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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평강의 왕을 영접하라 (사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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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그리스도는 흑암의 고통을 빛 가운데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사람들은 흔히 행복의 영역과 불행의 영역이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서로 다른 영역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영역, 동일한 대상, 동일한 사건이 가장 불행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가장 행복한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조건을 갖춘 곳이 가장 불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입니다. 또한 가장 불행한 조건을 갖춘 곳이 가장 행복한 조건을 갖춘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땅과 역사는 그것을 한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사람이 살기 좋은 곳 중심으로 도로나 마을이나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사 9:1에 나타나는 스불론과 납달리는 갈릴리 호수 서편지역을 분배받은 지파의 땅으로서 주요 국제도로가 통과하는 땅입니다. 지중해변의 비옥한 땅을 통과하는 “해변길”이 스불론 지역과 납달리 지역을 통과하며 다메섹에서 “왕의 대로”와 만납니다. 그러므로 스불론과 납달리는 그 지역을 관통하는 “해변길”의 덕택으로 인적, 물적 교류가 풍부한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주어진 조건으로 볼 때 스불론과 납달리는 행복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그곳은 가장 불행한 곳이었습니다. 북쪽으로 앗수르, 바벨론, 바사, 로마 등의 제국들이 들어설 때마다 그들이 남진할 때 어김없이 통과하는 국제도로가 “해변길”이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이방인에게 정복당하고,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12지파 중 가장 큰 혼돈과 흑암을 경험한 지파였습니다. 정치적인 혼돈, 종교적인 혼합, 인종적인 혼혈 등 이스라엘 민족으로는 가장 견딜 수 없는 불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곳을 아예 “이방의 갈릴리”라고 부르며 이방지역처럼 취급하였습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아야 했던 그 지역이 북 이스라엘 지역이며, 사마리아 지역입니다. 가장 행복해야 할 지역적 특성을 지닌 지파의 땅이었지만 가장 불행한 지역, 가장 버림받은 지역의 땅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의 지배를 받으며 고통 속에 신음해야 했습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소망 없는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행복의 조건이 불행의 조건으로 변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임하였습니다. 사 9:1-2는 그 소망의 계획을“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그 땅의 흑암의 백성들에게 큰 빛을 약속하셨습니다. 멸시당하는 그들을 영화롭게 하실 약속을 주셨습니다.

성탄절은 그 약속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에 수없이 예언된 사실입니다. 그중 사 9:6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라고 예언합니다. “한 아기, 한 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나셨습니다.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나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분입니다. 나셨고, 주셨다는 것은 스스로 오신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약속의 성취로 오신 분이십니다. 행복한 인생을 불행한 인생으로 사는 자들에게 빛으로 오셔서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마 4:15-16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은 만나면 흑암에서 빛으로 나옵니다. 멸시당하는 삶에서 영화를 누리는 삶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의 초기사역을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서 행하시며 자신이 그 약속으로 오신 분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의 갈릴리처럼 버려진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조건 때문에 오는 불행이 아닙니다. 스불론과 납달리처럼 이방의 압제를 받으며 이방의 요구에 따라 영육간의 혼돈에 빠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삶입니다. 그 이방인의 압제가 흑암이며, 멸시 당함이며, 사망의 그늘진 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압제하는 세력으로부터 흑암을 물리쳐 주셔서 빛 가운데서 영화롭게 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버려진 우리들에게 이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영화로운 삶으로 변화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흑암에 앉았던 백성에게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신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이방의 압제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키실 때 우리의 행복한 즐거움이 회복됩니다. 그 행복한 즐거움의 회복은 다른 조건의 회복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통치권의 변화로 인한 회복입니다. 이방인의 통치에서 벗어나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이 임할 때 회복되는 즐거움입니다.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나라입니다. 사 9:3-5는 그의 나라가 임할 때 회복되는 행복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사 9:3은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자에게는 추수하는 즐거움을 주십니다. 전투에 나가서 승리하는 즐거움을 주십니다. 대적들의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을 주십니다. 이방인의 압제 속에서는 추수하는 고통뿐입니다. 전투하는 괴로움뿐입니다. 그러나 사망의 그늘에 임해주신 주님의 통치는 즐거움을 더하는 통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적과 이방인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셔서 우리의 모든 수고가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수고가 되게 하십니다. 이방인의 압제 속에서는 우리의 수고가 고통이었고, 멸시 당함이었으며, 사망의 그늘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 속에 들어갈 때 그 수고는 동일할지라도 즐거움이 함께하는 수고이며 기쁨이 함께하는 행복한 수고가 됩니다. 우리의 불행은 수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수고에 고통이 수반 되는지, 즐거움이 수반되는지의 문제입니다.

둘째로 사 9:4는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사기 7장에서 기드온이 미디안을 이길 때와 같은 승리의 삶을 누리는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무겁게 맨 짐을 내려 주십니다. 우리 어깨에 무겁게 올려진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를 꺾어주십니다. 참된 자유가 회복되는 행복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홀로 존재할 때 임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통치하는 주권자의 품속에 있을 때의 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에게서 탈취해 가고자 하는 압제자 밑에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해변길”의 넓은 대로를 통해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의 소유를 탈취해 가며, 우리를 통치하며 자신의 이득을 얻고자 하는 이방의 압제자 밑에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고통을 슬퍼하며, 우리의 멸시 당함을 자신의 고통으로 괴로워하시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위한 능력을 사용하심으로 우리의 자유를 보호해 주십니다.

셋째로 사 9:5는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군인의 갑옷이 불에 살라져 없어집니다. 전쟁의 흔적인 피 묻은 복장도 불살라져 없어집니다. 모든 전쟁의 흔적이 사라지며 모든 전쟁의 도구가 사라집니다. 더 이상 전쟁을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전쟁으로부터 벗어나는 평강의 행복입니다. 최고의 주권자 밑에 들어갈 때 전쟁은 사라집니다. 전쟁의 염려로부터 벗어날 때 평강이 임합니다. 예수님은 이 행복을 위해 오셨습니다.

과거의 우리의 삶은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 같았습니다. 정신 나갈 정도의 시끄러운 싸움터에서 살았습니다. 온갖 전쟁 도구가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전투에 참여하느라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전투로 인해 피 묻은 군복들이 널려진 영역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 밑에 순종해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그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닌 하나님의 전쟁으로 바뀌었고,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했습니다.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수고, 최고의 주관자 밑에서 누리는 참된 자유, 최고의 능력자 밑에서 누리는 평강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소망으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주권자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소망을 누립니다. 사망의 땅에서 들리던 신음 대신에 기쁨의 웃음이 들립니다. 압제자에게 끌려 다니던 종들의 신음소리가 축복의 수레를 이끄는 자유로운 백성들의 환호소리로 바뀝니다. 귀가 찢어질 듯한 전쟁의 소음이 평강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소리로 바뀝니다.

3.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새로운 주인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맞이하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이 땅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정확히 안다면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것입니다. 현재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압제하며 이끌고 있는 세력의 실체와 그 결과를 분명히 깨닫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맞이할 것입니다. 자신이 흑암 가운데 있고, 멸시 당하고 있으며, 사망의 그늘에 앉아 신음하고 있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 9:6-7에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섯 가지 특징을 소개합니다. 첫째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라고 하시며 어린 아이로 탄생하셨다고 알려주십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알아볼 수 없는 가장 미약한 자처럼 보입니다. 힘도 없고 권세도 없는 분처럼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이러한 모습이었습니다. 베들레헴 마굿간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자신이 흑암에서 신음하고 있음을 아는 자에게만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둘째로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라고 소개합니다. “정사”는 “지배, 통치, 행정기관”을 의미합니다. 겉모습은 어린아이로 오셨지만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을 통치하십니다. 왕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백성을 직접 통치하십니다. 세상의 통치자로 오신 분이십니다. 세상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만물이 그 발아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굴복합니다.

셋째로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리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다섯 가지의 묘사적인 이름입니다. “기묘자”란 불가사의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기적을 이끌고 다니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사”란 충고자, 조언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강의 왕”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모든 이름은 평강의 왕으로서의 이름입니다.

넷째로 사 9:7에서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라고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왕좌에 앉아서 우리가 속한 새로운 나라를 굳게 세우십니다. 우리가 속한 새로운 나라를 영원한 평화와 정의로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끝이 없이 영원합니다. 그 어떤 이방 세력들이 침해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더 이상 전쟁에 흔들리지 않는 평강을 누리게 하십니다.

다섯째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십니다. “열심”은 “열정, 시기, 질투”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는 최고의 질투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열심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열심을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열심이 우리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고,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자유와 평강을 보장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나타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통치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인생을 행복으로 이끄는 조언을 해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모든 능력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평강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께서 통치하는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방 세력을 물리쳐 주시고 우리의 주인과 주권자 되어 주시며 우리의 평강과 기쁨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그 나라 백성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방 세력들의 지배를 받아 왔던 과거 우리의 삶이 흑암의 삶이었고, 사망의 그늘에 앉아 신음하던 삶이었음을 고백하며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열심을 쉬지 않습니다. (김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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