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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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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의 눈물>
김수환 추기경이 한 기자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추기경님은 불어도 잘하시고, 영어도 잘하시고, 여러 나라말을 아주 잘 하신다면서요?"
"몇 나라말을 하긴 합니다만, 겨우 인사 정도 하는 편이지요.
거기다가 한 가지 더 잘 하는 말도 있지요…"
"아니, 어떤 말을 잘 하시나요?"
"저는 거짓말도 잘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보기 드물게 종교를 초월해서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이런 추기경이 황우석 교수 문제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기자들이 우리가 황우석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입술을 떨면서 고개를 숙인 채 3분 정도 눈물을 흘리며 침묵했다고 합니다.
김추기경은 "한국 사람이 세계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참을 침묵하다가 이런 말들을 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한국인에게 좋은 머리를 주셨다. 그런데 그 좋은 머리를 옳은 데 쓰지 않고…"
"이번 사태를 황 교수 논문에 국한시켜 생각하지 말자.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직하고 정직하게 살자.
그것이 바로 치유책이고 수습책이다."

저는 김수환 추기경이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황우석 파동은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한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 황우석 사태는 우리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친 경쟁심, 일류병, 세계 최초에 대한 허황된 꿈,
웬만한 것은 적당하게 속여도 괜찮다는 생각, 속도주의, 성과지상주의,
이런 것들이 모조리 밖으로 노출되었습니다.

게다가 황우석 교수가 일약 스타덤에 올라 유명해지게되자
정치인들, 언론인들,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이 각종 이해관계를 가지고
부나비처럼 그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자는 오로지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추켜세우고 불러내는 등, 쓸데없는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이번 황우석 파동은 황우석 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차제에 우리의 의식구조를 근본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인생은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말했다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 이번 사기극의 공동정범인지도 모릅니다.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오늘 2005년도의 성탄절을 맞으면서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거짓과 위선, 불의, 허황된 욕심, 과도한 경쟁심, 출세주의,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상관없다."는 성과주의, 등등, 우리의 모든 치부를
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 이번 파동으로 가장 큰 충격과 허탈감에 빠진 분들은
난치병 환자들일 것입니다.
황우석 씨의 줄기세포 연구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환자들과 가족들이
아마 제일 억장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과학과 의술이 발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짜 희망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성취에 기대를 걸 때 우리는 언제나 실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며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경전인 『미드라쉬』(Midrash)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다윗 임금이 보석 세공인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제 너는 귀한 반지 하나를 만들어야 하는데,
내가 큰 승리를 거두어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그 흥분된 감정을 조절할 수 있고,
동시에 내가 패배해서 큰 절망에 빠져있을 때 다시 내게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
글귀를 그 반지에 새겨 놓도록 해라."

왕의 명령을 들은 보석 세공인은 깊이 고민을 했지만 마땅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지혜의 명군으로 소문난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솔로몬이 세공인에게 준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 반지에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고 새겨 넣어라.
왕이 승리감에 도취해 자만에 빠질 때,
혹은 패배감에 빠져 낙심할 때, 그 글귀를 보면 마음이 가라앉을 것이다."

"이것 역시 지나가리라."
참 지혜로운 문구임에 분명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침에 있다가 금방 사라지는 안개같이 헛되고 헛된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좋은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지나갑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나쁜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지나갑니다.
최고의 명예와 영광을 얻어도, 그것 역시 지나갈 것이며,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고통과 수치와 오욕이 찾아와도, 그것 역시 지나가고야 말 것입니다.

오늘 이 성탄주일에 우리는 국가적으로 불행한 사태를 겪으며
솔로몬의 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울한 사태도 결국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굉장히 좋은 일이 있습니까?
너무 우쭐대는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그 기쁨이 순식간에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러 가지 괴롭고 고민스러운 일이 있습니까?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 모든 고통거리가 눈 녹듯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라가도 교만하지 말고 내려가도 비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때를 기다립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 비움의 마음'을 본받아>
오늘 성탄주일에 저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봉독한 빌 2: 5-11은 유명한 찬송시입니다.
그런데 이 찬송시는 5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성탄절에도 이 땅 위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본문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6-8절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9-11은 이와 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먼저 6-8절을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한 마디로 'KENOSIS,' 즉 '비움'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정치인들은 흔히 대권(大權)에 대해서 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비웠다는 사람 치고 마음을 진짜 비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피눈물나는 자기수양으로부터 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은 'KENOSIS,' 즉 '비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어떻게 비워나가셨습니까?
여러분, 6-8절에 있는 말씀을 다같이 읽읍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 보세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이
본래 예수가 어떤 분이었냐는 것입니다.
그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였다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HOMOOUSIA,'
즉 '동일 본체' 혹은 '동일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신 분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영원하신, 등등의
성부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신적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똑같은 모습을 가진 분이 성자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첫째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근본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심에도 동등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왕자가 왕과 동일한 영광을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왕족의 영광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근본이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올라가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내려오셨습니다.
영광과 존귀의 보좌 위에 올라가려는 마음이 앞서는데
예수님은 그 보좌 위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둘째로,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그 근본이 하나님이신데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 가장 천한 종, 노예가 되셨으며 죄인이 되셨습니다.
영웅들의 이야기를 보면 한결같이 그 출생 이야기가 화려합니다.
화려한 구중궁궐에서 왕자로 태어나 수많은 사람들의 경축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처녀의 몸에 들어가 아주 작아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들레헴 여인숙이 다 만원(滿員)인지라 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아마 나중에 땅을 치고 제일 후회 많이 할 사람들은
예수님 태어날 당시의 호텔 주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너나할 것 없이 가장 좋은 특실을 무료로 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지했으며 돈에 눈이 멀어 메시아를 몰라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축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되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여기에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게 하셔서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극치는 십자가위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 가장 수치스러운 죄인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가장 처참한 방법으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 위하여 태어나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에 기꺼이
순종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형벌을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마음을 비우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9-11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비우셨더니 하나님께서 채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땅 끝까지 내려오셨더니 하나님께서
가장 높은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셨더니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만유의 주,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난 2천년 역사를 보면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다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셔서 종이 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을 비웠더니
다시 하나님과 본체가 되도록 이끄셨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 모든 이름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이름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탄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얼마든지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은 권세를 주장할 수 있었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가장 낮고 천한 죄인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정신,
겸비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만이 문제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화를 내고 교만하기 때문에 삐치고 교만하기 때문에 이웃을 판단합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오해하고 교만하기 때문에 대접만 받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근본이 동일하신 분이셨지만
하나님과 똑같은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갈 만큼 겸손히 자기를 비우셨고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오늘 이 성탄절 아침에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 비움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겸손히 낮아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피콜라의 크리스마스>
장영희 교수의 책을 보면 '피콜라의 크리스마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피콜라' 라는 소녀가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피콜라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오늘 밤 산타할아버지가 오실까요?"
엄마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마 못 오실 거야. 그러나 내년에는 꼭 오실 거야."

그래도 피콜라는 산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작은 나무구두를 벗어 굴뚝 밑에 놓았습니다.
그 날 밤, 눈보라 속을 헤매다가 날개가 부러진 작은 새 한 마리가
피콜라의 작은 집 굴뚝으로 뚝 떨어졌습니다.
작은 새는 피콜라의 나무 구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피콜라의 구두 속에 아무 것도 넣지 못한
엄마의 마음은 몹시 무겁고 슬펐습니다.
그런데 피콜라는 일어나자마자 굴뚝 밑에 있는 나무 구두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구두 속에는 날개가 부러진 작은 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피콜라는 날 듯이 기뻐하며 엄마에게 뛰어가 외쳤습니다.
"엄마, 이것보세요! 산타할아버지가 저에게 선물을 주셨단 말이에요.
이렇게 예쁜 새가 다쳤으니까 제가 잘 돌보라고 선물을 주셨어요!"

피콜라의 마음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이 성탄절 아침에 여러분 모두 피콜라와 같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다 품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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