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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성탄의 의미-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 (눅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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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사람들의 마음에는 왠지 모를 흐뭇함과 감사와 기쁨이 있음을 봅니다. 그 마음에 화해와 용서 그리고 매듭의 풀림이 있는 것을 또한 봅니다. 전쟁 중에도 휴전하고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며 원수진 마음도 풀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한결 같이 받게 되는 성탄의 신비가 주는 힘입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부터 시작되어 왠지 모르게 마음에 큰 기쁨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아무런 현실적인 다른 요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마음에 기대가 되는 것은 성탄이 주는 영적인 신비의 힘이라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서 또 우리를 위하여서 이 땅에 오셨다니 하는 생각은 자다가 생각해도 기쁜 일입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시고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에게 역사의 시공간을 떠나서 그 예수님 한분 때문에 온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움직이고 기뻐하고 경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와 우리 삶에 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분임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힘이나 어떤 조작된 전달이나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없는 신비한 것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모습이나 지상에서 사역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신 후에 보내주신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그의 나라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분이 즐겁고 기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백성인 우리를 기쁘게 만드시기 위하여 그분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높은 자리에 오시지 않고 마구간에 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공생애 동안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수욕을 겪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자녀인 우리에게 구원의 성취라는 목표를 이루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이라는 기쁨을 선물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실제로 그 기쁨을 주신 우리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주의 성탄이 우리들에게 끼치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바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첫 번째 생각해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성탄의 목적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이 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것 자체가 백성들에게 미칠 큰 기쁨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오늘 11절과 12절을 보면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에게 목격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 전제하기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모든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와 관련되어 그 탄생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에게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 마음에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기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성도님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여러분 기쁘십니까? 지금 여러분 기쁘십니까?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있다면 우리는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기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목마르면 물을 마시면 목이 축여지고 시원하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기쁨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품으면 우리 마음은 기뻐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믿음의 백성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기쁨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어떤 상태가 될 지라도 우리는 우리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그 기쁨으로 우리의 삶을 극복할만한 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참된 은혜와 은총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장난을 잘 안하는데 저희가 자랄 때 뒤에서 간지럽히면 아이들이 웃으면서 서로 깔깔거리고 웃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간지럼 태워도 웃지 않으면 우리는 뭐라고 얘기 하냐면 “얘는 사람도 아니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는데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성도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는데 우리 마음에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성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웃기면 웃어야 하고 슬프면 울어야하고 때리면 괴롭고 아프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는데 우리 마음에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병들었거나 잠자거나 주님과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슬픈 일 보아도 눈물 흘리지 못하고 우스운 일 보아도 웃지 못하고 감동되는 일 보아도 무감각하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이 깨진 사람입니다. 우리 마음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성탄을 생각만 해도 그 마음에 기쁘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즐겁고 노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수많은 선지자들이 갖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를 예언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그들이 바라보는 메시아를 생각만 해도 고통 중에도 메시아를 그리기만 해도 그들의 마음에 벅차오르는 감동을 이길 수가 없어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 벅차오르는 꿈을 억지할 수 없어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꿈을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예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순교자들 믿음의 선각자들은 순교의 지경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마음에 기뻤기 때문에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도 그들의 마음에 기쁨과 감격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에 고통을 능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1장 18절에서 어떻게 하든지 복음이 전해지기만 하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말씀합니다. 20절에서 연이어 고백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삶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뻐할 수 있는 참된 기쁨의 근원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정도의 기쁨이냐하면 우리가 목말랐을 때의 잠시 물 한모금 주는 정도의 기쁨이 아닙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는 우리에게 누구의 삶과 비교해 봐도 더 크고 좋은 것이 틀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보면 우리는 작은 기쁨, 큰 기쁨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작은 기쁨을 누리다 큰 기쁨을 누리면 우리는 작은 기쁨이 별것이 아닌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상위개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가끔 신문을 읽다보면 언론 플레이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정보에서 잘못이 있어서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여론이 형성이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건 하나를 터트려서 사람들의 관심을 그리로 쏠리게 해서 희석시켜버리는 이와 같은 정치적인 술수를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할 때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을 체험하고 느끼게 되는 순간 다른 기쁨, 그것이 우리들에게 별로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느껴도 어려움으로 느껴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이 너무 커서 거기에 우리는 심취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바람 부는 날이 있고 눈비 오는 날이 있고 고통스러운 날이 있지만 로뎀 나무 밑을 찾는 엘리야처럼 우리 삶의 마감을 이루고 싶은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큰 기쁨이 있으면 상처받은 심령이 치유 받게 되고 내 상황의 답답함 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기뻐지게 되며 우리 삶의 밝은 빛이 다가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배반과 상실의 시대입니다. 불신과 반목의 시대입니다. 꿈이 깨지고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이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이와 같은 시대입니다. 진실을 찾아 방황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오시면 그와 같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역사로 인하여 기뻐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우리들에게 큰 기쁨이시기 때문입니다.

성탄이 우리에게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를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오셨습니다. 12절을 보니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왕궁에서 나실 수 있었고 예수님의 능력은 호화로운 침실에서 나실 수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마다하고 참담한 말구유 속에 강보로 싸여 이 세상에 임한 것은 우리가 생각할 만큼 낭만적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누구에게든지 갈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실패한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가셔서 기쁨을 줍니다. 낙심한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가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가셔서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질 때 내 생활 속에서 궁핍함이 있을 때 그리스도가 없으면 나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 할 때 그리스도만이 나의 삶을 다시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마구간과 같은 참담한 심정의 마음일 때 그때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셔서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어 주시고 우리들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 되어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에게 주실 기쁨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주실 생명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은 무엇입니까? 내가 내 기쁨을 위하여 내가 내 누림을 위하여 내가 나 하나를 위해서 사는 수준은 이미 지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향하여 나아가는 은총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고 하나님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으며 그 권세와 기쁨을 가지고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세상에 그 기쁨을 베푼 것처럼 우리의 기쁨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 교회가 3기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성장하고 이제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 이교회는 새로운 시작의 발걸음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내 축복의 날을 위한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는 내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이 있을 것을 우리는 기대하며 나의 기쁨이 아니라 내게 주신 기쁨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기쁨의 단계로 우리는 가는 것입니다. 교회도 존속을 위하여 교회도 성장과 자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 모든 것이 이제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있는 것이며, 이 교회의 성도들이 삶 역시 우리의 삶 하나 누리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쁨의 뜻을 펼치기 위하여 우리는 존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축복받기 위하여 헌신하는 백성들이 아니라 주님 앞에 온전한 헌신과 주의 백성의 뜻을 완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한 사람일 뿐입니다. 인간의 육신적인 면으로 생각하면 요셉과 마리아가 볼 때 가슴이 아픈 통한의 심정을 가지고 이와 같이 말구유에서 사랑하는 예수님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굳이 이러한 방법을 택한 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가지 못할 사람이 없기 위하여 더 이상 낮은 사람이 없기 위하여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의 자리에 가셨으니 우리도 이와 같은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가 이와 같이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이라는 사실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사람들이 태어나는데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사람에게 큰 미칠 기쁨이라는 사실입니까? 오늘 13절부터 14절을 보면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자체는 우리 인간들과는 달리 천군과 천사들의 화답 속에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이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것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오래전부터 예언되어지고 오랜 성취 속에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7장 14절에서 말씀 합니다. 아하스왕 시대에 백성들에게 고통과 학대를 받고 있는 고통의 시대 속에 예언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아하스의 악정 가운데 괴로워하는 백성들에게 선한 왕이 나타나서 너희를 구원하시겠다는 뜻을 말합니다. 짧은 안목에서 히스기야 왕이 나타나 유다의 선한 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사적인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분명하게 의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는 이 이사야의 예언을 반복하여 선포합니다. 예레미야 31장 15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으나 그 때문에 도로 기뻐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짧게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아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어미들의 마음에 위로를 주는 것을 예고하지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죽게 되는 많은 지상의 자녀들과 그들로 인하여 눈물로 통곡하는 어머니들의 눈물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여 다시 그것을 회복하는 메시아의 나라의 의미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 8절에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권능의 역사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신 것은 신적인 인도하심을 이루신 것을 봅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을 보면 마리아와 요셉이 정혼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본질자체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자체입니다. 요셉이 조용히 끊고자 하지만 천사가 나타나서 사실을 알려주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말해주게 됩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지만 헤롯의 꼬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다른 길로 갑니다. 헤롯이 이것을 알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어린 아이들을 다 죽이지만 예수님은 미리 지시를 받아서 애굽으로 피한 이후입니다. 모든 것 하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어떠한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은 철저하고 세밀한 간섭에 의하여 예수님을 한걸음 한걸음 그의 길로 인도하시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 인간들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천사들의 찬송 속에, 뿐만 아니라 천사들에 의하여 수많은 꿈속에 천사들의 예언을 통해서 그리고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서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감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또한 보여 줍니까? 어떠한 악인의 방해도 메시아의 사역을 가로막을 수 없음을 봅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을 찾아서 왕이 있는 곳을 문의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줍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얘기합니다. ‘너희가 왕을 경배하면 나에게 와서 얘기하라 나또한 왕을 경배하리라.’ 그러나 사실은 찾아가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밤에 꿈에 헤롯에게 가지 말 것을 지시받고 헤롯에게 가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헤롯은 속았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어린아이들을 다 죽이지만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애굽으로 천사들의 인도함을 받아 피신한 다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인간들의 힘으로 막을 수도 없고, 예수님의 모든 일정은 우리 인간들의 계획가지고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특별한 신적인 섭리의 역사하심에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그의 사역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으며 그 인도하심으로 앞으로도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세 번째 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기쁨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온 백성들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오늘 성경을 보면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입니다. 두 번째는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입니다. 세 번째는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요셉과 마리아라는 사람입니다.
이 세 부류의 특징을 보면 특별한 특징이 있습니다. 목자들은 ‘밤에 자기 양떼들을 지키더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실하게 자기 직무를 감당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추운 겨울에 밖에서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며 경배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무척이나 감동스런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감동스러운 사실만은 아닙니다. 영하 15도 20도가 되는 추운 겨울날 밤에 움막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양떼들을 지키기 위하여 추위 속에 고통하며 떠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일에 그렇게 열중하고 있는 도중에 천사들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천군과 천사의 화답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여러분 하늘나라 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평상시에 자기 일에 성실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면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두 사람이 맷돌을 갈다가 두 사람이 밭을 갈다가 그리고 그 중에 한사람이 천국에 올라갑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면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교회에 다 와서 기도회 할까요? 그런 건 아닌 거 같습니다. 그냥 직장에 출근하시다가 그리고 거기서 성실하게 일하시고 믿음대로 그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일하다가 여러분은 천국에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적어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주님 앞에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이루어지는 온전한 주의 뜻임을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자기 직무를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만 말씀대로 살지만 그것의 최종적인 결정체는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최선을 다하여 우리 삶의 직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자기 일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를 잘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일에 성실함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소식을 듣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경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방박사를 봅니다. 주님의 사자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헤롯과 약속을 했지만 헤롯의 계략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자가 말씀을 했을 때 즉각적으로 그 말씀을 듣고 빨리 가서 라고 말씀하죠. 빨리 가서 경배하고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그들은 또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위기를 모면케 하는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을 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실 때 신속히 기쁨으로 그 길을 따라간 사람입니다. 목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사들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는 즉각적으로 순종했던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경건하게 준비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모친이 된 마리아, 그리고 육신의 아비가 된 요셉 마리아는 경건한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잉태할 수 있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자기와 정혼하고 동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잉태했을 때 조용히 끊고자했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내가 의로워지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불의한 사람은 되지 않습니다.’ 요셉은 내가 의로워지려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내가 옳다는 것을 증거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내가 자리에 서기위해서 다른 사람을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이와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요셉은 이런 정도의 의로운 사람이었던 것을 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결국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예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황금과 유약과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너무나 자랑스러운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에게도 꺼내 보이지 않고 그것을 가슴에 품었다가 예수님을 경배하게 될 때 그 자리에서 비로소 꺼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랑하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앞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리려고 애썼을 뿐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귀한 마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기대하는 마음,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성실된 마음, 하나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려는 마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중심으로 헌신하되 우리 자신의 모습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이루기 위하여 나아가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쁨의 삶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성탄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주의 은혜에 동참하는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 감격이 있으며 내가 그리스도를 생각만 해도 기쁨이 있으며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주님 앞에 어떻게 살아드릴까에 대한 진정한 감동이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탄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는 주의 귀한 성도님들에게 성탄의 기쁨이 마음껏 누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의 근심이 씻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감격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능력이 되어 우리 삶의 연약한 부분이 강해지고 우리 마음속에 소원하던 바가 이루어지고 우리 마음에 계획하던 바가 이루어져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인 성탄의 소식이 우리 생활의 실제적인 능력의 소식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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