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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영광과 평화의 성탄! (눅 2: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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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세계 제 1차 대전 당시 미국에서는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모든 가정의 유리창에 별을 하나씩 붙여 놓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자기 어린 아들을 데리고 뉴욕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는데 그 꼬마가 각 집에 켜진 불과 유리창의 별이 멋있다고 손뼉을 치며 외쳐댔습니다. “아빠, 저것 보세요. 전쟁터에 아들을 보낸 집이 있군요. 또 저기도, 그리고 저기는 별이 두 개나 되는군요.” 그들이 골목을 빠져 나오자 지붕이 없이 환하게 트인 하늘에 별이 하나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꼬마는 “아빠, 저것 보세요. 하나님도 자기 아들을 보내셨나 봐요. 저 하늘 유리창에 별이 하나 반짝거리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성탄을 예고하고 나자 하늘에는 아름다운 천군 천사의 찬양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 광경은 인류의 역사상 한번 밖에 없는 영광스러운 천군 천사들의 찬양이었습니다.그런데 놀랍게도 천군 천사들은 찬양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가 담겨진 메시지를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선포했습니다. 

찬양의 내용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였습니다.  짧은 찬양이지만 이 찬양은 기독교의 교리를 내포하고 있으며, 기독교가 신본주의, 하나님 우선의 종교임을 밝혀 줍니다. 그러면 왜 베들레헴 목자들에게 이러한 찬양을 들려주게 되었는지, 이 찬양의 의미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

1.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탄생이었습니다.

백년에 한번 들어볼까 말까한 유명한 흑인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n, 1902-1973)은 노래를 잘 부르므로 영광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23개국에서 명예학위를 받았으며 아이젠하워대통령, 케네디 대통령 취임 시에 미국 국가를 독창했고, 58년에는 아이크가 유엔대표로 지명까지 했으며 63년에는 존슨 대통령으로 부터 최고 훈장인 “대통령자유상패”를 받았습니다. 그가 40년간 성악활동을 하고 은퇴할 때 하는 말이 “나는 보잘것없는 노예밖에 될 수 없는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셨으므로 유명해진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명예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연설하여 미국 모든 시민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인간이 사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습니다.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14)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심이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태어나심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는 근원적인 문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상처받은 의가 보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과 관련됩니다. 이 관련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인간의 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근원적인 문제는 죄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범죄와 그 이후에 계속된 범죄로 인해서 인간은 타락의 길로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상처를 입혔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손상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을 건드린 겁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내리셔야 했던 것이 아니라 사필귀정으로 진노가 인간에게 임했습니다.

인간이 아담의 범죄 이후로 삶에 심한 고통을 느껴야 했고 최종적으로 죽어야 했던 것은 바로 이 진노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이 범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진노로 죽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또 하나의 성품인 자비의 속성과 모순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속성에 의해 인간의 죄를 방치한다면 그것은 의의 속성에 모순되므로 그럴 수는 없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속성이 모순됨 없이 다 만족될 수 있는 방법을 계획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게 인류를 향한 모든 진노를 다 쏟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죽어가는 것을 두고 보실 수 없는 사랑의 속성과 죄를 간과할 수 없는 의의 속성을 다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6)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러한 의를 이루실 초석을 마련하신 것이므로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독생자 외아들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상처도 싸매어 주시고, 사랑과 자비의 손길도 더 따뜻하게 해드렸습니다.

2)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거슬렀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고 말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19-20)고 말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언제나 진실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대로 이루어 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고후1:19-20)라고 번역했습니다. 

또한 제 2 아담으로 오신 주님은 자신만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요, 당신의 모든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하나님 앞에서 “이랬다 저랬다”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아멘”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뜻에 “아멘”하게 됩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을 순종하는 아들들로 바꿔 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해야 하나 할 수 없는 일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으므로 그것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2. 사람에게는 평화입니다.

슈바이처는 누가복음 16장을 읽다가 “부자는 백인이요, 나사로는 흑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하여 흑인들에게 온갖 못할 짓을 한 백인들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프리카로 가서 90평생 흑인들의 고름주머니를 만지며 사도로서 봉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여행가 김찬삼 씨가 아프리카에서 그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일주일 동안 사랑의 현장에 함께 있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감찬삼 씨의 남루한 옷차림을 보더니 “바지가 몹시 낡았구려. 괜찮으시다면 제 바지를 드릴 테니 갈아입으시지요.”하며 자신의 바지를 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슈바이처 박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찬삼씨는 그곳을 떠날 때 슈바이처 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시오!” 슈바이처 박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트럭을 타고 떠나는 김찬삼 씨에게 손을 흔들면서 “인류에게 평화를! 인류에게 사랑을!”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과 함께 살면서 “인류에게 평화를! 인류에게 사랑을!” 하며 부르짖던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수고와 희생의 삶을 통해서 오늘날 이 세계는 어느 구석에서든지 어떤 모양으로든 평화가 유지되고 또 번져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암시합니다.

1)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손상시켜 진노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잠시의 고통이지만 영적인 죽음은 영원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로써 이 담을 허셨습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 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은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4, 16)라고 말했습니다.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는 담을 허셨습니다.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셨습니다.

2) 인간과 평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사들이 “땅에는 평화”라고 노래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과 인간 사이를 평화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만을 원수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원수 관계를 수없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끝없는 전쟁과 다툼이 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평화의 왕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의 탄생을 문의했을 때 예루살렘이 소동했습니다. 이어서 베들레헴을 기점으로 2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이 살해를 당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이 아니라 평화를 싫어하는 자들의 폭력에 불과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➀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➁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➂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의 평화, 세계의 평화, 하나님광의 평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큰 평화 앞에는 작은 불화, 사소한 다툼, 골 깊은 갈등이 반드시 옵니다. 그러한 것을 극복할 때에 비로소 큰 평화가 찾아옵니다. 평화의 주님께서는 “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➁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➂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완벽한 평화를 이루신 주님만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또 오셔서 ➀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➁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➂이는 저로 말미암아 ➃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➄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웹 2:17, 18)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먼데 있는 우리 이방인들에게도, 가까이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성령 안에서 평화의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끝맺는 말

거리의 쇼윈도는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즐겁게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길모퉁이에 서서 지나가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습니다. 길옆에는 장난감도 많이 진열되어 있어서, 어머니는 아들이 퍽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거닐다 보니 아들이 어머니의 코트에 매달려 훌쩍훌쩍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신발 끈이 풀려있는 것을 발견한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앉아 풀린 신발 끈을 다시 매어 주었습니다.

무심코 고개를 든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앞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멋있게 반짝이는 불빛도, 쇼윈도도, 장난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가려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굵은 다리와 엉덩이들이 서로 밀로 부딪치면서 바삐 움직이는 흉한 모습만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눈높이로는 처음 본 세상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크게 놀라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시는 자기를 기준으로 한 성탄절의 즐거움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금년 성탄절에는 젖먹이의 눈높이로, 어린이의 눈높이로, 새교우들의 눈높이로, 나그네의 눈높이로, 늙고 병든 자의 눈높이로 하나님께 영광, 이웃과의 평화를 이루시기를 아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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