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탄] 왜 주님이 이 땅에 오셨나? (사 61:1-3)

  • 잡초 잡초
  • 268
  • 0

첨부 1


2005년도 성탄을 맞이하는 영암교회 성도님들과 가정위에 하늘의 평화와 기쁨이 가득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성탄의 정신은 한마디로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가 이 세상에 와서 하실 일 세 가지를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슬픈 자에게 위로와 화관을"(사61:1-3).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슬픈 자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정신이요 메시야의 정신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 시달리면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절망하는 순간에 이사야를 통하여 주신 소망과 은혜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야를 보내 주셔서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구원하시겠다는 놀라운 계획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구원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당에서 이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시고 이 예언이 자신에게서 이루어 졌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이 메시야 예언은 오늘 성탄절을 맞은 우리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입니다.

오늘은 아기 예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힘든 어둡고 무질서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날입니다. 삶은 언제나 태어남의 축제입니다. 사람이 태어나기 전 아직 세상엔 이름 있는 것들이 없습니다. 아기가 울 때 만물이 깨어나 비로소 살아 숨 쉬는 세상이 됩니다. 태어남의 이야기가 일생의 이야기 영원의 이야기입니다. 태어남의 이야기가 꿈의 이야기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태어남이 하늘의 영광이요 땅의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

아프리카 선교사가 원주민 청년을 전도하여 성경의 진리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그 청년은 모든 걸 암송할 정도로 잘 배웠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선교사는 그에게 세례를 주며 말했습니다. "이전에 너는 이교도였으나 이제 크리스챤이며, 이전에는 길고 부르기 어려운 이름을 가졌으나 이제는 사무엘이라." 그리고 선교사는 사무엘을 그의 요리사로 고용했습니다. 선교사는 사무엘에게 "금요일에는 고기 요리를 절대로 금하고 대신 생선 요리만을 만들어라"고 엄격히 지시를 했습니다. 어느 금요일 날 집에 돌아와 식탁을 보니 온통 육류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화가 난 선교사는 "사무엘! 금요일에는 고기 요리를 하지 말라고 했잖아!"하고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당당한 목소리로 "시장에 갔더니 생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고기를 샀습니다. 그러나 잘 될 거예요. 왜냐하면 고기를 이미 생선으로 변화시켰으니까요" 선교사는 "바보 같으니라고! 어떻게 고기가 생선이 된다는 말이냐?"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사무엘이 말하기를 "선교사님, 염려마세요 제가 물을 떠다가 고기에게 세례를 주며 이렇게 말했지요. '이전에 너의 이름은 고기였으나 지금은 생선이라 부를 지어다' 하구요.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러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아기가 태어나서 최초의 몇 분(分) 동안에 사십여 가지의 신체적인 변화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 거듭나는 사람도 이렇듯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멸망 받을 죄인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뀝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절망적인 이 세상이 살 가치가 있는 소망으로 바뀌어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매일 매시 불평불만이 매일 매시 찬송과 감사로 바뀝니다.

아이가 아무리 어른만큼 자랐다고 할지라도 철이 들어야 어른이라 할 수 있고 자기 몫의 일을 하는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육신이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도 교회를 다니는 년 수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철이 들어야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쓰임 받는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철이 들기 전에는 부모의 은혜가 고마운 줄 모르고, 매사 피동적이고, 이기적인 자세로 살아가지만, 철이 들게 되면 부모가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를 알게 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되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철이 들기 전에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자신의 필요를 하나님께 요구하는 기도는 많이 하지만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철이 들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감사한 줄 알게 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되는 지를 깨닫고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를 믿고 그 같은 변화가 일어나게 될 때 그 변화는 그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 속에 변화가 연속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주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같은 신앙의 변화는 머리로 깨닫고 가슴으로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방향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방향 전환하는 전인적인 삶의 변화가 동반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 있어서 그 같은 변화는 목사와 같은 어느 특정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필수적이고 일반적인 하나님의 기대와 요구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로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린이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목사도, 장로도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가치관, 목적, 습관, 다 변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어떤 때는 성령마저도 인간의 본질을 변화시키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몰라서도 변화되지 못하고 알고도 변화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몰라서 고치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알고도 못 고치는 것은 더욱 이해가 안 됩니다. 상담을 해 보면 자기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교만했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교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남을 속였다고 고백하고 회개하여 믿고 돈을 빌려주었더니 남의 돈을 또 떼어먹고 달아나 버리는 것입니다. 거짓을 말하고 거짓을 해결하지 못하고, 죄를 인정하면서도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습니다. 불효를 말하며 계속해서 불효의 길을 가고, 불충성을 고백하고 여전히 불출성의 길을 갑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던 것을 회개했다고 말하고는 또 같은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과연 진정한 변화는 무엇일까요?

변화는 점진적 변화와 순간적 변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삭개오나 사울은 순간적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즉시 그의 모든 것이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재산의 절반을 갈라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순간적으로 변화된 사람이기도 하지만, 또한 점진적 변화를 이룬 사람이기도 합니다. 얍복강 가에서 순간적으로 변화되어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았지만 그 후 많은 고난을 통하여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노년에 요셉을 따라 애굽에 갔을 때 성화된 인격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성도들은 대부분 이 두 가지 변화를 다 경험하게 되고 또 경험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도 남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도록 변화되는데 이것은 순간적 변화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나서 입맛도 변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을 때 큰 변화를 함께 경험하면 그 사람은 후에 고난을 적게 당합니다. 구원을 받고도 롯처럼 돈 좋아하고, 인색하고, 농담 잘 하고, 자식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면 천하고 추하게 됩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혈서를 써도 고쳐지지 않는 나쁜 버릇이 쉽게 고쳐지고, 절제력이 없는 사람도 절제력이 생깁니다. 성령을 받으면 창조적 생각이 생기고, 영적 가치를 알게 되고, 화평을 나누게 되고,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영적 설득력이 생기며, 반대의견도 수용할 수 있게 되고, 주위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게 되고, 그리고 이웃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갖게 됩니다. 또한 고집을 버리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이기적인 사람이 자기의 모든 재능을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게 되며, 강력한 인내심이 생기며, 뼈 속 깊은 미움을 품지 않고, 그리고 남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비교적 무의식적 변화는 점진적 변화에 속하고, 의식적 변화는 순간적 변화에 속합니다. 그러나 늘 기도하고 자신과 싸우고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어느덧 "아니! 내가 벌써 여기까지 왔나?" 깜짝 놀랄 만큼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없는 것이 생기고 있던 것 중에 없어져야 할 것이 없어집니다. 죽어 없어지는 죽음의 변화도 경험하고, 살아 생겨나는 창조적 변화도 경험합니다.

위기가 맞이한 사람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두 가지가 함께 되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이 변해야 하고 두 번째로는 먼저 자신이 변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닭이 울지 않고 개들은 짓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닭이 울지 않는 것은 현대인들은 일어나야 할 시간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는 다 시계를 가지고 있어서 제가 일어날 시간에 알아서 잘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개가 짖지 않는 것은 모두 도둑놈이라 항상 짖고 있을 수 없어서 이제 포기해 버렸다고 합니다. 이 개의 학설에 의하면 밖에 있는 놈이나 안에 있는 놈이나 다 도둑이란 말입니다. 이 개의 말이 맞는다면 사정을 하겠다는 사람이나 사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나, 여당이나 야당이나, 부패를 주장하는 언론이이나 정부나 다 부패했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냉소주의와 불신만 가득 차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내 마음에서부터 변하려고 하지 않고 변화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진정한 변화는 먼저 내가 변해야 하고 그리고 본질이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변화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농부가 너무 예뻐서 한 마리를 집안으로 들여왔습니다. 그는 돼지를 깨끗이 씻기고 발굽을 닦아주었고 돼지에게 향수를 뿌려주고 목에 리본까지 달아 준 다음 돼지를 안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돼지는 제법 멋있어 보였습니다. 분명히 붙임성 있는 애완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 그 돼지는 안방에서 뛰쳐나가 집 앞뜰에 있는 진흙 웅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돼지의 본성 자체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는데 인간 본성이 변하지 않으면 잠시 후에 곧 예전의 모습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변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그들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질이 변하지 않으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이 변하면 행동은 자연이 변합니다. 행동도 변하고 얼굴도 변합니다. 50대 이후에 얼굴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아름다움도 화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가 나쁘고 마음이 불편한 여자들은 화장을 하면 할수록 더 흉측합니다. 외적 미(美)도 속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으면 사람의 얼굴이 변합니다. 은혜스러움도, 분노도, 미련도, 정직함도, 색(色)끼도, 다 얼굴에 나타납니다.

내가 변해야 변화가 일어난다.

사람들은 네가 변하면 나도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내가 변하면 남편도 변하겠다고 말하고, 남편이 변하면 아내도 변하겠다고 말합니다. 알콜 중독자와 결혼한 한 여인의 고백입니다. "나는 내 노력으로 남편을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온갖 노력을 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나는 무력감에 시달렸고 패배감에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저는 '주님, 저는 무능합니다. 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제 결혼 생활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둘이 다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변화는 천천히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마음을 남편에게 쏟아 놓을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의 사랑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고백했습니다. 그는 진지하게 나를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날마다 우리가 이제 서로에 대해 갖게 된 사랑과 존경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나부터 바꾸어 놓으시고 남편도 바꾸셨습니다." 아내가 변하여 남편을 구한 경우는 참으로 많이 봅니다. 그냥 내가 변해 버리면 너는 따라서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때때로 바람직하지 못한 위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목사와 집사 사이에도 그런 일이 가능합니다. 그런 경우 기도를 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복수하고 싶어서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 때 기도하는 사람은 세 가지로 기도합니다. 먼저 저 원수에게 벌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경우입니다. 다음으로는 그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에는 내게 잘못이 없고 저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오래 하다보면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바꾸어 놓으십니다. "주여! 나를 먼저 변화시켜 주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회개하고 변했더니 그 사람도 변하더란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진정한 변화를 이룬다.

본질적 변화는 주님을 만날 때 가능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혹 용광로 속에서 쇠가 녹지 않는 길은 있어도 성령의 불길로 녹지 않을 죄는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변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제일로 쉬운 것이 있다면 마음 뒤집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제일로 어려운 것이 마음 뒤집기입니다. 미움도 뒤집기만 하면 사랑입니다. 불충성도 뒤집으면 충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 마음을 만드신 주님을 만날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변화를 느끼고 변화를 보여주고 변화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켄 블랑카드>(Ken Blancard)라는 교수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변화에 대한 호기심은 있으나, 즉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지식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둘째는 자세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셋째는 행동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넷째는 조직의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변화를 원하면서 또 변화를 두려워하는 모순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런데 변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하셨습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목적도 가치관도 취미도 변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 "머리의 회심과 가슴의 회심, 돈지갑의 회심"을 주장하였습니다. 지적 변화도 일어나야 합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고 했습니다. 그러면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고 사랑의 변화도 일어납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물질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회심의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왜 주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오셨습니다.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억울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려고 오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선물로 드리는 날

세상은 예수님을 선물로 받아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단지 선물뿐입니다. 이것이 새로워짐의 근원입니다. 선물의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 따뜻한 세상, 고마운 세상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선물로 드리는 날. 오늘은 이웃에 나를 선물로 드리는 날. 그래서 세상이 아주 다른 세상으로 바뀌는 날입니다.

선물은 주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는 것으로 아는 한 아직 철이 덜든 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하셨습니다. 원수도 사랑으로 감쌀 수 있음을 목숨 바쳐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어느 부분을 주신 게 아니라 자신 모두를 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끝없는 욕심이 예수님에게 계속 선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더 선물할 게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빚을 갚아야할 때입니다. 이기심으로 쓰러지는 나 자신을 울면서 서로 사랑하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다짐할 때입니다. 성탄절은 받는 삶에서 주는 삶으로 운명의 삶에서 선물하는 삶으로 바뀌는 거듭나는 절기입니다. 우리의 삶이 변하므로 세상이 달라지도록 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서정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