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여호와 이레 (욘 1:17)

  • 잡초 잡초
  • 539
  • 0

첨부 1


창세기 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무척 사랑하셨고 누구보다도 그를 축복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의인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삶을 보고 평가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15:6) 물론 아브라함의 삶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더욱 진실하거나 경건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는 믿음의 가정이었는데 자녀가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일부러 자녀를 낳지 않는 가정도 많아졌지만, 과거에는 자녀를 얻는 것은 큰 축복으로 여기던 때였기에 더욱 그들의 안타까움은 더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누구도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의 마음 고생은 얼마나 컸을지를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자녀가 없다는 핸디캡 때문에 그의 신앙생활이나 사회생활이 왜곡되거나 부족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거주하는 천막 앞으로 지나가는 세 명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좋아했던 아브라함으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더러워진 발을 씻을 물도 떠 주었고 마실 물도 담아 주었습니다.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본 아브라함 부부는 그들을 강건하여 하루밤을 쉬고 가도록 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달려나가 영접하였고 (18:2), 속히 고운 가루 를 가져다가 떡을 만들었고 (18:6), 급히 좋은 송아지를 잡아다가 요리를 하였다 (18:7)고 하였습니다.

중근동 지역 대부분이 광야이기에 모래나 먼지가 무릎까지 가득 쌓이기 마련인 나그네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물을 떠 준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는 헌신이었습니다. 광야에서는 생명보다 귀한 것이 물입니다. 비가 자주 오지않는 유대 남부지역에서는 그나마 새벽에 내리는 이슬을 받아 두었다가 식수로 쓸만큼 물은 귀한 것이었기에 그들의 헌신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우물이 재산 중 가장 소중한 재산이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세사람의 나그네에게 극진히 대접을 하자 감동한 그들은 아내 사라를 불러 '내년 이맘 때에 아들이 있으리라'는 엄청난 축복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으면서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자녀를 얻는 낙이 있으리요"라고 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 천사들을 통하여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은총을 베풀어 주신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18:14)는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할렐루야!

길을 떠나려던 세 명의 나그네들이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면서 그들은 놀랍게도 그들의 사명을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여호와의 사자들로서 죄악이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는 길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소식을 듣고서 너무나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조카 롯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서로 양떼가 많아지면서 분가할 때 조카인 롯에서 먼저 선택권을 주자 물과 초지가 풍부한 그곳을 선택하여 이주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주의 사자들에게 간청합니다. 그곳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시작한 숫자는 45명, 40명, 30명, 20명, 나중에는 10명까지 내려갔지만 용서의 하나님께서는 사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 의인 10명만 있어도 내가 그 성을 용서하리라..."하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그 수도 부족하였고 결국 심판을 받았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나서 하나님게서는 약속하신대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에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름을 이삭이라 했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습다는 말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소은입니다. 저희 가정은 쌍동이를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습다며 둘째를 소은이라고 지었습니다만 결국 이삭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은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흔히 우리가 너무 좋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하는데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 부목사님 중에 나길석목사님은 부친께서 환갑진갑 다 지나고 나서 낳으셨다고 해요. 그러니 얼마나 사랑만 받고 자랐겠습니까?

그런데 어느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이유는 그가 아들 이삭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을 축복으로 주었는데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안될 일이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시험문제를 제시하시고 그것을 풀어보라는 것입니다. 시험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세계문화유산 1호라고 하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파르테논신전은 고대 아테네의 도시국가 중심에 있던 신전입니다. 2002년 아테네 올림픽 때에는 그곳이 올림픽 중계시 메인화면으로 떴어요. 조명을 해 놓아 얼마나 아름답게 비취던지 사람들은 그곳이 무슨 박물관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곳은 여신상들을 모시고 있는 신전으로서 남자를 산 채로 잡아서 죽이는 제단이 있는 끔찍한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동쪽 에돔과 암몬 사람들도 몰록이라는 신을 섬겼는데, 그들도 산 채로 사람을 잡아바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신앙의 대상인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한 절대로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양 대신에 번제로 드리라는 있을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고뇌은 깊었습니다. 내가 신뢰하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명령을 하실 수 있는가? 그는 밤새도록 고민을 하다가 결국 아침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아들 이삭과 두 사환만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 모리아로 떠난줄로 믿습니다.

자, 그러면서 어떻게 했습니까? 아내 사라도 의논하지 않았어요. 아내 사라도 훌륭한 사람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아들을 양대신 죽이러 간다고 한다면 아내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늙어도 완전 잘 못 늙었구나. 치매에 걸렸구나. 뭐, 그렇게 아브라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슨 중요한 결단을 할 때 부부가 의논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 의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신앙적인 레벨이 비슷할 때 얘기가 가능합니다.

그게 다르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여보, 이번 추수감사절은 십일조 수준으로 해야지. 우리가 20만원 십일조 수준으로 합시다. 그랬을 때 남편이 아휴, 그래야지. 추수감사절은 십일조 수준으로 해야지. 이렇게 되면 좋은데, 이게 미쳤나. 이게. 20만원이면 구두가 한 켤렌데, 그러면서 그러면 이건 얘기 안 하만 못한 거예요. 믿음의 분량이 다를 때에는 의논의 대상이 되지 않아요.

종종 우리 여성들이 저한테 호소해요. 남편이 집사요, 권사임에도 불구하고, 수준이 맞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는 성도님들이 많아요. 저는 남자 입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부끄러워요.

남자가 그릇이 더 커야 하는데, 오히려 남자가 20만원 합시다. 여자가 살림도 어려운데, 10만원만 하지요. 이렇게 나와도 사실 될까 말깐데, 오히려 남자가 깎고 앉았으니 말이예요. 부끄럽지 않아요?

아브라함이 사라와 의논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먼 길을 가는 거예요. 이삭이 한참 가다 보니까 이상해요. 아버님, 제단에 양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번엔 장작도 있고, 다 있는데, 왜 양이 없지요?

그 때 아브라함이 뭐라 그랬어요. 네가 바로 양이야. 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 말을 했다가 혼비백산하고 도망갈 수도 있는 것이고, 백세 노인이 청소년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벌써 이삭이 청소년이 되었으면 아브라함은 100세를 훨씬 넘었을 것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을 거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지혜로운 대답이 그것입니다. 경솔하게 아무데서나 니가 양이야.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을 거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말도 지혜롭게 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깊은 고통이 있어요. 너무나 사랑하고, 너무나 큰 은혜의 아들이었는데 이 아들을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어요. 모리아산에 다 가서는 일꾼들을 거기다 쉬게하고, 장작을 이삭이 메고 가게 했습니다. 무너진 단을 다 수축하고, 장작을 펴 놓고,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이 칼을 빼서 이삭을 죽이려고 했을 때, 이삭에게 이야기 했겠지요. 이제 하나님께서 너를 양 대신에 올해의 제사는 너를 드리라고 한다. 괜찮겠니?

아들조차도 하나님이 원하실 때 드리겠다고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도 크지만, 그 아들이 하나님 원하시면 드려야지요. 아들 이삭의 믿음이 더 커 보였어요. 그냥 노인네 떠 밀치고, 가 버리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이 노인네가 정신이 나갔나? 완전히 실성을 했구만. 하면서 아들이 아버지를 밀치고 가버리면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그렇게 하세요.

그게 자기 주머니가 용돈 얼마 꺼내 놓는게 아니잖아요. 자기 생명을 내 놓는 일인데, 그런 면에 이삭의 믿음이 얼마나 귀한 믿음이요, 얼마나 그가 가정에서 말씀으로 양육을 받고, 신앙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훈련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삭을 칼로 죽이려고 했을 때, 제물로 드리려면 죽여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두 번 씩이나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칼을 대지 마라. 해하지 말아라.

얼마나 아브라함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예요. 우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이삭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줄 알았어. 네 마음을 이제 알았어. 언제? 네 아들을 드리라고 하는 이 위기,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는 이것보다 더 위기요, 더 큰 시련이 어디 있겠어요?

사람의 속마음을 언제 알 수 있어요? 파티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전부 정장입고, 예쁘게 화장하고, 기분 좋은 가운데 아휴, 반가와요. 건강하셨죠? 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년에도 사업 잘 되시기 바랍니다. 덕담하는 분위기에서는 상대방을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위기가 다가오고, 심각한 이해관계가 얽혀지면 자신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감추었던 자신의 모습이 나와요. 감추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하고, 겸손하고, 온유하다면 세상에 이 분은 진짜네. 우리 말로 하면 진국이네. 내가 그냥 볼 때 보다 훨씬 낫네. 뚝배기보다 장맛이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 여행을 해 보면서, 어떤 교회의 큰 행사를 치루어 가면서 운동해 가면서 부딪혀 가 보면서 그런 일을 겪어 가면서 우리가 정말 시원찮은 인생인데, 정말 훌륭한 인격을 소유한 것인지는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테스트 해 보셨어요. 이제야 알았다. 합격이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뭐라고 그러십니까? 이미 번제에 쓸 양을 준비해 놓았어.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밤새도록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단해서 떠날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제단에 쓸 양을 준비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단지 못 본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한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이 우리를 새롭게 하는 줄 믿습니다. 그 산에 양을 봤으면 무슨 그런 믿음이 필요하고, 그런 결단이 필요하겠어요. 그래서 우리 신앙은 믿음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너는 나를 본대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더욱 복되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뭐라고 고백한 줄 아세요?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 그 감사,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어요?

오늘 우리는 인간적인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아니, 사람이 큰 물고기 속에 삼일이나 들어갔다 나왔는데 살았다는 말이 이 요나서는 신학자 중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요.

어떤 자유적인 견해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픽션으로 만들어 놓은 이야기라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교훈만 들으면 된다고 하는 그런 자유주의 경향의 신학자들도 있구요.

그러나 예수님처럼 요나의 경우를 들면서 실제적으로 이 사건을 허락하시고 그리고 우리도 이 사건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었던 그런 사실임을 복음적인 마음으로 신뢰하는 복음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제가 요나서 1장 1절을 시작할 때 저나 우리 평안의 성도들은 그런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이 말씀을 선포하고, 들어야 한다라고 제가 먼저 전제를 한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이해를 돕기 위해서 몇가지 예를 드리고 싶습니다. 프랭크 볼랜이라고 하는 분이 ‘향유고래의 배회’라고 하는 글을 쓰셨는데, 그 분의 글을 보면 1927년에 향유고래에 잡혔다가 3일만에 구출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향유고래 중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향유고래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크냐 하면 그 배를 갈라보니까 그 향유고래 뱃 속에, 위 속에 4m가 되는 상어가 들어 있었어요.

아직 소화되지 않은 온전한 모양의 4m짜리 상어가 들어가 있었으면 적어도 4m이상은 되었겠지요? 대단하지 않아요? 4m짜리 상어를 한 입에 삼켜 버리는 이 향유고래 보통 7- 8m 크기랍니다.

그런데 이 1927년에 향유고래에 잡혔다가 3일만에 탈출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사람을 꺼내보니까 얼굴과 목과 이 피부가 위산 때문에 완전히 하얗게 표백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생명을 구했어요. 생명엔 지장이 없이 그거 피부가 하얗게 표백이 된 상태로 된 거예요.
과학자들이 발견한 사실은 향유고래가 죽을 때 이 위 속에 모든 것을 토해내고, 죽는 습성이 있어요.

또 1891년 1월에 포클랜드, 아르헨티나 그 동쪽에 보면 영국 소유의 섬이 있지요. 포클랜드섬에 고기를 잡던 동방의 별이라는 그 배에서 고래를 잡는 동방의 별이라는 1등급 선원 제임스 바클리라고 하는 사람이 실수로 고래에게 잡혔습니다. 그래서 고래에게 삼켜졌는데, 이틀만에 다시 그 고래를 잡게 되어서 배를 갈라보니까 그 일등선원 제임스 바클리가 살아있었다는 거예요. 이틀 만에 생명을 건진 거예요.

그 제임스 바클리가 들어있던 고래는 스펌이란 고래였습니다. 스펌고래던, 향유고래던 이렇게 사람을 통째로 삼키고도 남을만한 큰 크기였다. 물론 제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위해서 이런 몇가지 과학적인 실제적인 사건들을 소개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기 때문에 요나도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적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이, 요나서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는 신뢰하고 시작을 했기 때문에 이런 예가 있든, 없든 우리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었지만 이런 예를 들었을 때 이해는 도움이 되겠지요. 아, 그럴 수 있겠구나. 믿음이 부족한 분들에게는 오, 그래? 4m되는 상어를 삼켰다면 뭐, 2m가 안 되는 사람을 삼켰는데, 가능하겠는데 이해는 될 거예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요나가 사명의 자리를 떠나서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고 있어요. 큰 배가 깨어질 만큼 엄청나게 대풍을 여호와께서 내리셨습니다. 그러면 이 풍랑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간섭하시고, 주장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나는 떠났습니다. 배도 있었고, 배삯도, 배표도, 그리고 잔잔한 지중해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요나형, 요나의 이미지를 가진 성도들이 있지요. 어떤 성도들입니까? 열심히 하지만, 조건이 있지요. 내 생각과 맞을 때, 요나가 그동안 열심히 했습니다. 유대의 선지자로서 하나님께서 유대 백성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기다리시고 할렐루야지요.

자기 민족이 누구보다 컸던 요나로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저 니느웨 앗수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악이 강권한 그 도시에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들도 용서하신다고 하는 그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말을 듣고서 속이 뒤집혔어요.

우리 이스라엘 유대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저 할례도 못 받은 이방 민족을 사랑하시는 건 동의할 수 없다는 거지요. 요나의 헌신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자기 생각과 맞을 때까지...

여러분 주님의 일 하면서 이런 요나형의 그런 일꾼이지는 않으셨습니까? 목사님이 어느 일을 시켜도 내 생각과 맞을 때까지만 일한다. 안 맞으면 교회를 떠나든지, 일을 안 하든지, 저보고 회장 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상황은 가능해요. 내년에 하시겠습니까? 내년에 하겠습니다. 그런 경우는 제가 충분히 바꿔 드렸습니다.

그것은 제가 온지 얼마 안 됐고, 그건 제가 잘 모르고, 그래서 제가 바꿔 드렸어요. 그러나 교회 생활을 충분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교회에서 오래도록 신앙생활 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을 요구할 때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지요.

요나가 초보선지자입니까? 아니잖아요. 오래도록 이스라엘을 위해서 섬겼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에서 반대로 가버렸습니다. 니느웨에서 다시스로 가 버렸습니다.

제가 요즘에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 회장님들이 일년 하는 건 좀 짧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번에 집회간 교회도 물어봤어요. 회장을 몇 년을 합니까? 그러니까 2년씩 한대요. 그래서 조그만 교회들도 야무지게들 하는데, 우리가 덩치만 컸지 속이 비었나. 헌금을 하는 것도 우리 교인들이 헌금이 너무 약해요. 오죽하면 부흥회 때 방송에 나가서 부끄럽습니다만 부흥회 때 헌금 한 번 광고해 달라고 부끄러운 부탁도 했어요. 그래가지고서는 강사님 사례비도 못 드리겠더라구요.

그런데 이번 집회를 갔는데 70명 정도 모이는 교횐데, 첫날 40명 모였어요. 그런데 봉투가 한 40개 올라오더라구요. 그래서 첫날 이어서 그런가? 전 집회 가면 헌금 이야기를 안 하거든요. 새벽기돈데도 한 20명 나왔는데, 봉투가 20개 나왔어요.

인원수대로 매 시간 집회 했는데, 일곱 번째는 마지막에는 나권사님이 서산에서 가깝다고 오셨어요. 마지막날은 70명정도 80명이 나와서 그 교회가 생긴 이래 부흥회 가장 많이 교회에 왔대요.

그 교회가 106년 된 교회예요. 김홍도목사님, 김국도목사님, 신영규목사님, 대한민국 내노라는 목사님은 다 와 갔다면요. 106년동안 부흥회를 했으니까 1년에 한 번씩, 그런데 이름도 없는 목사가 106년 만에 차례가 온 거야. 이름이 있었으면 제가 106년 만에 차례가 왔겠어요? 16년 만에 갔지.

근데 그 교인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 교회 생긴 이래 부흥회 하고 낮예배 출석수보다 더 많이 모인 건 처음이래요. 잘 한 것 같지요? 교만하면 안 되지만 저도 보람이 있더라구요. 그렇게 이름 없는 목사가 와서 부흥회를 해서 최고로 많이 모였대요. 사실 우리가 600명의 교인이 모이는 거면 부흥회가 모이는 거면 600명, 700명 모여야 되는 거 아니예요.

그런데 이건 반도 안 모인거니까 담임목사가 입술이 터질 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여선교회 회장, 남선교회 회장 몇 년 하냐니까 2년 한대요. 올해만 그런가, 늘 그렇게 했대요. 제 마음에 늘 그렇게 했대요.

선교회장은 2년씩 해야 되겠다. 2006년에 선교회장 하신 분들은 2년 하실 걸로 생각하고 하십시오. 사실 1년 하면 조금 할 만 하면 그만 두니까 영 아무 것도 아니예요. 깊이 있게 일을 하려면 2년은 해야 될 거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랑하시는 증거,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 요나가 자기 생각과 맞으면 순종, 안 맞으면 불순종, 튕겨 나가는 거예요. 지금 저 니느웨는 이스라엘에서 북쪽인데 저 다시스는 서쪽 끝이거든요. 전혀 반대로 튀어버린 거예요. 충성하지만 내 생각에 맞는 경우에 한해서 이런 우리의 모습은 이제 오늘로 다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뜻이라면 하겠습니다.

제 생각은 이랬지만, 주님이 그것을 원하시면 하겠습니다. 이게 믿음의 사람이잖아요. 그러나 요나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배 밑에 내려가서 실컷 자고 있는데, 풍랑이 일지요. 자기 신을 불러대지요. 그래도 소용이 없으니까 결국은 목숨 다음에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돈, 제물, 다 가져다 버리는데, 그래도 소용이 없으니까 머리가 바짝 돌았어요. 배 밑에서 저 난리 통에 자고 있는 저 사람이 분명히 문제가 있는거다. 실토해라. 무슨 연유인가. 결국 제비를 뽑아서 요나가 뽑히게 된 것도 일을 작정하기는 인간이 하지만, 뽑히게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이신줄로 믿습니다.

내가 계획을 해도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은 여호와라고 하는 성경의 고백처럼 요나가 제비가 뽑혔을 때 그 때 요나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 앞에까지 요나는 비겁하고, 불순종하는 요나였지만, 용기있고 회개할 줄 아는 책임질 수 있는 요나였습니다.

나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 책임이 없어요. 제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했기 때문에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어떻게 질거냐? 나를 바다에 던지십시오. 바다에 던졌을 때 15절, 16절 보니까 곧 바다에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이 풍랑을 누가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주셨다는 거지요. 너무나도 정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는 이 17절에서는 마음에 감동이 되는 말씀이 이미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재수 좋게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데, 우연히 큰 향유고래가 지나가다가 요나를 덥썩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요나를 위해서 사라의 그릇을 준비하신 줄로 믿습니다.

도망치는 요나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손길, 곧 불순종의 요나를 순종의 요나로 바꾸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음을 저는 고백합니다. 요나에게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이었는지, 여호와이레,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이미 아브라함이 집을 출발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리아산에 양을 예비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그 눈을 보고 나서야 여호와 이레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그 하나님을 찬양하기 이전에 예비하시고 기다리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믿음으로 바라보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의 눈이라고 하는 거예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손길이 우리 평안의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심으로 여호와 이레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불순종의 자리에 있을 지라도, 기회를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여호와 이레를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이미 예비하신 주님, 우리가 주님의 그 은혜와 축복을 알지 못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 시간에도 이미 예비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2006년을 바라보면서 이미 예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은혜와 축복을 확신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순종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