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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그 분이 오십니다 (마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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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성탄절기가 되면 이렇게 말합니다.
성탄은 기쁨의 날입니다. 그래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고 찬양하며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슬픔과 엄청난 고통이 있습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세상에 보냅니다. 그것도 유학을 보내거나 군대 보는 거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이기 위해 보내는 겁니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들의 마음입니다. 영광의 자리, 찬양 받을 자리를 마다하고 세상에 가야 합니다. 그것도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죽은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기 위해 가야 합니다. 그때 그 아들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왕이 태어났다고 두 살 이하의 많은 어린아이들이 죽임을 당했고, 그래서 그 어머니의 울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성탄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그 뒤에는 그런 슬픔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냥 즐겁고 기뻐하기만 하는 그런 날이 아닙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은 그분을 향한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
이것은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의 찬송입니다.

사람 사는 거, 속상해서 늘 한숨을 쉽니다. 뭔가 마음에 안 들어서 늘 불평하고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렇기에 찬송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힘들 때 찬송하면 새 힘을 주십니다. 즐거울 때 찬송하면 그 기쁨과 감사는 몇 배가 됩니다.
더욱이 메시아 오심을 찬송은 “그분이 오신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 모든 계시를 증언하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부터 시작된 성경이 “마라나타” “오십시오, 주 예수님”으로 마감합니다.
“그분이 오신다.”는 겁니다.
고난과 절망 가운데 있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들려오는 소식, “그분이 오신다.” 죄악 속에서 영원한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사람들의 귓가에 들려오는 소식, “그분이 오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사들의 찬송은 그냥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그 찬송은 희망의 찬송이었습니다. 죄와 죽음, 그 절망 가운데 들려지는 희마의 찬송이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멸망에 들려지는 구원의 찬송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부르는 천사와 그 찬송을 듣는 이들이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때, 영국의 국민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때, 영국의 왕실과 윈스턴 처칠 수상은 영국 교회의 요청에 의해서 온 교회에서 같은 시각에 일제히 종을 울리도록 했습니다. 그 종은 전쟁 중에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희망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희망의 종이 울리기 전에 영국왕실은 영국 성공회의 주교인 윌리엄 템플에게 전 국민에게 보내는 설교 방송을 의뢰했습니다. 윌리엄 템플 주교는 방송을 통해 역사적인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대영제국 국민 여러분! 잠시 후 이 땅의 모든 교회에서는 종이 울릴 것입니다. 종소리를 듣거든 모두 교회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역사의 주인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입니다.”
그렇게 교회의 종이 울렸고, 온 국민은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미래에 대해 특히 전쟁에 대해 불안과 공포가 있었지만 그들을 향해 울리는 종소리는 평소의 종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종소리를 울리는 교회도, 그 종소리를 듣는 온 국민들이 가슴에 엄청난 감격과 기쁨 그리고 희망이 넘쳐 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드시지요? 그럴 때마다 외치십시오. “그분이 오신다.”
절망 할 때 있지요? 그럴 때마다 외치십시오. “그분이 오신다.”
육신의 아픔, 자녀의 문제 등등. 그럴 때마다 외치십시오. “그분이 오신다.”
더욱이 그분은 오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이미 여러분 가운데 와 계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분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뭐가 은혜인 줄 아십니까?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심이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 진정한 행복이 무언지 모릅니다.
행복을 영어로 happin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happen 이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happen’ 그 뜻은 ‘우연히 발생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운이 좋으면 행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목표를 운에다 맞길 수 있습니까? 우연히 일이 잘 되고, 우연히 돈이 벌리고, 우연히 뭐가 되고, 그래야 합니까? 대부분 많은 사람들, “내가 못 사는 건 운이 없어서”, “뭐가 잘 안 풀려서 그렇다고” 합니다.
산상 수훈의 “복 있는 자” 할 때 복은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 ‘blessing’이란 단어는 본래 bleed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bleed’ 그 말은 “피 흘리다”는 뜻입니다. 고대 앵글로색슨족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축복으로 간주했습니다.
성경 특히 구약은 피의 제사를 언급합니다. 그 피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희생제물 곧 피 흘리시는 어린양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께서 오셨고, 나와 함께 계시는 것. 그것이 곧 행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그분이 함께 계심에도 늘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며 삽니다.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곳입니다.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눈물을 뿌리면서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왜 이런 일을 허용하고 계십니까?” 그들의 피 맺힌 절규는 연합군이 독일을 물리쳐 수용소를 탈환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 연합군이 탈환한 수용소를 점검하러 들어갔습니다. 점검하던 연합군 병사 중 한 명이, 한쪽 벽 후미진 곳에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인 것 같은 그 글에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한 유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니? 그 연합군 병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또 하나의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문제는 “나 같은 게 뭐” 그런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나 같이 못생긴 사람을, 나 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을, 나 같이 돈도 없는 사람을, 나 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속지 마세요. 그것은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탄절은 그냥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날입니다
“못 났다고? 아니다. 너를 사랑 한단다.”
“못 배웠다고? 아니다. 난 너를 사랑 한단다.”
“돈 없다고? 가난하다고? 아니다. 나는 너를 사랑 한단다.”
이 주님의 음성 들으시기 바랍니다.
보세요. 성탄의 소식을 누가 들었어요? 한 밤에도 양을 쳐야 하는 목동들이 들었습니다.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태어나셨다고요? 베들레헴입니다.
미가 5: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베들레헴.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메시야가 탄생하신다는 겁니다. 에브라다는 ‘떡집’을 뜻하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음’이란 의미로 풍요로움을 나타내지만, 이름의 뜻과는 달리 팔레스틴에서는 보잘 것 없는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여기 “작을지라도”는, 크기가 작은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천하고 보잘것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천하고 보잘것없는 곳, 그러나 바로 거기서 메시아가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상상이나 되세요? 이 지구상 얼마나 좋은 땅이 많겠어요. 얼마나 좋은 도시 또한 많겠어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고을을 하나님께서 메시아 탄생지로 삼으셨을까요?
그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비천한 자를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2,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 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높이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베들레헴은 천하고 보잘 것 없지만 메시아이신 만왕의 왕이 오신 곳입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이 아주 열악한 조건이지만, 전혀 희망이 없이 보여도, 세상 사람들이 천하다고 쳐다보지 않아도, 보잘 것 없는 일을 한다 하여 무시당해도,
메시아이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메시아이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메시아이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여러분에게 구원과 복을 주셨습니다.
메시아이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비천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높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은 우리에게 희망이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하고 보잘것없는 베들레헴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 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15에, “천사들이 목자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 간 뒤에 목자들이 서로 말하기를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바 일어난 그 일을 봅시다.” 하였습니다.
천하고 보잘 것 없는 고을, 베들레헴에서 목자들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보았습니다. 왕궁이 아니라,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헌 마구간에서 말입니다. 그분은 힘없고, 가냘픈 아기로 태어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믿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왕궁에서 태어나신 것 아닙니다. 천하고 보잘것없는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천사의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씨로, 다윗이 살던 동네 베들레헴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신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오만하고 욕심투성이인 인간들에게 몸소 겸손함을 보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를 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병들고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고 구원하고자 하는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가장 미천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방법이나 힘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 인류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너무도 세속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합니다. 세속적인 방법, 세속적인 수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성실한 순종과 기도와 믿음과 헌신생활, 그리고 인내와 사랑의 능력을 불신하고, 세상적인 힘과 능력을 더 과시합니다. “기도해도 소용없어. 돈이 있어야 해” 이 딴 소리 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동네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이십니다.
인간의 편견. 요한복음 1:43이하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습니다. “모세가 율법 책에 기록하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되 묻습니다. “나사렛인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소?”
나사렛. 그 촌 동네. 보잘 것 없는 촌 동네. “그런 동네에서 무슨 메시야?” 그런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초라한 말구유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약속된 메시야이며, 그분을 통해 의의 최후 승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들레헴. 그곳은 아주 작은, 그렇게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동네이지만, 그곳에 기쁜 소식이 있었습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 나신 그리스도 주님. 오늘도 베들레헴에 오셨던 주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심령 속으로 오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이미 세상의 것으로 채워졌거나, “나 같이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 뭘” 그렇게 여겨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 사람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죄인이며 멸망의 자식입니다. 지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여러분의 주님으로 영접하십시오.
천사들이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은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빨리 가서 아기 예수를 뵈었습니다. 기쁨의 좋은 소식, 곧 예수께 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 기쁨의 좋은 소식의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내일 가 보자.” 도 아니고, 심지어 “날이 밝으면 가자.”도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무얼 망설 입니까?
지금 그분을 영접하십시오.
“오고 계시는 그분”, “이미 내 앞에 오신 그분”
그분이 여러분의 주님이요 구세주이심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영접하십시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사시는 삶으로 바꾸어지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더 이상 작은 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심으로 베들레헴이 작은 고을, 곧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고을이 아니라 메시야가 태어난 위대한 고을이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여러분은, 이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일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작지만 작지 아니한 고을이 베들레헴입니다.
작지만 작지 아니한 사건이 성탄입니다.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정말 비천하고 보잘 것 없지만 그분이 세상에 구원을 주실 메시아요,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믿는 우리는 작지만, 비천하고 보잘 것 없지만, 더 이상 작지 아니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아멘
세상은 자꾸만 커지길 좋아 합니다. 높아지고 많이 가지는 것이 성공이요,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섬기기보다 섬김 받는 자리, 다스림을 받기보다 다스리는 자리, 종 보다는 으뜸이 되는 자리에 있는 것이 또한 성공이라, 행복이라 생각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고, 오히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대속 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스로를 높여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교만해져서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낮아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요, 낮아짐으로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이 무엇입니까?
작지만 더 이상 작지 아니함이 성탄절입니다.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베들레헴에 메시야가 나셨습니다. 한 밤 중에도 양을 칠 수밖에 없는 목자들에게 온 세상에 비칠 큰 기쁨 소식이 가장 먼저 전해졌습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갓난아기 그래서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그 아기가 온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표적입니다.
  그 모든 일들은 작지만 비천하고 보잘 것 없지만 더 이상 작지 않습니다. 더 이상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예수를 영접 하므로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받은 여러분!
여러분 역시 더 이상 작은 자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자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께서 비천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높여 주셨습니다.
어디서든 당당 하십시오.
그리고 자신 있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작지만 결코 작은 자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일꾼 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오십니다.
이미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요한계시록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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