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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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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논산훈련소에 갔을 때 어느 날 각개전투 예비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그날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 훈련장 땅바닥이 문자 그대로 진창이 되어 있었습니다.
  각개전투 훈련 중에는 특히 높은 포복, 낮은 포복 등 땅바닥을 기어야 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런 진창에서 그 훈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 훈련을 받을 때 의외로 우리 소대를 맡은 하사관 조교가 스스로 먼저 그 진창을 기면서 몸소 시범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늘(?) 같은 조교께서 자신의 군복을 진흙투성이로 만들면서 시범을 보여 주는 그 황공무지한(?) 모습에 우리 훈련생들은 놀라고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실은 아침에 중대장이 그날 자기 군복에 진흙을 묻혀오지 않는 조교는 ‘박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입니다.
  훈련생들에게 포복을 바로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뭐니뭐니 해도 역시 ‘백문불여일견’인지라, 중대장께서는 혹시 조교들이 땅바닥이 진창이 되었다고 시범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을까 염려하여 미리 그런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배울 때에는 역시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말로만 듣고 글로만 배울 때에는 어려웠던 것도 한번 시청각 교육을 받게 되면 당장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처럼 눈앞에 보여주는 시범을 조교와 같이 높은 사람이 해 주면 훈련생들은 누구나 다 정신 바짝 차리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탄생 역시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한 것은, 가장 지고하고 높으신 존재께서 육신이라는 천한 몸을 입고 이 땅에 친히 강림하심으로써 원래는 어려웠던 진리, 그러나 또한 중요하기 그지없는 사실을 우리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가르쳐 주신 사건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 말씀을 오늘의 제목으로 삼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강생하심으로써 우리의 눈앞에 뚜렷이 펼쳐진 진리, 우리의 마음에 아주 쉽게 깨우쳐진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 성탄절 주일에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자의 화육강생은 이 우주에 대하여 그 창조자가 누구이신지를 뚜렷이 계시해 줍니다.

  이것이 사도요한이 본문 1절부터 3절까지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기록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1절의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구절은 매우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 언급되고 있는 ‘말씀’이란 바로 본문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분명히 어떤 한 인격체를 가리키는 단어이며 물론 여기서는 예수님을 두고 한 표현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말씀”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문의 헬라어로는 ‘로고스(logos)'라는 매우 유명한 단어입니다.
  이 ‘로고스’라는 단어의 그 기본적인 뜻은, ‘말’(word)이라기보다는, 보다 철학적인 용어로서 ‘이성, 원리, 혼, 생각, 또는 생각의 표현으로서의 말’ 등 여러 가지 복합적 의미가 함축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헬라인들이 이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을 때, 아마 즉각적으로는 ‘삼라만상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어떤 보편적인 최고의 원리’ 따위의 개념이 그들 머릿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당시의 어떤 유대인이 이 단어를 접했다면, 그들은 바로 ‘말씀’이라는 개념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통하여 이미 하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하는데 있어서 매우 익숙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표현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런 두어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사도요한이 여기서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렇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헬라인들에 대하여는, 그들이 평소에 궁금해 하고 토론의 대상으로 삼는 ‘로고스’, 즉 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최고의 원리와 이성과 같은 것, 그들이 철학적 연구만 가지고서는 끝내 찾지는 못하고 있는 그 ‘로고스’가, 바로 이 땅에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하여는, 그 예수님이란 다름 아닌 바로 그들이 구약을 통해 이미 믿고 있는 이 세상의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자면, 이 땅에 강생하신 예수님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공히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를 사람에게 소통시켜 주시는 분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에게 계시해 주시는 분으로 오셨다는 말이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로고스’라는 단어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로 하여금 알 수 있도록 해 주실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성자 예수님이 그 우주만물의 창조사역에 성부 하나님과 동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라는 말은 ‘그를 통하여 지은바 되었다’라는 뜻으로서, 이것은 성자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나타낼 때 특별히 쓰인 표현입니다.
  즉 창조사역의 주체자이신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성경이 표현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를 통하여’ 창조되었다고 표현함으로써, 모든 성부 하나님의 의지는 반드시 성자 하나님 즉 예수님의 대리적인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처럼 창조사역에 몸소 동참하셨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곧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창조주가 누구신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그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고자 함에 그 목적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숙제는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는 질문에 있습니다.
  이 우주가 제일 처음에 도대체 어떻게 생기게 되었으며 어떻게 생명이 탄생하고 되었는지에 대하여 여전히 온갖 증명될 수 없는 가설들만 남발하고 있습니다.
  우주 탄생에 대하여 현존하는 최고의 가설은 ‘빅뱅(Big Bang) 이론’이라는 것인데, 설사 그것이 옳다 하더라도 그 ‘빅뱅’이라는 것이 왜 생기게 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는 여전히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에는 이 문제에 대해 대답할 길은 이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이’라고, ‘언제?’라는 질문에 대하여 ‘태초에’라고, 그리고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하여 ‘말씀으로’라고 대답해 주시는 이 ‘로고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제 아무리 자기 머리를 굴린다 해도 우주창조의 비밀을 결코 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름은 제가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느 과학자가 이 우주의 창조에 대해 무척이나 열심히 연구하여 고심하다가 우연히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읽고서 “그래, 바로 여기에 지극히 간단한 해답이 있었는데”라고 고백하며 감동의 눈물을 지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게 하심으로써 ‘모든 천지만물과 우주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계시해 주시고 지극히 알기 쉽게 증명해 주셨다는 사실을 밝히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자의 화육강생은 각 사람을 향하여 구원과 멸망이라는 양자택일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한 명도 예외 없이 그 구세주를 믿고 영접하든지 아니면 거부하고 불신앙하든지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으며, 그 사람의 내세는 오로지 이 선택에 의하여 극단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먼저 사도요한은 4절과 5절, 그리고 9절부터 11절에서 그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영적 어두움을 지적합니다.
  우선 본문 4절과 5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함은 생명을 만드신 창조주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바로 예수님에게 있음을 뜻합니다.
  그 생명이 “빛”으로 나타났다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나 그 생명의 진리를 잘 보고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그 생명의 구세주께서는 사람의 눈에 제일 잘 띄는 빛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을 때 그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햇빛이 환한 곳에서는 아무리 밝은 등불이라도 별 표도 나지 않지만, 깜깜한 밤중에는 지극히 작은 불빛 하나도 먼 곳까지 잘 보이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가로등 환한 도시에 살 때에는 별빛, 달빛 밝은 줄 모르다가, 어쩌다 시골길 깜깜한 곳을 걷게 되면 그제야 밤하늘의 달빛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그저 별빛만 있어도 길 찾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됨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어두운 곳에는 그처럼 빛이 잘 드러나고 잘 인식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앙하는 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어두운지 “빛이 비추어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어두운 것입니다.
  실로 빛과 같으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 분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의 심령이란 것은 얼마나 답답할 정도로 어두운 것입니까?

  또한 9절부터 11절에서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기록한 것 역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사도요한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하늘 높은 곳에서 밑으로만 비취는 빛이 아니라, “세상에 와서” 비취는 빛이셨습니다.
  즉 그분은 33년 동안 “세상에 계셨던” ‘지근거리의 빛’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에게 지음을 받았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과 피부를 맞대며 같이 호흡하며 같은 땅을 밟고 다니시면서 그토록 가까이에서 조명해 주셨건만,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특별히 유대 땅,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셨음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이며 구약 성경을 통하여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었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오실 메시아를 예언 받고 있던 바로 그 “당신의 백성들”조차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답답한 심령들을 두고 성령님께서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오늘도 한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어두움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영혼 속에 계속하여 짙게 깔려 있습니다.
  오늘날의 유대인들도 구약은 믿고 있으면서도 그 구약 성경 예언의 초점인 ‘오실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여전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날의 사람들은 신구약 성경을 공히 받아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말씀 속에 계시된 예수님을 창조주로,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간에도 우리 예수님은 이 지상의 수많은 교회들과 전도자들과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정말 빛처럼 뚜렷하게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해 주고 계시는데도, 그 영혼이 어두운 사람들은 그토록 뚜렷하게 밝은 빛을 정말 이상하게도 도무지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바로 그 빛을 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해 주신 은혜’와 ‘예수님의 화육의 은혜’를 체험하는 자들입니다.

_ 첫째로, ‘선택의 은혜’를 체험한다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12절과 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같은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같은 자녀들, 즉 새로운 영통의 가족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런 “권세가 주어졌다”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권세”라고 번역된 말은 ‘힘’(power)이라는 뜻이 아니라 ‘권리’(right)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될 권리라는 것은 원래 없었던 권리이며 또한 얻을 길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로 그 귀중한 권리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즉 이것은 어떤 특권이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은 결코 우리의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이어지는 13절이 자세히 밝히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혈통으로나” 즉 무슨 믿는 가정에 태어났다든지 하는 조건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정으로” 즉 우리 자신이 간절히 소원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뜻으로” 즉 우리의 의지가 강해서 성취해낸 결과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빛을 보고 믿게 된 것은 오로지 우리가 원래부터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선택 받았던 자’이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일일 뿐입니다.
  자식을 낳은 일은 오로지 부모의 의사에 달려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중생함을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것 역시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을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영접하는 사람이란 바로 이와 같은 ‘선택의 은혜’를 체험하는 자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신자는 그 주님의 ‘화육의 은혜’가 얼마나 지대한 것인지를 또한 체험할 줄 아는 자입니다.
  14절부터 18절의 말씀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증거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became)”라고 했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이 육신으로 바뀌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바로 볼 줄 아는 눈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가를 진지하게 찬찬히 바로 살펴보면 그 주님의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비취는 영광으로 인하여, “아, 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시구나. 이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하고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바로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화육하신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귀하신 하나님께서 왜 육신이라는 이 저급한 존재를 입고 땅에 내려오셨겠습니까?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8절에 기록 된 대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기록된 말씀 그대로입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인 것입니다.
  목수가 의자라는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 내면 그 목수는 그 의자를 인식할 수 있지만 의자는 목수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을 하나님께서 창조해 내셨으니 지음 받은 사람 쪽에서는 자신을 지은 하나님을 원래는 볼 수 없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원리입니다.
  하지만 성부의 품속에 계선 성자, 즉 같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의 눈에 비로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나타내셨다”라는 말은 또한 ‘설명해 주다, 알게 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사람이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눈은 가시광선 밖에 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자외선이나 적외선 역시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비가시광선도 특수 감광 사진이나 특별한 망원경 따위를 사용하면 우리 눈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와 같이, 원래 도무지 볼 수 없었던 하나님,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계신 하나님을 우리고 하여금 볼 수 있도록 “나타내 주시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와 같은 성자 화육의 오묘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그 은혜의 풍성함에 실로 감사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17절에 기록된 대로 그것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과는 비교도 아니 될 놀라운 “은혜요 진리”인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표준 혹은 기준입니다.
  하지만 은혜란 사람이 그 표준을 도무지 충족시킬 수 없음을 아시고 그 대신 예수님을 보내시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죄값을 대신 충족시켜 주신 것이니, 생각할수록 실로 큰 “은혜”이며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화육하심 즉 이 땅에 탄생하심은 바로 이와 같이 사람이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뵈올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며 사람이 완전히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의 기준을 공짜로 대신 충족시켜 주신 사건이니, 16절에 기록한대로 그야말로 “은혜 위에 은혜”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을 바로 영접하는 사람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화육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자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은, 우리 사람 각자에게 실로 중대한 양자택일의 결단이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증거의 밝은 빛에도 불구하고 계속 어두운 인생으로 살다가 결국 영원한 멸망에 이르든지, 아니면 그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나를 택하여 주시기 위하여 화육하신 이 놀라운 은혜를 누리고 살다가 결국에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든지,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양자택일의 선택입니다.
  빛 앞에서도 자기의 어두움을 깨닫지 못하는 진짜 어두운 인생으로 남지 말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이처럼 사람의 모습으로 뚜렷이 보여 주시는 은혜로운 계시를 보고 깨닫고 믿음으로써 금세와 내세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오늘 말씀은 성자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하여 사람에게 밝히 계시된 두 가지 진리를 증거해 주었습니다.
  ‘로고스’의 화육으로 인하여 이 우주와 세상의 창조 신비가 밝히 드러났습니다.
  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들은 이제 더 이상 “이 우주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나?”하는 의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또한 이 '성자‘의 강생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지를 어두움에 비취는 빛처럼 명백하게 계시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이제 사람들은 이전처럼 그저 더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 구원 받느냐 아니면 영접치 아니하는 자에게 예비된 영벌에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만이 인생 최대의 양자택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무도 풀지 못할 영원한 비밀처럼 보였던 우주의 시작,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이것 역시 모든 사람에게 끝없는 미로와도 같았던 인생 문제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난해하기 짝이 없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명쾌하고도 간단한 정답을 보여주었습니다.
  최고최대의 진리가 ‘육신’이라는 이 가장 쉽고 현실적이고도 가시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가장 심오하고도 중요한 진리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유일한 ‘빛’처럼, 그 누구의 눈에도 쉽게 보일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명백한 계시로 우리에게 나타난바 된 것입니다.

  조교가 스스로 자기 옷에 진흙을 묻히면서 가르쳐 준다는 것은 참으로 귀찮은 일이지만 교관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할 수 밖에 없었고, 어쨌든 그 결과 훈련생들은 더 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비하된다는 것은 귀찮은 정도가 아니라 실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자계서는 그런 성부의 뜻을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순종하셔서 이 땅에 화육강생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들은 그 지고한 창조의 신비, 구원의 진리를 실로 명백하게 보고 지극히 알기 쉽게 배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실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성탄을 맞이하면서 이 같은 성자의 화육강생이 주는 은혜, “말씀이 육신이 된” 깊고도 놀랍고도 고맙기 짝이 없는 진리를 바로 깨닫고, 세례요한처럼 바로 그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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