도 풀지 못했던 문제를 풀어냈습니다. 책임은 또 다른 능력을 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외국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주인이 돌아왔고 맡겨둔 달란트에 대한 결산을 가졌습니다. 그 때에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과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장사를 해서 각각 두 배를 남겨서 칭찬을 들었던 반면에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이익을 남긴 것 없이 주인에게 내보였다가 책망을 받은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물론 하나님을 상징하고 종들은 오늘 우리들을 의미합니다. 이 상관관계를 염두에 두고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비유가 중요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얼마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받은 것을<어떻게 관리 하느냐>입니다. 즉 책임에 대한 문제요, 능력에 대한 문제입니다. 받은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것을 맡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분명히 기억해야할 몇 가지는 내 것은 없다는 것과 다만 맡은 바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비유에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이 말씀의 중심이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달란트를 맡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입니다. 모든 것을 주인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합니다. 주인이 그들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의 마음에 들었느냐 입니다. 잘 보세요.‘얼마를 남겼느냐?’에 문제의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즉 남긴 액수가“다섯 달란트냐? 두 달란트냐?”가 아니라“남겼느냐? 안 남겼느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칭찬한 것은 많이 남겼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에 상관없이 남긴 사람이면 똑같이 칭찬하고 있습니다. 남겼으면 됐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한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만 남겼어도 되는 것이요, 만약에 반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있었다면 반 달란트만 남겼어도 되는 것입니다. 남겼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무엇을 보고자함입니까? 얼마를 남겼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얼마나 충성했느냐에 그 의미가 있음을 말합니다.

자, 그러면 이<충성>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믿음>이라고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믿음>도 기회요,<충성>도 하나의 기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어진 기회를 잘 포착해서 그 기회에 충성을 다해야합니다. 오늘 비유에서 주인이 달란트를 주었다는 것은 기회입니다. 충성되게 하지 않으면 이 기회를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잘 사용하여 그 안에서 충성을 다해 나갈 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잘못 사용하면 주어졌던 기회마저도 거두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28-29절 말씀 아닙니까?“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재벌들을 옹호하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자를 높이시고 가난한 자를 멸시하시는 이야기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에 대한 열망이 높을수록 하나님께서 더욱 채워 주시는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달란트로 주셔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게을러빠졌습니다. 건강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너는 건강이 필요 없나 보구나!”하고 거두어 가십니다. 계속 게으름 피우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아주 두 다리 쭉 뻗고 편하게 쉬어라”하시면 어떡합니까? 건강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주어졌고, 지혜가 주어졌고, 여러 가지 또 다른 기회들이 주어졌는데 이것들을 바로 쓰지 못한다면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 봅시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을 믿었습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주신 능력을 믿었습니다. 많건 적건 그것이 나를 향한 주인의 뜻인 줄 알아 믿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거니와 무슨 핑계가 그리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최종적인 책임을 주인에게로 떠넘기는 어처구니없는 행동까지 합니다. 잘 보십시오. 이 사람이 얼마나 큰 실수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인이 한 달란트만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 이 능력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시간도 맡겨 주시고, 돈도 맡겨 주시고, 재능도 맡겨 주시고, 은사도 맡겨 주시고, 또 우리의 몸도 맡겨 주시고, 우리의 목숨, 인생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갖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맡겨 주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 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돈을 가지고 어떻게 쓰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재능과 달란트를 갖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달란트, 탁월한 재능을 갖고도 별로 볼 품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아주 적은 재능을 갖고도 그것을 아주 유익하게 이웃들에게 기쁨을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책임감의 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이라는 기회를 주셨는데 한달란트 맡은 종처럼 전혀 일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남긴바 없이 주인에게 책망을 듣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곧 한해를 마감합니다. 올 한 해도 시작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언가를 맡겼는데 그 맡긴 것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불충하여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회계하실 날이 멀지 않았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고 후회하지 말고“착하고 충성 된 종”의 모습으로  믿음에 믿음을 더하는 책임감 있는 신앙을 끝까지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철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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