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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도록 (마 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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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며칠 전부터 계속되는 우리나라의 톱 뉴스는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 진위 공방입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하듯이, 하루 아침에 황우석 교수의 논문에 중대 실수가 발견되어 세계적 과학학술지인 사이언스에 실린 그의 논문을 취소하기로 요청하는 사태에까지 나아갔습니다. 온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황우석 교수인지라, 국민들의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서울대 석좌교수, 세계줄기세포허브소장, 세계적인 과학자, 연간 수백억의 국고지원을 받는 국보급 영웅, 이 모든 타이틀을 무색케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건 단지 황교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 아픔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하여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인간의 명성과 행복은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고 사라질 수 있다.
- 인간은 그 누구나 약하고 흠이 있다.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어떤 학문적 성과나 부의 창출보다도 윤리 도덕과 양심이 더 중요하다.
-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 겸손해야 한다.

2.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으로, 아주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 상태였습니다. 유대의 헤롯왕은 로마 황제에게 뇌물을 주고 아부하여 왕위를 받아와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로마황제가 파송한 총독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이로 인해 서민들의 삶은 몹시 가난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시대에 요한이 태어났고, 몇 개월 후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요한은 성인이 되어 사막으로 나가서 금욕생활을 하며,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회개의 표시로 요단강 가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가 외친 천국은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던 중, 헤롯왕이 자기 동생의 부인을 데려와서 아내로 삼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왕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고 바른 말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부터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는데,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와 꼭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한편, 감옥에 갇혀 지내는 세례요한은 바깥 세상이 궁금했습니다. 제자들로부터 자기가 감옥에 갇힌 이후로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갈릴리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이 많이 예수님을 따랐고, 그가 병을 고치기도 하고, 탁월하게 말씀을 가르치기도 한다는 정도입니다.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뒤에 곧 오실 메시야는 악인을 심판하러 오신다고 외쳤습니다.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세례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7,10,12) 라고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판은커녕 도리어 구원을, 징벌은커녕 오히려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있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오시면, 유대 땅에서 로마군대를 몰아낼 것이고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종교권력자들은 메시아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은 몹시 답답했습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불안했는지 모릅니다. 혼돈스럽습니다. 신앙적 갈등이 일어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우리가 기다려온 메시아가 당신이 맞습니까? 아닙니까?
이 말의 뉘앙스는 당신은 우리가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세례 베푸는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속자요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들어보니, 그의 믿음이 헷갈리는 것입니다.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대림절 마지막 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 우리는 어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세례요한처럼, 세상을 뒤바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올해 성탄절에도 예수님에 대한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십니까?
  혹시, 우리의 고민과 문제를 해결해주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치적인 안정을 가져주고, 경제적인 침체를 벗어나게 해주시는 주님, 세상에 다시는 가난한 사람들이 없이 모두가 잘사는 세상으로 만들어주실 주님, 병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모두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 태어나실 때에도, 유대인들은 그런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정치 경제적 지형을 바꿀 메시아, 로마압제에서 해방시킬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 메시아는 왕궁이나 호텔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재벌 회장의 아들로 태어나야 합니다. 서울 강남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짐승 우리인 마굿간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시골 촌구석에서 태어나셨고 자라나셨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고 도리어 십자가에 처형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기대해온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고, 신분이 상승하고,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런 우리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예수 믿는 게 답답하고 때로는 신앙이 흔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4.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대한 그릇된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예전에 가졌던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답답하지만, 너무 염려하지는 마십시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 7-11절을 보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답답해하고 메시아에 대한 회의가 든 세례요한을 아주 위대한 사람으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세례요한은 환경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일시적으로 마음이 약간 흔들렸는지는 모르나, 그의 신앙은 변치 않다는 것입니다. 굳센 신앙인, 충성스런 신앙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세례요한은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사막에 있는 야생꿀과 메뚜기를 먹고 살았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누추하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어떤 왕보다도 훌륭하고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고 하면서, 세례요한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까지 칭찬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동일한 시각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는 때로는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하고, 가진 게 없어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 힘이 없는 사람, 아무 것도 아닌 사람같이 보입니다. 그래도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여러분은 주님 보시기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사랑스런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 보다 크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은 아직 이 세상에 있는 사람입니다. 아직 실수가 있고, 흠이 있고, 사랑이 부족하고, 때로 믿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에 비하면 그의 사랑은 완벽하고, 기쁨이 늘 충만하고, 늘 평안하고, 늘 만족하고, 늘 행복합니다. 이런 천국에서 누리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만족이 여러분 안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5. 그런데, 이런 천국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 12절은 우리에게 좀 난해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말씀을 어떤 분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라고요. 그러나, 이 본문을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것과는 좀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RSV)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에 의해 수난을 당해왔고, 힘있는 사람이 폭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 황제에 의해, 헤롯 왕에 의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같은 종교 권력자들의 폭력에 의해 수난당해 왔다고요. 힘있고 권력있고 가진 자들이 폭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간다고요. 세례요한이 그랬습니다. 헤롯왕의 폭력에 의해 요한은 자유를 구속당했습니다. 정의가 외면당했습니다. 평화가 사라졌습니다. 요한이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헤롯왕에 의해 빼앗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천국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외적인 환경으로만 볼 때, 헤롯의 권력에 천국을 빼앗긴 것처럼 보일른지 모르나, 세례요한의 마음은 전혀 헤롯의 권력과 폭력에 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참 자유를 누렸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여도,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들이 우리 마음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악조건들이, 불의한 현실들이 우리의 마음의 천국을 빼앗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2차대전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수년간 수감되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가 쓴 책 <그래도 나는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자라 할지라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가슴 깊이 간직할 수만 있다면, 비록 짧은 순간에 그칠지라도 구원의 빛이 찾아든다는 걸 뼈저리게 이해한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수용소에 갇혀 아무 뜻도 펼칠 수 없는 처지에서도, 올곧게 고통을 견뎌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전무한 상황에서도, 사람은 가슴 속에 간직된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그윽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강제수용소가 다른 건 다 강탈할 수 있어도 인간이 가진 마지막 자유, 즉 어떤 주어진 상 황하에서 또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자유만큼은 건드릴 수 없다.”
“인간의 정신적 자유는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엮어나갈 수 있는 기회는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빅터 프랭클, 그래도 나는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72-73, 117,119)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께 주시는 오늘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내 안에 있는 평안과 기쁨, 자유와 만족을 빼앗기지 말라.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잊어버리지 말라.

“내 맘 속에 있는 참된 이 평화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네
주님은 내 맘에 구주 되시었네.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 오직 주께만 구원있네.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

류시화씨가 엮은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여러분 주위 사람들에게, 환경에 얽매이지 말라, 자유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에 메이지 말고, 전능하신 주님께 메인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에 메이지 말고, 환경을 뛰어넘으시는 주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환경에서도 천국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6. 천국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서울 루미나리에 빛의 축제같이 찬란하지 않습니다. 
4-5절에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해주신 말씀에서 주님이 주시는 천국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여기에서 예수님이 이루시는 천국의 모습을 세 가지 찾을 수 있습니다.
천국은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천국은 우주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지엽적인 것에서 온다.
천국은 힘있는 자들보다는 약하고 소외된 자들이 더 잘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천국이 요즘같이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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