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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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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White Christmas를 기대했습니다만, 올해는 폭설로 고통을 겪는 광주 전남지역민들을 생각하면서 그렇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 분들에게도 우리 구주의 탄생이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이 되면 사람들은 마음이 담긴 카드나 선물을 기대하고 마음에 드는 선물에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며 가장 큰 기쁨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27 B.C.-A.D. 14)가 통치하던 때에 탄생하셨습니다. 가이사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us)입니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후 빼앗은 이집트의 많은 자원을 국가의 번영과 군대의 유지와 빈민들의 식량 공급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많은 전쟁과 내란을 겪었던 사람들은 전쟁의 종식과 평화를 가져온 그를 평화의 수호자요 구원자로 환영했습니다. 기원전 9년에 소아시아 프리네(Prine)에 세워진 비문에는 신께서 그를 구원자로 주심을 찬양하며 그의 태어남을 기쁜 소식(복음)의 시작으로 여기는 구절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70개 군단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국방비가 필요했습니다. 호적 명령은 식민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황제의 명령 한 마디에 모든 백성들이 생업을 중단하고 호적 하러 가야 했습니다(3). 다윗의 자손 요셉도 나사렛 동네에서 베들레헴까지 약 130-40km를 만삭이 된 아내 마리아와 함께 걸어 가야했습니다(4-5). 가이사가 여행경비나 휴업 수당을 지급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이사의 통치는 어떤 면에서는 복음이었을지 모르지만, 동시에 세상의 약자들에게는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조지 부시는 9.11 테러 이후 꺾였던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그를 다시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그의 통치가 다수의 미국인들에게는 기쁨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를 반대했던 나머지 미국인들을 포함해서 이라크 백성들에게는 슬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황우석 박사의 환자마춤형 줄기세포 연구의 성공 이야기는 불치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한 동안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논문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많은 사람들이 큰 실망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사실 수정란이 생명임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염려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나 소식도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기쁨이 되지는 못합니다. 단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한 동안의 기쁨만 제공할 뿐입니다. 그 기쁨마저도 이면에는 슬픔을 동반하고 있어서, 어떤 이에게는 평화를 주는 소식이 동시에 다른 이에게는 고통을 주게 됩니다. 신상균 성도님의 가정에 새 생명이 태어난다면 우리 교회 전체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온 세상에 미치겠습니까? 창원까지는 미치겠지요. 또 결혼 청첩장이 당사자에게는 기쁨이어도 다른 노총각 노처녀들에게는 슬픈 소식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탄생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10절을 보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 누가 들어도 크게 기뻐할 좋은 소식은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라는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은 그 이전에 기쁘지 못한 상태를 전제로 합니다. 인류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면 그 이전에 큰 슬픔의 비참한 상태가 있었다는 것을 전재합니다.

선물을 많이 받았어도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에게는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 슬픔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아이라면 마음의 비참함은 더욱 크겠지요.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는 이런 아이와 같습니다. 인류는 그를 지으신 하나님께 버림받은 비참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경향, 곧 원죄를 타고나기 때문에 자라면서 이기적이며 탐욕적이며 정욕적인 특성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멀쩡하게 인생을 즐기는 것 같아도 그 속에는 남몰래 비참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는 병든 영혼이 있습니다. 보다 더 심각한 상황은 인간 스스로는 그러한 비참의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평생 욕을 먹고 지탄을 받기로 마음먹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칭찬과 존경을 받으며 살고 싶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됩니다. 넉넉히 베풀면서 살고 싶은데 막상 나의 이익과 결부된 일에서 깨끗하게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살고 싶은데 ‘조금만 더’ 하다가 어느새 욕심에 사로잡힙니다. 깨끗하고 순결하게 살고 싶은데 뒤돌아보면 거짓과 정욕에 물들어있습니다. 겸손하게 되려고 노력했는데 이상하게 위선자가 되어버리고, 순수하려고 살려고 노력했는데 이상하게 더럽고 추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일들이 인간사에 얼마나 많습니까? 갖은 방법으로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죄를 짓고자 하는 경향’ ‘죄를 향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는 인간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탄식하던 사도 바울도 이 예수님으로 인해 곧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a)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구주가 되십니다. 내게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에 대한 원망과 미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구주가 되십니다. 가끔씩 밀려드는 슬픔과 외로움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구주가 되십니다. 경쟁사회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며 탄식하는 사람들에게도 구주가 되십니다. 그 분은 죄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닥친 모든 비참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주”십니다. 이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의 비참에서 구해내실 수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그래서 그 분의 탄생은 참으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동네”에 탄생하셨다는 것은 평범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700년 전 선지자 미가를 통해 예언하셨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늘 ‘나사렛 예수’라 불렸습니다. 율법에 밝은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 불리는 분이 어떻게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 예고된 메시야일수 있는지에 대해 의혹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게 되셨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6-7절을 보면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했습니다. 호적 명령이 없었다면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아기를 출산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황제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조상들의 고향인 베들레헴까지의 가야만 했습니다. 호적 등록은 남자만 해도 되는데 왜 마리아가 동행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양합니다. 어떤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는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그들이 미가서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일부러 베들레헴에 간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럴 계획이었다면 만삭이 되기 전에 보다 일찍 베들레헴으로 가서 살 터전을 마련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가이사는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호적 명령을 내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묘하게도 가이사의 호적 명령을 사용하시고, 요셉과 마리아의 개인적인 사정을 사용하셔서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생각과 자기 의지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뜻을 정확하게 성취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당시는 가이사가 세상의 평화를 좌지우지하며 온 땅을 통치하는 것 같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은 섭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2005년 10월 판에서 「시사저널」은 창간 16주년을 기념해서 특별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제목이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였습니다. 노무현, 이건희, 박근혜, 이명박, 황우석, 이해찬, 김대중, 정동영, 고건, 김수환, 순이었습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으로는 KBS,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국인으로는 조지 부시와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뽑혔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분들이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그들이 우리나라를 망친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뒤에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악인이나 독재자가 나라를 주물러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당신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몇몇 사람이 이 나라를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하면 답답해집니다. 몇몇 목사님들이 한국 기독교의 이끌어간다고 생각하면 그들의 허물과 무능을 볼 때마다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을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교회를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나라의 흥망성쇠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걷고 있는 동안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않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사람들을 바라보면 기쁨이 사라지고 평안이 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개인의 삶과 역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께서 참으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구주의 탄생은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이며 땅에는 평화입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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