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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더 사랑스러워 가신 예수 (눅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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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52)

외경의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도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비상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셨다고 전하지만 그 증거는 불확실합니다. 성경이 거듭 밝히는 바는(40절), 예수께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지혜와 키가 자라갔다고 하는 것이 예수의 신성(deity)을 도외시하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 뿐이기 때문입니다(빌 2:6, 7).

'키'(헬리키아)는 '키'(stature, NIV) 또는 '나이'로 번역됩니다. 이를 어떻게 번역하든 별반 차이가 없지만 '키'로 보는 것이 적합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나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부연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자는 그 의미를 신체적인 성장이나 인격적인 성장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착실한 성장은 모든 이의 귀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에 순종하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아끼며 도와주는 생활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유대인들은 6살이 되면 회당에 가서 성경말씀을 배우기 시작하고 12살이 되면 성인으로 구별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율법을 배워나간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셨는데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지식과 지혜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지식이나 지혜는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지식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활용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지식이 작아도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작은 지식을 가지고도 큰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많은 지식을 넣어주는 교육도 필요하나 보다더 올바른 지혜를 길러주는 교육이 더 필요합니다.

완전한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전도서 2:26을 보면,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신다고 합니다. 잠언 2:6-7을 보면,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신다고 합니다. 또 잠언 3:13-18을 보면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합니다. 그리고 잠언 4:5-9을 보면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합니다. 잠언 9:10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합니다. 이와 같이 지혜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미가서 6:9을 보면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죽고 사는 것, 흥하고 망하는 것, 부요해지고 가난해지는 것,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완전한 지혜를 주십니다. 

잠언 22:6을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따라서 성경도 어렸을 때 읽고 배우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119:97-100에서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율법선생님들 중에 앉아 저희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며 계셨습니다.

  신체적인 자람은 외모가 잘 자라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잉태되어 모태에서 열 달 동안 자란 후에 출생을 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도 그와 같은 생명의 질서를 다 거치시고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아이가 너무나 유약한 상태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태어나는 즉시 갖가지 병균에게 노출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아 어떤 아이는 백일도 못 넘기고, 또 어떤 아이는 돌을 못 넘기기 때문에 예로부터 친지들을 불러 모아 백일잔치와 돌잔치를 해온 것입니다. 오늘날 산모는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아 태아의 건강을 체크하고, 산부인과에서 전문의의 도움으로 해산을 하고, 아이들은 정기적으로 예방주사를 접종을 하고, 아기에게 무슨 이상이 있으면 언제든지 병원을 찾아가서 치료를 받습니다. 예수님 당시 어린아이들은 왕자나 공주도 그와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의 속국인 이스라엘 땅, 가난한 나사렛 목수의 가문, 마구간 말구유 위에서 태어나실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님은 정치적으로 헤롯의 위협만이 아니라 환경적으로 갖가지 질병의 위협이 에워싸고 있는 열악한 환경에서 건강은 고사하고 생존마저 위협을 받는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셨습니다. 이 땅위에 수많은 아이들 가운데 세상에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모태에서 죽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 받고 있는 어린이들도 많습니다.

아기 예수는 복중에서 머나먼 여행을 하였고, 태어나자마자 헤롯 왕의 칼을 피하여 애굽으로의 피신, 낯선 이방 땅에서의 괄시와 천대, 넉넉하지 못한 나사렛 목수의 가정에서 여러 번 질병의 위협과 생명의 위기를 맛보며 유아기와 유년 시절을 겪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세상에 어떤 어린아이와도 비교할 수 없도록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란다는(에윅사넨)말과 강하여지고(에크라타이우토)라는 말은 지속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신 성장과정으로 단적으로 나타내 보여주는 말입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그의 마지막 생일에 확신과 기쁨에 차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늙지않았다! 자넨 내가 늙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밝은 희망이나 멋진 미래를 가지지는 못했을 거야!" 며칠 후, 이 빛나고 의기양양한 선언을 두고 어느 친구가 리빙스턴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자네는 한창 자라고 있는 늙은이일세!"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앞날도 이처럼 밝은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미래는 어둠에 싸여 있음이 분명합니다. 임하는 심판 날에 이르게 될 때 그들의 영혼은 어둠에 휩싸이고 공포로 마비되게 됩니다.

말 많은 무신론자인 토마스 홉스는 죄 많은 인생을 마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암흑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임가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기에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갔습니다,

우리도 영육 간에 자라 신앙이 성장해가는 모두가 됩시다.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사랑받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야 됩니다. 자기 존재를 성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살피게 합니다. 우리의 지성이나, 신체적인 것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무한정 성장시킬 수는 없지만 자기 존재를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어가야 됩니다. 사람이 자라면서 중요한 인격적 요소가 바로 사랑받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것이 인격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은 많이 쌓아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인격의 자람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공부는 많이 했는데 가정에 돌아가서 사랑받지 못하는 남편 아내도 있고 시어머니 며느리도  인격적으로 자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부 많이 하고 지위를 높이는 것과 인격의 자람은 다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대통령이 될 수 있으나 보다더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보다 더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예수님을 보면 성전에서나 집에서나 부모에게 대하는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집을 빙자하여 육신의 집을 소홀히 하고 육신의 가족들을 무시하거나 홀대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육신의 부모의 말을 깍듯이 순종하시고 성인이 되어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자신의 생계만이 아니라 가족들을 부양하기위해 힘들든 목수 일을 마다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해야 할 뿐 아니라 육신의 가족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본보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51절)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어찌 알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말하는데도 못 알아듣습니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부모님의 부족한 것을 말하지 않고 받들어 순종합니다. 

가정에 돌아가서 아내가 남편이 모자란다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을 받들어 주어야 됩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모자라고 상식이 안통해도 서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회사에 가서 윗사람이 모자라도 받들어 주어야 하고 아랫 사람이 서툴러더 이해해 주어애 됩니다. 그래야 사랑받는 사람이 됩니다.

윌슨이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입니다. 윌슨은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계속 공부를 할 수 없었는데 그의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과 피땀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윌슨이 대학을 졸업하는 날,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참석했으나 어머니는 평소에 입는 남루한 옷을 입었고 전차에 시달리면서 참석한 것입니다. 대학총장이 수석 졸업자인 윌슨에게 상장과 상품, 금메달을 증정하였습니다. 그것을 받아든 윌슨은 자기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어머니의 희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희생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고 어머니 역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윌슨은 단상에서 목 메인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의 영광은 저의 것이 아닙니다. 이 영광은 저를 이렇게 기르셨고 가난 중에서 도 온갖 고생을 다하시면서 저의 학비를 대어주셔서 공부하게 하신 제 어머님의 것입니다." 아들의 연설이 들려올 때 윌슨의 어머니는 남루한 옷차림과 초라함을 부끄러워하며 고개조차 못 드시는 것이었지만 윌슨은 자기의 목에 걸려 있는 금메달을 벗어서 어머니의 목에 걸어주었고 그가 받은 상장과 상품도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학생들과 학부형들은 그 감격적인 장면에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그 어머니의 사랑의 희생과 효성에 갈채를 보냈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함에 있어서 성실한 자세로 균형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출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부모께 대한 순종'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순종'과도 연결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도 사랑 받으셨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막 1:11)

라는 음성을 들으십니다.

하늘 소리가 강조하는 바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가장 사랑받는 독생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부터 성자 하나님에게 명명된 이 사랑은 일시적인 범주를 뛰어넘는 완전 무궁한 사랑, 영원 지고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아가페토스)은 사랑의 최고 형식을 지시하는 말로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의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악취 나는 이 세상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시고자 하시기에 도성 인신(道成人身)하신 것입니다(요 1:1,14).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사랑 받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모든 면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한 미래의 사역을 준비하는 삶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하십니다.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본격적으로 메시야, 그리스도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그리스도의 사역의 준비는 벌써 어릴 때부터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미래 사역의 목표를 바라보며 꿈꾸며 자라났습니다.

옛날 에덴의 언덕 동쪽에는 무지개 빛 가득한 아름다운 꽃밭이 있었습니다. 그 꽃밭에는 장미꽃, 진달래꽃, 방울꽃, 해바라기꽃 등 많은 꽃들이 아주 사이좋게 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해바라기 꽃은 그 늠름한 풍채와 큰키로 많은 꽃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바라기 꽃은 오직 햇님만을 바라보며 살 뿐 다른 꽃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햇님도 해바라기 꽃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해바라기 꽃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햇님이 동쪽 산에서 모습을 나타내 서쪽 산으로 사라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오직 햇님만을 바라볼 뿐 이었습니다. 말 한마디 걸어보는 것 없이 바라보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것이 해바라기 꽃의 행동의 전부였습니다. 다른 꽃들은 해바라기 꽃의 그러한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햇님이 만물의 존경을 받고 있는 분이기는 했지만, 해바라기 꽃도 아름다운 꽃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말하자면 햇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진달래꽃이 물었습니다."해바라기 꽃님, 당신은 충분히 햇님의 사랑을 받으실 수 있으실텐데, 왜 바라보기만 할 뿐 다가서시지 않으시는 거지요?" 그러자 해바라기 꽃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모든 이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그가 나만을 사랑해준다고 하여도 내가 그를 독점해서 다른 이들을 슬프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인터넷 정보클럽- 해바라기의 사랑)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인간을 입으시고 오셨고  십자가에서는 버림을 당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시어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 고백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기를 원하신 주님께서는 30여 년 간 부모의 보호와 권위 아래 순종하며 육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며 효성의 본을 보이신 후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을 아울러 다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를 거절치 않으시고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셨습니다.(마3:17, 빌2:6-8)) 이러한 예수님 하나님께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육신의 부모를 더욱 사랑하고 순종하는 삶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외면하거나 잊지 않으시고 더욱 사랑하셨으며, 그와 같은 예수님을 보는 가족은 물론 주변에서 보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에게 사랑스러워 가셨고 하나님에게도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영육간에 자라 신앙이 성숙해지고 사랑스러워 가는 모두가 됩시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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