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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세상을 살리는 길 - 포기 (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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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가 여름 한 철 꿈같은 울음을 울기위해서는 무려 7년간이나 땅속에서 성장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알에서 애벌레로 또 누에로 커가면서 7년간을 절대의 고독과 싸워 비로소 매미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단 몇일간의 그 시원한 울음과 함께 죽음을 맞게 됩니다.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는 매미의 울음에도 이와같은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만 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삶이 이와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릴 때부터 꿈을 키워 나가다가 일정한 성숙기에 이르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뜻을 이루려고 합니다. 만약에 인간에게 이러한 꿈과 실천이 없다면 삶자체가 무의미하고 보잘 것 없어질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꿈과 실천의 새로운 지평을 철저하게 보여줍니다. 예수가 살던 곳은 갈릴리 입니다. 갈릴리는 로마와 동족들로부터 버림받고 빼앗기도 억압받는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한 복판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그 역시 목수의 일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민중의 한과 고난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새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큰 뜻을 품게 된 것입니다. 불평등과 착취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자유 그리고 평등과 평화가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염원하였습니다. 예수는 그 시대의 아픔과 희망속에서 고민하며 성숙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경쟁과 개인주의로 살벌한 교육을 통해 자라나는 우리의 자녀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판이합니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이 키워가는 꿈과 희망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의 꿈과 희망은 무엇입니까? 개인의 출세를 위해서는 옆의 친구와 싸워 이겨야만 하는 비인간적인 교육 구조속에서 민족과 민중의 구원과는 동떨어진 이기주의적 인간이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름답고 맑은 꿈을 키워가기 보다는 퇴폐와 향락과 우상(인기연예인, 운동성수)에 영혼이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는 가난하셨지만 자기 혼자만 배부르고 영화를 찾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을 던져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고귀한 뜻을 품고 성장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이라고 하는 세례사건은 그가 가슴속 깊이 간직하던 희망을 이제 본격적으로 실천해 나가기 위한 출발입니다. 성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기 위해 세례를 베푼 요한도 스스로 신발끈도 풀지 못한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앞에 나서서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므로 이제 세례를 받는 모든 사람들과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위한 길을 안내하게 된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예수는 이제 목수가 아니라 우리의 구세주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세례는 이토록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세례를 받고 하나님나라로 이끌려 가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숙한 회개와 결단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와 결단이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이전의 생활에서 신앙생활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완전한 변화를 보여 주셨듯이 이전의 나를 완전히 부정하고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거듭남 입니다. 마치 차를 타고가던 운전수가 목적지를 완전히 바꾸듯이 우리의 삶의 좌표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가장 크고 우선되는 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포기야 말로 우리가 살고 세상을 살리는 길임을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전적인 포기의 길이었습니다. 자신을 포기함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원대한 꿈을 이루시고 인류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이를 성육신, 예수의 성탄인 것입니다. 창조주로서의 권리를 버리고 종의 몸으로, 의인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죄인의 자리로 오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의 생애는 전적인 포기로 일관하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의 진리를 붙들기 위해서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오직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이었고 예수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 목숨걸고 달려갔던 길은 참 사랑의 나라 참 근면의 나라 참 진리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것 하나를 얻기 위해 그가 가장 중요해 마지 않았던 모든 것을 헌신짝처럼 버렸던 것입니다.

누가 더 충실한 예수의 제자냐 하는 것은 누가 더 많이 예수를 위해 자기의 것들을 포기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독교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종교가 아니고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희생입니다. 예수의 희생을 알지 못하고는 기독교를 알지 못합니다.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부유하나 너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시었다. 그것은 그가 가난하게 되심으로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시기 때문이다."[고후 8:9]
이정신을 모르고는 기독교를 알지 못합니다. 남을 위하여 내 몸을 종으로 만드는 마음을 모르고는 아직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이렇듯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의 뒤를 따라 포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포기의 원리를 삶에 적용하여 살아간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마리아같이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포기 즉 "당신의 계집종입니다. 다만 당신의 말씀하신 것이 저에게서 이루어 지기를 소원합니다. "  라는 용기와 결단이 예수를 잉태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를 자신의 생속에서 잉태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바로 마리아와 같은 신앙적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명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정든 고향땅을 떠나는 아픔과 100세 얻은 자식을 포기하는 고통이 그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문에 감격하고 눈물흘리고 흐뭇해 하십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가정과 자신들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했으며 심지어 목숨도 포기함으로 구원의 길을 넓혔던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중요하다면 그들에게도 가정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식이 중요하다면 그들에게도 자식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돈과 명예가 중요하다면 안식과 편안이 중요하다면 그들에게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자신의 야망을 포기하고 참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까지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그리고 올 한해동안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 아무것도 포기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날에 주님께서 " 너희가 누구인지 도무지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포기를 집요하게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의 욕망과 안일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자들 속에 있습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006년 눈부신 새해에는 무엇을 하나님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포기 하시렵니까?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부러워하면서 왜 우리는 그의 희생과 포기의 신앙에 대해서는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까? 신앙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왜 이토록 인색하십니까? 하나님이 이보다 더한 것을 시켜도 우리는 순종해야 할 터인데 이토록 방자하게 주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다만 우리는 그분의 뜻을 이루려고 이땅에 왔을 터인데 아담이 자신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여 인류를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트렸던 것처럼 우리의 아집과 욕망이 우리의 안일과 게으름이 자신은 물론 우리주변에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거역하는 것은 아닙니까?

왜 실패하였습니까? 교회들이 서로 비방하고 일치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서로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헐뜯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욕망들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자신을 참으로 버리지 못해서 오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위해 전적인 헌신을 다짐하고 자신의 안일과 욕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자신을 던져 봅시다.

2006년도는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를 세가지씩만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대해 봅시다.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과 축복하심을 기대해 봅시다. 가없으신 하나님의 은총이 늘 충만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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