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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잠 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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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한 남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습니다. 여러 명의 친구들이 그와 함께 병원으로들어왔습니다. 간호사들은 응급처치를 하며 잠깐 눈을 붙이기 위해 숙직실로 들어간 담당의사를 호출하였습니다. 간호사들이 실려 온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맥박을 짚어보았습니다. 맥박은 이미 끊어졌고, 몸은 식어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응급호출을 받고 달려온 의사는 실려온 환자를 살리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했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둘어보았습니다.
  환자를 데리고 온 40대 중반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예감이도 한듯 검은 넥타이들을 매고 이었습니다. 의사는 그들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냥 앉아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쓰러졌습니다"
"그냥이요?"
  "네! 모두 함께 앉아서 밤을 세웠는데, 그게 좀 무리였나 봅니다"
"그렇다고 아무 이유도 없이 쓰러져요?"
  "네! 건강에도 이상이 없는 친구였는데......."
  의사는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뭔가 숨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다시 환자를 살펴보기 위해 돌아섰습니다. 사망원인은 분면 심장마비인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환자의 상태나 친구들의 상태로 봐서 싸우거나 말다툼을 한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몸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일은 환자가 한 손은 무먹이 쥐어져 있고 다른 손인 오른 손은 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심장마비 환자는 두 손을 펴게 되어 있는데, 이 환자는 한 손은 펴고 한 손은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든 의사는 주먹 쥔 환자의 왼손가락을 하나씩 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손에서 화투 두장이 떨어졌습니다. 3광, 8광 두장이었습니다. 바로 그것떄문이었습니다. 화투 두 장이 심장마비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본 의사는 함께 온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말해보라고 하였습니다.

  "네! 사실 저희는 친구 부친의 사망의 소식을 듣고 상갓집에 모여 밤새 섯다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 친구는 우리와 함께 섯다를 하면서 계속 돈을 잃었습니다. 지갑의 돈이 다 떨어진 것 같아서 그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는데 한 판만 더 하자는 말에....... 마지막 판을 치기 위해 패를 돌리는데 갑자기 저 친구가 화투 두 장을 움켜쥐더니 얼굴색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꼬꾸라졌습니다. 우리는 그게 3.8광땡인지 몰랐습니다. 아무리 3.8광땡이 나와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섯다를 하면서 막판에 3.8광땡이 나오면, 그날 함께 놀았던 모든 사람들이 전체 판돈의 3배를 패를 든 당사자에게 주는 규칙을 정해놓았었습니다. "
  그 사실을 알고 있던 환자는 밤새 돈을 잃다가 막판에 3.8광땡으로 인해서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 가족들을 남겨두고 먼저 간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그가 자신의 운명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 놓치지 않기 위해서 붙잡은 것이 기껏해야 화투 두 장이었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합니다. 그가 조금 일찍 화투를 놓고 가족의 손을 붙잡았다면, 조금 일찍 집으로 귀가하여 사랑하는 가족의 손을 붙잡았다면, 화투 두 장을 들고 인생을 마감하는 황당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손은 일평생 많은 것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손에는 그 주인의 삶이 투영되어 있고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손은 그 사람의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이자 살아온 날들을 기록하고 있는 이력과도 같은 것입니다. 손을 한 번 잡아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살아왔는지 알수가 있습니다.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직업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손, 서로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사랑으로 굳게 잡아줄 수 있는 다정한 손, 누구에게 보여주어도 항상 떳떳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는 그런 일을 하는 손도 있습니다. 그러나 게으른 손, 더러운 손, 부끄러운 손 자꾸만 감추고 싶은 손도 있습니다. 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붙잡고 살라고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손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와 문명생활이 가능해 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손이 원숭이의 손이나 개발이나 소 앞발이나 코끼리 발처럼 우리의 손이 생겼다면 그 손으로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은 손을 만들어주셔서 세밀하고 정밀한 것을 만들어낼 수가 있고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주신 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손, 이 엄청난 손으로 우리가 지금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내 손에 붙잡혀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의 손은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망자처럼 3.8광땡을 붙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구에게 보여주어도 항상 떳떳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는 그런 성도의 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보시옵소서, 내 손은 거룩한 일을 하는 정직한 손입니다. 여보, 내 손은 가족을 위해서 수고하는 손입니다. 자식들아, 이 손은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손이란다.  아버지 어머니 제 손은 미래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손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꾸 누가 볼까 싶어서 손을 숨기는 사람이 되서는 안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가족을 돌보기 위해 일평생 운전대를 붙잡고 살아가는 가장이 있습니다. 한 여름 따갑게 내리 쬐이는 햇살 아래서 삽자루를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기 공사를 위해 이 추운 겨울날에도 높은 전봇대 위에 올라가 전기가 흐르는 전선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건물 외벽을 칠하기 위해 밧줄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술병을 붙잡고 죽어가는 사람, 밤새워 컴퓨터 게임을 하기 위하여 광마우스를 붙잡고 죽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싼 컴퓨터를 가상세계인 게임이나 하다가 젊은 날을 날려버리는 한심한 인간들도 있습니다. 종종 컴퓨터 게임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은 정말 한심스럽게 합니다.  컴퓨터 게임은 수고하고 일한 후에 잠깐씩 쉼을 위해서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두꺼운 돋보기 안경넘어로 쇠약하고 가는 손으로 성경을 집어가면서 성경을 읽는 경건한 모습이 어르신 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경을 읽다가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대부분의 시간들을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굳게 잡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지신 십자가이며 그 분이 흘리신 보혈입니다. 다시 다신 부활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복음이며 그 분의 훈계입니다. 주님의 훈계는 우리에게 지혜로운 길을 가르쳐주며 정직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훈계를 듣고 받고 굳게 붙잡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붙잡는 사람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굳게 붙잡아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굳게 붙잡고 놓치지 않고 싶어도 놓아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지역적으로 강과 바닷 가에 위치해 있는 교회들을 섬긴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름철에 가족들이 행복하게 물가에 왔다가 애들을 물에 빼앗겨버리고 어른들만 슬프게 돌아가는 보았습니다. 그들이 어찌 놓쳐버리고 싶어서 놓쳤겠습니까?
  놓칠 수 밖에 없고 힘의 한계 밖에 있는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무게도 놓칠만한 무게거나 그 어떤 크기도 놓칠만한 크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버린 사람은 하나님도 버리셨습니다. 사울왕이 버림받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삼상 15:23, 15:26). 
  인생은 붙잡아 주고 싶어도 힘이 미치지 못해서 붙잡아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손은 인생의 그 어떤 무게도 결코 무겁지 아니하십니다. 능히 그 무게를 감당하실 수 있는 주님의 손인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훈계를 굳게 붙잡고 지키면

  1.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하셨습니다.
  장수의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장수는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모든 축복보다 장수하는 축복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단 10분이라도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 단 5분이라도 권력으로 그 생명을 살 수 있습니까? 빨리 죽고싶다는 말은 그것은 빈말에 불과하며 진실하지 않는 말입니다. 아무리 나이드신 어르신들도 말로는 "왜 내가 이렇게 빨리 죽지 않고 살까?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하셔도 정말로 정색을 해서 아니 농담으로라도 어른께 빨리 죽으시라고 해보세요. 서럽고 섭섭해서 못견뎌 하실 것입니다.  "주여 조금만이라도 더 살게 해주시옵소서" 이것이 진실 아닙니까? 

  2.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걸음이 곤하지 않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걱정거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곧 삶의 평탄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형통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곧 형통의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 보혈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평강의 복을 누리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3.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달려가는 길은 걸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훈계를 굳게 붙잡고 놓지 않으면 달려갈지라도 실족하지 않게 하는 보호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현대인의 삶은 달려가는 삶입니다. 농경사회는 걸어다니는 사회였습니다. 산업사회는 경보의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정보사회인 지금은 그리고 미래 사회는 달려가는 사회입니다. 지식이 달려가고 사람들도 달려가고 변화도 달려가는 것처럼 빠릅니다. 그말은 그만큼 위험한 사회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주의 훈계를 붙잡고 살면 달려갈 때에도 실족하지 않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송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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