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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성탄의 신비 (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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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맥스 루카이도 목사님이 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늘 옆 사람과 인사 나누실 때, 그렇게 한번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 여러분, 사실 이보다 더 경천동지할 뉴스가 있겠습니까? 정말 믿어지십니까?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이것이야 말로 우주 최대의 기적중의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첫 번 성탄 현장으로 돌아가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사람 되신> 이 사건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쌓여 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 온 세상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이 자신의 생존도 책임지지 못할 갓난아기로 오셨다는 것, 거룩한 영광에 둘러쌓여야 할 하나님이 짐승들의 냄새나는 먹이통에 누워 계신다는 것,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지만 그를 알아보고 영접한 사람들은 소수의 몇 사람들 뿐이였고 그들조차 뜻밖의 사람들이었다는 것,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성탄을 기획하고 연출하신 분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이시죠. 사실 성탄의 무대 위에서 우리가 보는 사람들, 소품 하나하나, 배경등, 모든 것은 성탄을 연출하신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하나 고르고 골라서 무대 위에 올려놓으신 것이지 아무 것이나 갖다 놓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탄 사건에 등장하는 모든 소품들에는 선택하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알게 되면 성탄의 신비도 자연히 풀리게 될 것입니다.

1. 첫 번째 신비는 만군의 왕으로 오셨지만 아무도 그분을 알아본 사람이 없었고 영접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왜 사람들은 메시야가 태어난 것을 몰랐을까요?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오래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하였고 오매불망 목놓아 기다려온 백성들이 있었는데.... 정작 그 분이 왔을 때는 하나같이 무관심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를 쫓아내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시간에 베들레헴 모든 사람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들을 시간이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 가십니다. 하나님을 만날 시간은 낼 줄 모르면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목자들이 천사의 기별을 듣게 된 것은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깨어 있어야 만날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품에 안는 영광을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시므온은 죽기 전에 구세주를 볼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괴로운 삶을 하루하루 지탱해 가면서도 늘 그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품에 안는 감격을 맛보았을 때 그는 이렇게 찬송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제는 눈을 감고 죽을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노인의 갸날픈 생명을 그때까지 연장시켜 온 힘은 기다림이었습니다.

안나는 과부 된지 84년 동안 주야로 성전에 나와 기도하다가 그날 성전에 올라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약 안나 할머니가 매일 금식하며 기도했지만 그날 하루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그 때 찾아오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언제 어느 때 주인이 오시더라도 달려 나가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강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다릴 줄 압니다. 또한 기다린다는 것은 깨어 있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 사람들은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재림 때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도 밤중이었는데, 재림도 밤중일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시간적 밤이라기보다는 영적 밤을 말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은 도적처럼 오신다고 했는데 일반적으로 도적은 밤에 활동합니다.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재림 때까지 우리 중에서 과연 얼마가 주님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제발 초림 때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재림은 온 세상이 다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멸하시는 심판주로 당당히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림하시는 주님을 보긴 보겠지만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사람들은 적을 것입니다.

초림 때처럼 어쩌면 예상외의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세상적 눈으로 볼 때 믿음 좋아 보이던 유명한 사람들은 빠지고, 정말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 마리아와 요셉과 같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들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초림 때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잘 준비해야 합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믿음입니다. 교회 다닌 년수나 직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첫 번 성탄절에도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자리에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보이지 않았고 가장 뛰어난 믿음의 영웅이었으나 세상에서는 감추어져 있었던 십대의 앳된 소녀 마리아, 그리고 천민출신의 목수 요셉. 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사람 앞에서 인정받고 상 받는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맙시다. 지금도 세상에는 주님의 재림을 손꼽아 기다리는 교회와 성도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오실 때 믿음을 가지고 깨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첫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둘째, 첫 번 성탄절에 사람들이 메시야를 영접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분이 너무나 의외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신성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갓난아기>로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이 아기가 어떻게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란 말인가? 그 하늘의 영광은 어디 갔고 그 위엄과 권능은 어디다 감추셨는가? 아무도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속이셨습니까? 아닙니다.

일찍부터 성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해 이렇게 예언해 주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사 9:6)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사 7:14)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니라.” (미가 5:2)

이미 하나님이 한 아기로 베들레헴 동네에 태어나실 것이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구유에 태어나실 것은 예언되지 않았다? 고 묻고 싶으시죠? 사실 사람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메시야는 왕이나 정복자로 오실 줄로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또 다른 면을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3)

그날 밤 베들레헴에는 수많은 방들이 있었지만 고통으로 신음하는 가난한 임산부를 맞아들인 곳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찾아 간 곳은 가축들의 우리였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요1:10-11)

거룩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도 쓸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죽어야만 했고 지성소에는 오직 선택된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 아기로 오셨을 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신성만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탄절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성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은 33년 동안만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장차 우리 육체가 입게 될 부활의 영체로 보좌에 계십니다. 그리고 재림의 날에도 사람의 몸으로 임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 한분이십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악령을 받은 자라고까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것이 없었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고, 이 세상에서 성도가 당하는 고난에 대한 대답도 없고 그 고난을 이길 힘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 속에서 하나님의 엄청난 상실과 포기, 희생을 봅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는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묻혀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어린아이들의 무덤도 있습니다.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아무것도 모른 채 조선 땅에 왔다가 풍토병과 열악한 의료시설로 그 어린 나이에 죽어야만 했을 때 아버지인 선교사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갔을까요? 아닙니다. 자식을 희생하면서 까지도 그들은 이 땅을 떠나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 마침내 자신의 생명마저도 바쳤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가족, 명예, 직장, 안락함을 다 포기하고 잃어버린 사람들이였습니다.

선교사 정신은 동사 두개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 <포기한다>와 <잃어버린다>입니다. 이 두 가지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선교사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외아들을 이 땅에 선교사로 보내신 날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여러분의 자녀 중에 하나가 아프리카 깊은 오지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자원하면 허락하시겠습니까? 온갖 해충들이 우글거리고 무서운 풍토병으로 언제 생명을 잃을지 모르고 음식과 주거환경도 형편없는 그런 곳으로 가라고 허락하시겠습니까? 비록 그렇게 할 수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성자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위해 하늘 보좌와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영원히 누릴 평안과 기쁨을 포기하셨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육체 속에 자신을 가두었습니다. 우주보다 크신 분이 작고 작아져서 마침내 작은 알속의 난세포가 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이 구유에 누워 계실 때 하늘에는 두 분의 하나님 뿐이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정이 깨어졌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이 우리 겉으로 오셨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에게서 우리를 위해 전부를 포기하고 잃어버리신 하나님을 봅니다.

성탄절에는 우리가 찾아야 할 정신이 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선교정신>입니다. 오늘도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잃고 기꺼이 포기하는 선교사들에 의해 성탄의 기적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처럼 내 권리를 포기하고 내 것을 잃어버림으로서 누군가의 생애에 가장 큰 기쁨이 되어줄 성탄절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세 번째 성탄의 신비는 무대 위에 있는 소품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장소는 유대 땅에서 가장 작은 동네 베들레헴, 주인공으로는 마리아와 요셉, 양치는 목자들, 동방박사 3사람. 소품으로는 찬바람이 드는 마굿간, 가끔씩 몸부림을 치는 짐승들, 냄새나는 구유입니다.

우주의 대 기적이 일어난 현장이지만 하나님이 쓰신 소품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질서로 보면 정말 하잘 것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속에서 고르고 골라서 선택된 것들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이며 섭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풍채, 외모, 학력, 직업, 가정 환경등 세상의 지혜와 가치로 보면 버림받기에 딱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자들은 예수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가장 중요한 <모퉁이 돌>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와 하나님의 질서는 완전히 거꾸로 입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소품들은 세상적 질서와 가치로 보면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버린 그것들을 선택하셔서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후1:19-20)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6-29)

세상에 전문가들이 가치 없다고 버린 것들을 하나님은 선택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들은 모든 영광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능력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지혜는 우리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베들레헴 동네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았지만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가 태어나는 축복받은 땅이 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세상의 건축자들이 보기에는 쓸모없어 버린 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셔서 메시야의 양육을 책임질 부모로 삼으셨습니다. 마굿간과 구유, 그것은 하나 가치 없는 것들이었지만 존귀하신 성자 하나님이 누우실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치 없다고 버림받아 절망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의지할 데 없어 희망을 포기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그런 분들에게 성탄은 복음입니다. 성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절망과 한계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가까이 와 있습니다. 그 절망의 깊이만큼, 그 통곡의 깊이만큼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여러분 안에 와 있습니다.

첫 번 성탄절 현장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모든 것이 신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만든 주인이 오셨는데 그 백성들은 알아보지도 못하고 영접도 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나뿐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데, 성자 하나님은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사람이 되십니다, 그리고 이 성탄의 기적에 쓰임 받은 인물이나 소품들은 다 세상이 버린 가치 없는 것들뿐이었습니다.

이제 성탄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코드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코드는 <사랑>입니다. 성탄 사건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사랑입니다.

왜 하나님은 거절당하고 버림 받으시면서도 이 땅에 오셨을까요? 한강에 자식을 밀어 넣는 부모는 <죽일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는데,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자기 아들을 밀어 넣어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과 권세를 버리고 스스로 고난 받는 사람이 되셨습니까? 세상에는 귀하고 값있는 것들도 많은데 왜 하나님은 마굿간에 구유를 선택하셨을까요? 그리고 왜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을까요? 아무 가치도 자랑할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그 대답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한마디 밖에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성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폭발한 날입니다. 가장 사랑하시는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차마 있을 수 없는 기적입니다. 그러나 기적이라고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할 수 없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기적을 만듭니다. 우리 아버지에게는 그런 사랑이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성탄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면 가장 높고 높은 자리에 계셔야 하는데, 우리는 가장 낮고 낮은 자리에 계시는 주님을 봅니다. <구유에 누이신 하나님>, 이 세상에 그렇게 태어나는 아기가 있겠습니까? 하늘의 하늘이라도 모실 수 없을 만큼 광대하시고 엄위로우신 분이신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까지 내려 가셨을까요?

그날 밤 베들레헴에는 다른 아기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예수라고 지명했습니다. 그것이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성탄절의 신비를 푸는 두 번째 코드는 <섬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함이셨습니다. 섬기려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옷이 아니라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고개를 숙여야만 합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골고다까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섬김의 길이었습니다. 최후에는 자신에게 있는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도 다 뿌리시고 마침내 제로가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가끔 내가 가진 모든 것, 손과 발, 그리고 가장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남김없이 다 태워서 마지막에는 재처럼 사그라질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맞을 죽음이라면 그 보다 더 복된 인생이 있을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충성스러운 종으로 여김을 받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쓰라고 주신 것을 남기고 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기고 가는 것이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주님 주신 육체는 일하라고 주신 것인데 그저 잘 다듬고 치장만 하다가 그대로 가지고 가지 않습니까? 주님이 주신 재물이나 은사는 남을 위해 쓰라고 맡기신 것인데 그 날에 창고에 가득 쌓인 채 녹슬어 있다면 그 악함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결국 남는 것은 남을 위해 섬긴 것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 볼 때 가장 멋진 순간들, 가장 진실하게 살았던 순간들은 사랑으로 남을 위해 무언가를 했을 때일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법칙을 배워 아시죠? 사랑은 하면 할수록 상대방이 내 존재 목적이 되어서 상대방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이 식으면 식을수록 이기적이 되어 나를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일은 상대방을 섬기는 일입니다. 섬기지 않는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참된 섬김은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꼭 붙어 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도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꼭 섬김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섬김은 둘 다 따로 따로는 절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한 사랑의 절정에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를 섬기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의 모델로서 모든 인간이 살아야 할 삶의 본을 보여 주셨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일과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누릴 가장 큰 자유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자유와 남을 섬기는 자유입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사랑하는 일, 그리고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남을 섬기는 가운데 맛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섬기지 않는 인생은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삶이 무의미하고 어떻게 살면 가치있는 삶을 살까 고민 중이십니까? 지금부터라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일생을 바쳐 보십시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가장 큰 선물,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입니다.
그런데 첫 번 성탄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당황하고 놀라게 됩니다. 당연합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가치가 세상에 내려 온 날이기 때문에 세상의 질서와 가치로 보니 당연히 이해할 수 없고 터무니없는 사건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신비를 푸는 코드는 두 가지 인데 사랑과 섬김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가지는 하나와 같습니다. 사랑이 행동하면 섬김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그치는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목적은 우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아들을 주셨다는 말은 우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줄 수 있고 무슨 일이든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까? 가치를 잃고 죄인의 굴레를 덮어쓰고 사는 절망적인 인생들을 자기와 똑같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초대교부 <이레네우스>는 성육신의 비밀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우리와 같이 되신 것은 우리가 그와 같이 되기 위함이다.”

첫 번 성탄절의 모든 신비는 두 가지 코드로 풀립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섬김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앞으로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2005년 성탄절을 예수님의 생일로만 삼지 말고 사랑과 섬김으로 살아야 할 다시 태어날 나의 생일로 삼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끝- (권영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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