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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구유에 오신 주님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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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
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
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
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누가복음 2:1-7)

1.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구유에 나신 의미가 무엇일까?

1865년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암 부스(Booth)대장이 세상을 떠나기 전 예언한 말이 있습니다.
‘장차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중생 없는 구원’,
‘그리스도 없는 성서’,
‘회개 없는 용서를 논할 때가 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구세군을 창설할 때 가장 가난한 자들을 위해 오신 주님을 본받아 한평생 약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지만, 장차 기독교가 변질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한 말이었다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변함이 없지만,
그를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은 변할 것을 내다 본 것 같습니다.
불과 12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현재가 바로 그 때인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성탄의 경우 '그리스도 없는 크리스마스'를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벌써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크리스마스는 빈 구유처럼 초라하고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구유에 나신 주님’을 묵상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하여 낮고 비천한 <구유>에 나셔야 했을까?
구유에 나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
깊히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2. 구유에 나신 주님은 겸손해야 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친히 사람이 되어 세상에 내려오신 주님, 그리고 가장 낮은 구유에 뉘었다는 것은 사람에게서 위대함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큰 사람, 큰 성공을 바라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러러보이고, 떠받들림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더 높은 자리, 더 화려한 자리를 탐냅니다.
하지만 구유에 나신 주님은 정 반대로 설명합니다.
진정 우러러 볼 수 있는 사람은 낮은 자리에 스스로 처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마굿간에 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그를 받아들일 방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이사 아우그스도의 영을 받아 모든 사람들이 호적하러 본 고향으로 내려가던 길이었습니다. 한꺼번에 몰린 사람들이 많았기에 하루 밤을 지낼 수 있는 방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먼저 방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경쟁사회에서 날센 사람들이 먼저 다 방을 차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자신의 방에서 떠드는 동안에 우리 주님은 짐승들이 기거하는 마구간에서 자리를 펴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가난해진 사람이 겸손한 사람은 못 됩니다.
힘이 없어 겸손해진 사람은 겸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왕이지만, 스스로 자기를 종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나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이란 말입니다.
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보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② 갖고 있으면서도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③ 알면서도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④ 건강하면서도 약한 사람에게 눈길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⑤ 그런 사람이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이요, 위대한 사람입니다.
⑥ 그런 모델로 나타난 것이 구유에 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폴레온은 자신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 센트헤레나 섬에서 최후를 맞이하면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오오! 갈릴리 사람 예수여! 당신이 이겼다”고......
주님은 총칼로 세계를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높은 사람들을 이기었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로마의 창검을 이기었습니다.
지금도 이 진리는 영원한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오늘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주님과 함께 마구간으로 내려 앉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방을 먼저 차지했던 사람들처럼,
그런 것 가지고 그것을 성공이라고 자위하고 있지는 않는지.....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가졌다는 것, 그것으로 만족해 있지는 않는지...
그러면서 구유에 뉘인 예수에게는 관심조차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깊히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요즘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남들보다 좋은 집에 살면 그것이 성공이요,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성공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은 낮아질 줄 알 때 그것이 위대함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겸손을 능가할 위대한 힘은 없습니다.

3. 구유에 나신 주님은 진정한 구세주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높으신 보좌를 버리고 가장 낮은 구유에 나셨기에 그 이상 더 세상에서 낮은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버림받은 죄인이라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죄인이라면 상대하지 않습니다.
자기도 죄인이면서도 죄인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죄인들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모두 대신하여 자신이 졌습니다.

구유에 나신 주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를 구원해 줄 분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만일 주님께서 궁궐의 왕자로서 높은 자리에 나셨다면,
감옥에 갇힌 죄인들의 구세주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일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만 상대하는 주님으로 오셨다면,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오신 주님은 낮고 천한,
모두 상대하지 않는 버려진 죄인들을 위해 구유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허랑방탕한 죄 가운데 헤맸던 자들이라도 주님께 돌아오면 구원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구유>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유>에 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구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도 예수 없는 구유는 단순히 말구유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구유를 놓고 축하하지는 않는지?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없는 구유, 예수 없는 축하 공연,
아무런 의의가 없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구유에 나신 주님이기에 우리는 그 주님을 구세주로 믿습니다.
나 같은 죄인까지도 용납하시는 주님이기에 그에게 경배합니다.
그런 분이 나를 선택하시고, 내게 직분을 맡겨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오늘 오신 주님을 그래서 축하하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그래서 하늘에서 찬양을 드렸습니다.
구유에 나신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김이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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