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탄] 이렇게 경배하라 (마 2:1~12)

  • 잡초 잡초
  • 245
  • 0

첨부 1


  한 방송국의 기자에게 수신자 부담으로 국제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처음에는 장난전화이려니 하고, 한 번 두 번 전화를 끊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화가 계속 이어지면서는 기자에게 이상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수신자 부담을 약속하고 받아든 수화기 너머로 절박한 호소가 흘러나왔습니다. 
  “제발 저를 좀 도와주세요.”라는 긴박한 소리의 주인공은 30대 후반 정도의 북한 말씨를 쓰는 한 여성의 목소리였습니다. 기자는 직감적으로 탈북자라는 것을 느꼈고, 그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이 여성은 5년 전에 탈북했고, 그만 중국 공안당국에 붙잡혀서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었습니다. 그녀는 북한에서 붙잡혀 살다가 2년 전 쯤 다시 탈북해서 현재 심양에서 숨어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곳에서 조선족 남자를 만났고, 그와 살림을 차렸습니다. 대한민국으로 들어올 차비를 준비하느라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만 그 동거하는 조선족 남자가 이 돈을 몽땅 훔쳐가지고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의지할 곳도 없고 의지할 장소도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이 탈북 여성은 우연히 위성방송에서 한국의 CBS방송을 보게 되었다가, 무작정 전화기를 돌려서 CBS의 한 기자와 통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한국 영사관에 들어가서 도움을 요청하려고 해도 너무 경비가 삼엄해서 들어갈 수가 없고, 교회에 찾아갔더니 너무나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여인의 연락을 받고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탈북자 단체에 상황을 알려주는 것 밖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다급해하는 그 여인에게 그냥 기다리라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던 기자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자괴감을 느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짤막한 인터넷 뉴스를 보면서 탈북자들을 위해서 너무나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한국 정부에 대해서 실망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대북사업을 펼치면서 많은 것을 북한에 퍼다 주면서도, 정작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너무나 소극적이고 인색하다는 사실, 굶주리고 학대받다 못해서 생명을 걸고 국경을 넘은 탈북자들이 같은 동포인 대한민국으로부터도 영접 받지 못한다면 도대체 그들은 어디에 가야한단 말입니까?

  저는 이 탈북자의 아픔을 보면서 동일하게 자기 백성에게 영접 받지 못했던 한 분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이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로부터 거부당하고 거절당했던 분이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가장 슬픈 구절이 있다면 요한복음 1장 11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땅에 옴에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않았으나”...

  이런 일들은 2천년전 에만 있었을까요? 베들레헴의 한 여관 주인의 실수로만 돌릴 수 있을까요? 그 일은 바로 오늘날도 반복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 공동체 속에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 영접을 거절하는 아픔들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동방에서부터 온 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오는 기사가 소개됩니다. 박사들은 그 당시 일종의 점성술가요, 천문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별을 관측하다가 비범한 한 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민 14:17에 보니 “한 별이 야곱에게 나오며”라고 소개하는데, 그들은 그 별이 메시아의 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별을 따라서 예루살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 동방에 있는 박사들이 어떻게 메시아의 별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지를 추측을 해보자면, 다니엘은 이방 땅에 가 살면서 그 나라에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그 나라의 모든 박사들의 어른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니엘이 이방 땅에 가서 뿌린 그 아름다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고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또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으로서 애굽 땅으로 가서 국무총리를 지냈습니다. 그는 박사와 술객들과 함께 왕의 꿈을 해몽했던 기억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오던 박사들이었지만 그들은 메시아의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와서 “이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이가 어디 계시느뇨?”라고 묻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 메시아의 탄생을 박사들이 전했을 때에 헤롯은 당황하며 거짓경배를 계획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 2~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아멘.

  오늘 이 3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왕이 당황한 것은 물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라고 말씀합니다.
  헤롯왕은 왜 당황했을까요? 나 외에 또 다른 왕이 온다는 것은 그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험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헤롯의 통치하에 고통당하던 예루살렘사람들은 왜 술렁거렸을까요? 이 왕도 모시기 힘든데, 또 다른 왕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을 당할까라는 우려 때문에 그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땅은 헤롯 대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고 에돔인이지만, 로마 황제의 환심을 사서 유대와 그 인근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헤롯은 매우 교활하고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예루살렘 대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세금을 감면해 주었고, 자기의 금접시를 녹여서 식량을 사들이는 정치적인 수완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헤롯은 매우 난폭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아내와 장모를 살해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장남과 다른 두 아들도 죽일 정도로 의심이 많고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주석가 바클레이에 의하면 헤롯은 그가 최후에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시민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사람 하나를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내가 죽는 순간 그를 같이 죽여라.” 왜 그렇게 했을까요? 내가 죽으면 아무도 나를 위해서 울어 줄 사람이 없는 것을 알기에, 존경받는 인물이 나와 동시에 죽을 때, 그들의 애곡이 나를 위한 애곡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악한 왕이 통치할 때에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대조적인 두 왕을 보게 됩니다. 유대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세상의 왕을 대표하는 헤롯왕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왕이며 인류의 참된 왕이신 예수님이, 동시대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이것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묻습니다. “유대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겠느냐?” “유대 베들레헴에서 날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헤롯대왕은 박사들을 불러서 이야기합니다. 7~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아멘

  여러분, 오늘 헤롯이 진정으로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박사들에게 그 거처를 물었을까요? 경배는 커녕 아기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무서운 음모를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 16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아멘. 
  아기 예수를 찾을 수 없자, 그는 그 베들레헴 지역에 무려 역사적으로 1만 2천명의 아이를 다 살해했습니다. 가정마다 한 살 두 살 아이들이 살해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가정의 아픔과 고통이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이렇게 헤롯대왕은 악한 음모를 드러내고는 했습니다.

  오늘 이 땅에도 헤롯처럼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매년 성탄절에 우리 가운데 오시는 그 분을, 자기 마음속에 영접하기를 거부하는 이 들입니다. 자신이 스스로의 왕좌에 앉아서 자신을 지배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결국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경배할 수 없습니다. 아니 내 마음의 왕좌를 예수께 내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영역을 침범할 수도 없고, 내 영역에 들어올 수도 없습니다. 이런 명목상의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고 찬송은 드리지만,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기는 거부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조금도 손해 볼 수도 없다는 입장입니다.  아내가 너무 열심히 예수를 믿으면, 예수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결코 예수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모셔드리기를 거부하는 헤롯왕과 같은 그런 잘못된 예배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또 한 부류를 발견하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은 당시대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필사하는 일을 하고, 율법을 연구하는 것을 그들의 일생의 일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성경에 박식했습니다. 헤롯왕에게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에 나겠느냐?” “예!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그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미가서 5:2을 이야기할 정도로 성경에 능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경배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들은 결코 예수님께 나아가지도 않았을 뿐더러 예배하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머리로만 믿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하자면 박사들이고 능통하지만,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장소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배하지 않습니다. 아기 예수 앞에 나아갈 발이 없습니다. 그분 앞에 예물을 드릴 손이 없습니다. 머리만 있는 단순한 지식인. 이것이 바로 서기관들의 비극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비극은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는 교인들로 교회가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기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내가 기도한대로 살게 하소서. 내가 말씀에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성탄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배워야 될 올바른 예배자의 태도란 무엇일까요?

  동방박사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에게서 진정한 경배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동방박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멀리 페르시아로부터 왔습니다. 주석학자들은 멀리 '동방’을 페르시아로 보고 있습니다.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 지역입니다. 그 멀리에서 그들은 아기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먼 길을 달려왔다는 사실에 주목해 봅시다. 
  그 당시 여행이라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생명을 건 결단입니다. 희생과 헌신이 따르지 않으면,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이 먼 길을 달려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2절을 보니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예배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추운 날씨에, 이 눈길에 이 예배당에 나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곗돈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친교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진실한 경배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 길을 달려온 동방박사들로부터 진정한 예배자의 헌신과 희생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깨닫게 되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동방박사들은 엎드려 아기예수께 경배했습니다.

  성경 11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아멘
  그들은 ‘아기가 있는 집에 들어가서 엎드려 아기께 경배’했습니다.
  최고의 예배란 무엇일까요? 최고의 경배란 무엇일까요? 바로 그 분의 발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실한 예배자가 가져야 될 첫 번째 조건은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뻣뻣한 목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누추한 죄인인지, 내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자만이 진실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페르시아 지역에서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학식과 권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의 작은 동리에 태어나는, 그것도 마굿간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배하고 있는 것 만으로 그들의 예배자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예배자입니까? 다리를 꼬고 앉아, 오늘 설교가 어떤가, 오늘 기도가 너무 길지 않은가, 오늘 찬송은 어떤가 평가하는 예배자는 아닙니까?

  한 유명한 문인들의 모임 중에 안건을 갖고 논의 하는 시간이 있었답니다. 한 사람이 문득 “여기 세계적인 문인들이 다 모여 있는데 만약 이 자리에 실낙원을 지은 밀턴이 들어온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맞이할까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야, 그 위대한 문인이 온다면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맞이할 것입니다.”라고 사람들이 화답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여러분들, 만약 위대한 셰익스피어가 문을 열고 걸어온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할까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고, 그에게 찬사를 돌릴 것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또 한 사람이, “만약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신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할까요?"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는 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분의 발 아래 다 엎드려 그 분을 경배할 것입니다.”라고 한 마음, 한 소리로 고백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지금 의자에 앉아 예배드리지만 우리의 마음과 몸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 분만을 높이는 것이고, 그 분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태도입니다.

  세 번째로, 동방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 예수께 드렸습니다.

  황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값지고 불변하는 성질의 귀중품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유향은 값비싼 향유로써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례 할 때 사용하는 흰색의 액체입니다. 몰약은 시체를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 내지는 마취제로 사용됩니다.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황금은 메시야 왕권을 상징합니다.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몰약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며 예수님의 인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그 먼 길을 달려왔을 뿐 아니라 그 당시 가장 귀히 여기는 세 가지 예물을 아기 예수께 드렸습니다. 
  여기에 바로, 최고의 경배의 조건이 있습니다. 최고의 예배에는 최고의 예물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능력이 없고, 감격과 기쁨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찌 보면 그것은 진정한 예물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예물은 오늘날 우리들의 헌금이라는 형태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헌금을 드릴 때 적게 드리냐 많이 드리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예물에 희생이 있느냐, 감격이 있느냐, 눈물이 있느냐 하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세금 고지서 내듯이 등록금 내듯이 인색한 마음으로 체면치례로 낸다면 아무리 액수가 큰 헌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입니다. 물질이 없어서 아무것도 드릴 수 없더라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나온다면, 그것은 최고의 예물이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셔야 합니다. 시편 51편 17절에 보니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그런 예물을 드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동방박사들은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경배 했습니다.

  12절 말씀을 읽어볼까요?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박사들에게 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헤롯에게 가서 아기 예수의 거처를 고하지 말고 다른 길을 돌아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실 이 길은 위험한 길입니다. 헤롯 대왕의 명을 어기고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경배자의 모습은 예배 후의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예배를 잘 드렸어도 순종의 삶이 없다면, 순종의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헛된 예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혼자 예배 다 드리고, 은혜 다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배 끝나고 나면 아무런 순종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박사들은 헤롯왕의 말을 거역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다짐했습니다. 순종이 있는 예배, 이것이 진정한 경배자의 모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경배하며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순종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를 믿어도 내 성격대로 예수를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순종은 내 방법을 버리고 내 성격을 버리고 주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방법대로 하려고 하면 늘 문제가 따라옵니다.

  이번 성탄절은 우리 교회에 참 의미가 깊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이기도 하고, 1년동안 열심히 진행되어왔던 성전 건축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어 새성전에 입당하는 주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올해는 우리 교회가 이 땅에 태동한지 창립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런 해, 마지막 주일에 새성전에 입당한다는 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모릅니다.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의 피와 살을 우리를 위해 나누어 주시고,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하셨는데 이제 우리가 새 성전에 성탄절에 입당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만 세상에 전하는 출발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와 말씀으로 성탄절을 준비하고, 최선을 다해서 새성전 입당을 준비하십시다. 돌아오는 성탄절 예배는 정성이 담긴 예배, 우리의 희생이 있는 예배, 겸손과 예물이 있는 예배 , 순종이 있는 예배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