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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해마다 이맘때면 (딤후 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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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물리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은 그의 작품, 팡세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가장 약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자신이 허약한 체질로 태어나 39세에 요절한 파스칼은 인간이란 자연 앞에서 나약할 수밖에 없지만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자연보다 위대할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갈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바로 인간의 그 생각에서 위대한 역사가 나왔습니다. 지금도 끊임없는 인간의 생각이 더 나은 미래의 세계를 만들어갑니다. 성경에서도 인간을 가리켜 상한 갈대요, 꺼져 가는 심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이기에 오직 인간만이 온 세상과 만물을 주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그 생각에서 모든 것이 출발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신앙의 출발하고, 진행하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생각이 말을 낳고 말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인격을 낳고 인격이 삶을 낳는다” 이것이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하면 생각이 삶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결국 우리 삶을 결정짓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결국 신앙도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의 삶을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가 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 뭔가가 생각이 나야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할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이 생각나야 할까요? 오늘은 그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에게 권면할 것을 말하고 이제 본문에서 예수님으로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그리고 또 18절에서도 ‘주께서’라는 말로 결론을 짓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삶에 늘 자리잡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주께서, 주님이’ 이것이 바울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주님이 중심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주님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주제요, 주인공이었습니다. 주님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주님을 내 모든 삶에 투영시켜야 합니다. ‘과연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주님이 이 상황이면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는 것이 늘 마음에 품고, 입에 달아야 합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가 지은 시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나의 가난함도 슬프지 않고 남의 부유함도 부럽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오직 감사한 마음이 넘칠 따름이라,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몸의 환난도 괴롭지 않고 그 행복을 사모하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일의 실패에 실망치 않고 그 성공에 뛰며 기뻐하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오직 평강과 만족만 있을 따름이라, 오직 영원한 승리자이기 때문이라”

  우리가 평상시에도 주님을 생각해야겠지만, 해마다 이맘때면 더욱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즈음에 주인공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일반달력은 1월부터 시작하지만, 교회달력은 12월부터, 대강절부터 시작됩니다. 지금이 바로 그 기간입니다. 이제 한 주일 앞으로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주님이 주인공입니다. 그분을 생각하고, 왜 오셨고,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주인공은 빠지고 다른 것이 자리잡는 것을 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최근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 기독교운동이 큰 문제가 되고 있음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공립학교에서 ‘하나님’이란 단어를 삭제하고, 기독교의 냄새가 나는 요소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 가운데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주님을 없애려는 움직임도 보입니다. 원래 미국에서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의 인사를 ‘메리 크리스마스’를 불렀는데, 사람들은 이제 이 말을 빼야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해피 홀리데이'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백악관에서는 그것을 시행한지가 벌서 13년이 되었습니다. 작년에도 대통령이 해피 홀리데이로 문구를 넣어 보내서 기독교단체에서 거센 항의가 있었습니다. 이게 지금 돌아가는 미국의 추세입니다. 분명 성탄은 주님이 주인공인데, 그분이 빠지고 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가 아니고 해피 홀리데이, 즐거운 공휴일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공휴일 정도가 아닙니다.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그분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더욱 주님을 생각하면서 보내는 기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을 생각하고, 이어서 여러 사람들을 열거하며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보십시오. 데마, 그레스게, 디도, 누가, 마가, 두기고, 그리고 알렉산더 등을 비교적 자세히 언급합니다. 이들은 모두 바울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인물들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분석해 보면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뉩니다. 하나는 바울에게 커다란 힘과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누가와 마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또 하나의 사람은 바울에게 상처를 주고 실망을 준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데마요, 알렉산더입니다. 데마에 대해서는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곁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는 처음 주의 일을 함께 감당하다가 도중하차하고 세상 길로 돌아선 사람입니다. 한때 바울과 동역 했던 인물이지만 이제는 그 일을 과거의 추억으로 돌리고 자기 만족의 길을 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실망시킨 사람입니다. 또한 알렉산더에 대해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14절에 보면, 그는 바울에게 해를 보인 인물로 설명합니다. 그것도 단순한 해가 아니라 아주 많은 상처를 주었다고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종종 있어도 이름은 잘 언급하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그의 이름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은 바울에게 적잖은 상처를 준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여기에서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이들을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에게 힘과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은혜를 잊지 않고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이 사람들처럼 위로하고 힘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는 모습을 봅니다. 또한 상처를 주고 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먼저 자신이 이 부분에 상처가 치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공적인 편지에서 좋지 않은 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치유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16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용서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는 뒤를 돌아보면서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며 걸어왔던 여러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생각나는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힘과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입니까? 지치고 고단할 때, 힘들고 어려울 때, 낙심하고 괴로울 때 힘과 위로가 되었던 사람입니까? 그들이 분명 우리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을 그렇게 이끄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늘 주변에 좋은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저는 다윗의 생애를 보면서 이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다윗이 힘들고 어려울 때, 끝까지 그의 곁에서 그의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 때문에 다윗은 쓰러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바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기에 분명 우리 주변에 좋은 사람을 붙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받았던 사랑이 있습니다. 위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생각나야 하고, 그 받은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또 다른 사람이 힘들고 어려울 때 그들에게 큰 용기와 힘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생각나는 그 사람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 혹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고, 실망을 준 사람입니까? 혹 상처를 받았다면 치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마음에 담고 있으면 누구보다도 자기에게 해롭습니다. 그래서 상처는 자기를 위하여 치유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것 가지고 새해를 맞이하면 결코 새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묵은해로 살게 됩니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 받으시기 원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모든 상처가 씻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치료하는 분이십니다. 아프고 쓰린 우리를 고치고 싸매고 치유하는 분이십니다. 이제 내 모든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어 온 몸과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셋째, 마지막입니다. 바울이 이 즈음에 생각난 것은 물론 주님이었고, 그와 함께 지냈던 여러 사람들이었으며, 이제는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신중합니다.

  바울이 쓰고 있는 이 디모데서는 바울 생애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디모데에게 쓴 편지가운데 디모데후서는 더욱 마지막입니다. 디모데후서 가운데 여기 4장은 그야말로 더욱 마지막입니다. 4장 중에 본문은 마지막중의 마지막입니다. 본문에는 이런 배경으로만 마지막을 알 수 있지만, 6절에 보면 더욱 이 마지막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사람이 살 때는 잘 모르다가도 죽을 때가 되면 임종이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바울의 심정이 그렇습니다. ‘이제 끝난다, 이제 죽는다, 이제 마지막이다...’ 바울은 지금 그 순간을 엄숙하게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지금 편지를 쓰고, 또 본문을 기록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이 말씀을 보면 한 말씀, 한 말씀이 결코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바울은 생애 어떤 순간보다도 지금 진지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생각했던 여기 이 마지막은, 그가 떠날 기약이 다가올 때만 떠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는 순간부터 어쩌면 마지막을 몸에 담고 살았습니다. 그가 그처럼 복음을 위하여 고생할 때에도 마지막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성과였습니다. 또한 1세기를 살던 성도의 신앙생활이 죽음과 삶이 순간으로 오가는 현장이었기에 더욱 비장한 각오로 성도를 대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그가 기록한 편지에서 인류와 개인의 종말을 강조했고, 자신도 한 성도로서 주님을 만난 뒤 마지막을 생각하며 나갔습니다. 바울의 신앙, 당시 크리스천의 신앙은 결국 종말신앙입니다. 이것을 빼고 당시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중요한 마지막을 바울은 지금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남은 생애도 늘 생각한 것이 마지막입니다. 그 마지막의 신앙이 바울을 바울 되게 했고,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준 것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가 가장 크게 생각하는 것이 마지막입니다. 이제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습니다. 이렇게 한해가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은 처음과 과정과 마지막으로 흘러갑니다. 불교처럼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일직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성경의 시간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출발이 있으면 마지막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이요, 나중입니다. 알파요 오메가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강조하는 시간이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간은 동일한 것입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일주일을 7일로, 한 달을 30일로, 일년을 365일로 그대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시작이 있고 마지막이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늘 똑같은 시간이지만 결코 같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시간이 있고, 과정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시간도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제 한해가 끝나고, 마지막이 점점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맘때면 무엇보다도 생각할 것이 마지막입니다. 이 마지막의 신앙이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언제나 마지막이라는 자세를 가지고 살면 더욱 진지하고 더욱 신실해 질 것으로 믿습니다. 만약 이 한해를 끝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년으로 미루겠습니까? 만약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 아깝지 않겠습니까? 만약 오늘 드리는 이 예배가 우리의 생애 마지막예배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이 오늘 마지막으로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진심으로 사랑하고 모든 것 다 용서해 주지 않겠습니까?

  호스피스 교육을 받을 때 죽음과 마지막을 깊이 연상하게 하는 훈련이 있습니다. 유서도 쓰게 하고, 상복도 입히고, 심지어는 관에 들어가는 일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순간을 훈련으로 받으면서도 얼마나 진지한지 모릅니다. 유서를 쓰면서 울지 않는 사람이 없고, 관에 들어가면서 몸을 떨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처럼 마지막이 생애 큰 메시지가 됩니다.

  저는 종종 강단에 서면서 이게 내 생애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전에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자주 그런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죽음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매주일 여기에서 설교한 제가 다음 번에는 사라지는 것이 죽음입니다. 지난주에는 분명 내 옆에서 같이 찬송 부르며 예배드리던 사람이 이번 주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내 생애 마지막이라 생각할 때 저는 더 진지할 수 있고, 더 최선을 다하고, 더 거룩한 부담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마지막의 신앙입니다. 이런 자세와 신앙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생각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생각나고, 여러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생각납니다. 이제 크리스마스이 주인공이신 주님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힘과 위로가 되었던 사람을, 상처와 아픔이 되었던 사람들을 통해 인생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신앙으로 모든 일에 진지하게 임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한 주간의 문을 여시고, 남은 생애를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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