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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거룩의 목표 (출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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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의 목표(출3:1-12)- 송구영신예배

“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다사다난 했던 2005년이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제 대망의 2006년 을유년이 이제 우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이 시간을 의미 있게 맞이하고 있습니다. 시간이란 그것을 아름답게 사용하는 자들에게는 복되고 의미 있는 것이지만 무의미하게 보내는 자들에게는 그 시간들이 불행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06년의 첫 시간을 맞이하면서 이 한 해가 의미 있고 귀한 시간이 되고자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 자리가 신년도 한 해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복의 시작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시간들이 불행과 좌절의 시간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영웅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는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모세의 지금 나이는 80이며,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황혼의 인생이었습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모세는 이집트가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 억제 정책으로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시대에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3개월간 몰래 키웠지만 커져가는 울음소리를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로 바로의 공주가 그 갈대상자를 발견하게 되고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40년간 자라게 됩니다.

그는 궁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머니에 의해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궁전에서 최고의 학문을 이수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는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 때 나이가 40살 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이드로의 집에서 더부살이로 양을 치면서 40년을 보냈습니다. 그에게서의 그 시간은 무의미했슬 것입니다. 지나온 80년의 시간들이 위대한 꿈을 가졌던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가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는데 호렙산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데 그 불은 신비한 불이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은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곳까지 달려가 그 광경을 보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너가 선 그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깜짝 놀랍니다. “내가 여기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모세를 선택하셨을 뿐만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영도자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거룩한 도구가 되게 했습니다.

호렙산에서 가덩쿨 불꽃가운데서 계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쓸모없이 처가집 더부살이로 의미없는 한 생애를 마감해야 했던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약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는 위대한 일을 감당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호렙산이 거룩한 땅이었듯이 오늘 우리는 2006년이라는 귀한 시간의 출발을 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통해 이 자리에 있는 이 시간이 거룩하고, 2006년 한 해가 거룩하게 되고자 원합니다. 이 한 해가 모세가 하나님의 귀한 일을 감당했듯이 우리도 귀한 일을 감당하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원하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 신년도에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받고 거룩하게 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거룩한 목적의식(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휘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나일강에서 모세를 구원하시고 40년간 궁중에서 훈련하시고, 광야에서 40년을 훈련하여 80세가 되었을 때에 호렙산에서 무세를 만나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세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2006년이라는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함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구원이 없는 자들과는 비교도 안 될 의미 있고 값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존재가 되었음을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느 곳에 거하든지 우리는 항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않고 피값으로 구원함을 하나님의 자녀로 죄악과 구별되이 살고, 믿음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한 인생이 되려면 곧 거룩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아름다운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름다우려면 우리에게 아름다운 신앙이 존재해야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나의 인생은 거룩하게 됩니다.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와 함께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부름 받은 후 말년의 그의 40년이 거룩한 존재로 산 인생이었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는 유난히 많은 꽃들로 만들어진 <로스 알토힐>이란 마을이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마을이 만들어진 데에는 ‘존’이라는 한 우편배달부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15년간 매일 자전거를 타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우편물을 배달하던 그는 어느 날, 단조로운 우편배달부 생활에 싫증과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편물 배달의 일을 계속해야 하나, 아니면 그만 두어야 하나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이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사명이 있음을 깨닫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우편행랑 안에 꽃씨를 넣고 다니며,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지나가는 집 마당이나 길가에 그 꽃씨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그가 지나갔던 길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사람들의 마음에 꿈과 희망을 주는 꽃 거리와 아름다운 꽃마을이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거룩한 존재로 산다는 것은 삶의 자세의 중요성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생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일하느냐에 따라,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이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종류나 일하는 장소나 누구와 함께 일하는 것도 어느 정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분명한 목적을 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러한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지만, 옛날에 동네에서 사람이 죽으면 상여가 동리 밖으로 줄을 지어 죽 나갔습니다. 아마 연세가 드신 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상여가 죽 나갈 때 동네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아십니까? 자기 가족이 죽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모두들 나와서 상여가는 것을 보고 슬퍼합니다. 슬퍼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길 가던 사람까지도 눈시울을 적십니다. 상을 당한 가족들을 따라서 마구 웁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이 “누가 죽었는데? 누가 죽었길래, 그렇게 슬프게 우니?”라고 하면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응, 나도 몰라. 그냥 울었어. 그런데. 정말 누가 죽었지?”라고 오히려 반문하는 모습을 종종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왜 삽니까?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합니까?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이니?”라고 물어보면 머리만 긁적거리고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됩니까? 삶에 애착이 없습니다. 흘러나는 강물처럼 아무 목적 없이 살아가다 보니 사는 것이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을 분명히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즐겁습니다. 노동판에서 막노동을 하든, 가정에서 가정주부로서 살림을 하든, 식당에서 힘들게 접시를 닦든, 비좁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택시운전을 하든,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루하루가 기대가 됩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날마다 새로운 소망의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아무 의미도 없이, 아무 목적도 없이 마지못해 살아가는 사람은 그 사람이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 올랐다 할지라도,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앉았다 할지라도, 매일매일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짜증으로 시작해서 짜증으로 하루를 마칩니다.

저는 이 땅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할 것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하나는 바로 이 <소명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하여 나를 사용하시기 위해 부르셨다는 이 <소명의식>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중요한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부르심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는 ‘구원적 소명’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입니다.
두 번째는 ‘사명적 소명’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소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꼭 신학교를 나온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꼭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가 신학교는 나오지 않았다 할지라도, 비록 내가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내가 권사나 안수집사나 장로의 직분을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소명’을 이미 받았습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였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절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였다면, 여러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기로 결심한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아 내려왔을 때에 그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이집트의 교만한 바로를 굴복시켰습니다. 홍해를 갈랐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거룩한 인생이었습니다.

2006년 한 해가 거룩한 인생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귀한 일에 충성되게 사명을 감당하므로 날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7절)

호렙산에서 부름 받은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바로의 궁전에서 있을 때 하려고 했던 이스라엘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이루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모세에게 맡겼습니다. 똑같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한 것이지만 모세 스스로가 했을 때에는 그것이 사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일을 감당하라고 부탁했을 때에는 그것이 곧 사명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그저 천당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만 구원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하실 일, 즉 사명이 있기 때문에 구원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하신 일들을 이루기 위해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시고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일꾼, 교회에 각 가지 직분을 맡겨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사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호렙산에서 “모세야 모세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모세를 부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무슨 이유 때문에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을까요?

7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하나님께서는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았고,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탈출시키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모세라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9절과 10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라는 단어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제’라는 말은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속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이루고자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내어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심하셔서 모세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할 일이 없어서 모세를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계획이 있으셔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매튜 폭스라'의 글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Finding the fire with in -' 자기 안에 있는 불꽃을 발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 그의 말은 게으름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부지런해지자'는 결심만으로는 안되고, 가장 적절한 방법은 자기 안에 있는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한 불꽃은 불타는 사명을 의미합니다. 소명 중에 사명을 위한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맡겨주신 직분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명을 위해 나를 선택하시고 귀한 직분 맡겨 주심에 대한 감격의 뜨거운 마음이 생길 때,

성령님께서 불 붙는 소원과 강력한 감동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왜 부르시고 무슨 일을 맡기셨는지를 생각하고 그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때,

신발람 나게 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자포자기 상태에 있는 것은 사명적 소명 의식이 없어서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모세'를 통해 사명 의식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으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고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바울을 부르신 것은 로마를 비롯한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바울을 부르신 것처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우리를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마땅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유명한 조각가인 미켈란젤로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에게는 보톨도 지오바니라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예술가로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미켈란젤로를 보고 보톨도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고 싶니?” “그렇습니다. 선생님.”라고 어린 미켈란젤로가 대답을 하자, “위대한 조각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라고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가진 재능과 기술을 더 갈고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는 미켈란젤로에게 보톨도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먼저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 분명히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보톨도는 어린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술집으로 갔습니다. 그 술집 입구에 아름다운 조각품이 하나 있었습니다. “선생님, 술집에 아름다운 조각이 있네요.” “아름답지만 조각가는 이 조각을 술집을 위해 사용했단다.” 보톨도는 다시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거대한 성당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성당 입구에 세워진 아름다운 조각상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마음이 드느냐? 저 술집 입구에 있는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같은 조각품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였고, 다른 하나는 술 마시는 사람들의 쾌락을 위해 쓰였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어디에 쓰기를 원하느냐?” 스승의 물음에 미켈란젤로는 비로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쓰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떠한 재능이 있습니까? 미켈란젤로처럼 하나님을 위해 그것을 쓰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어떠한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자리, 어떠한 지위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처한 그 자리에서, 여러분들이 앉아있는 그 지위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데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사명을 깨닫고 거룩하게 사는 방법인 것입니다.


3. 자신을 드려 하나님께(하나님이 사용하시면) 쓰임받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모세는 지금 80세가 되는 때였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애굽 왕궁에서 최고의 생활을 했지만, 애국심의 발로로 애굽 사람을 죽인 후에는 광야로 도망쳐서 다시 40년 동안 최하의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강대국인 애굽에서 연마한 최고의 학문과 최고의 무술, 뛰어난 지도력을 가진 인물이면서도 양떼나 치는 초라한 존재로 전락하여 산다는 것은 대단히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그 야망을 마음껏 불태울 수 있는 장년의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는 힘도 능도 없는 노년기 초반에 들어서는 나이가 되므로 고독과 허탈이 그의 마음을 점점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양떼를 몰고 시내반도의 남단에 있는 가장 높은 호렙산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때 놀라운 장면을 보았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나무는 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떨기나무는 불이 붙으면 딱딱 소리를 내면서 얼마나 잘 탑니까? 그런데 불은 타오르는데 나무는 전혀 타지 않습니다. 너무나 신기한 장면이었습니다. 모세는 너무나 신기해서 양떼를 잠시 놓아두고 떨기나무 가까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다른 나무에서 부르시지 않고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떨기나무'는 광야에 있는 가시나무입니다. 가시나무는 어디에도 쓸데 없는 나무입니다.

* 하나님이 떨기 나무에 불로 나타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모세의 형편과 처지와 상태를 암시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겠다고 했지만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고 바로 왕이 무서워서 미디안 광야까지 도망하여 40년 동안 돌아가지 못한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본래 혈기가 가득하고 말에 능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4:10).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구원자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구원 받은 백성들의 공통적인 사명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은 없습니다.

이란이 지진으로 수만명이 매몰되었을 때 이란과 적대관계인 나라에서도 구조대와 구호물자를 보낸 것처럼, 지난 해  발생한 동남아 대지진과 해일로 인한 희생자가 10만명을 넘어선 가운데,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와 피지섬을 위시하여 해안에 인접한 국가와 도시들이 약 10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재해 앞에 전세계가 구호로 돕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해 죽어가는 수 많은 우리 이웃에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구조대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영혼 구조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가운데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거룩한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2006 올 한 해는 직장에서 가정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한 나이 많은 목수가 은퇴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고용주에게 지금부터는 일을 그만 두고 자신의 가족과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고용주는 목수 가족들의 생계가 걱정되어 극구 말렸지만 목수는 여전히 일을 그만 두고 싶어 했습니다. 목수는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고용주는 훌륭한 일꾼을 잃게 되어 무척 유감이라고 말하고는 마지막으로 손수 집을 한 채 더 지어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목수는 ‘물론입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일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나 일꾼들을 급히 모으고는 조잡한 원자재를 사용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집이 완성 되었을 때, 고용주가 집을 보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을 보는 대신, 목수에게 현관 열쇠를 쥐어주면서 “이것은 당신의 집입니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당신이 저를 위해 일해 준 보답입니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목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일 목수가 자신의 집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집을 지었을 것입니다.

100년이 지나도 수리를 할 필요가 없는 튼튼한 집을 지었을 것이묘, 더 이상 수리할 필요가 없는훌륭한 집을 지었을 것이고 남은 생야 편안하게, 멋있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잘못된 방향으로 인생을 살려하고 있으며, 열심히 살기보다는 단지 할 수만 있으면 차선책으로 견디려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상황, 즉 자신이 대충 지은 집에서 살아야 하는 결코 유쾌하지 못한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인생이라는 집을 나의 집이라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더라면, 우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집을 지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이 목수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지금 짓고 있는 집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못을 박고 판자를 대거나 벽을 세우는 매 순간마다 정직하게 지으십시오.

여러분의 미래는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 집은 당신이 만들어 갈 인생과도 같은 것입니다.

심지어 당신이 단 하루만 살게 되더라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7절에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저는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구 동독의 제 2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라이프지히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교회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유명해진 이유는 교회 건물 앞에 있는 오래된 예수님의 동상 때문입니다.

그 동상은 제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아 오른 팔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성도들이 의논하기를 예수님의 오른 팔을 복구하기 위하여 특별헌금을 거두기로 하여 헌금을 모으고 있는데, 갑자기 나이 많은 어떤 성도가 손을 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그리고 성도 여러분! 우리가 돈을 모아서 예수님의 오른팔을 해드리는 것도 좋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이 돈은 다른데 쓰고 대신 예수님의 동상 밑에 이런 글을 적어 주도록 하십시다. ‘예수님의 오른 손이 없습니다. 대신 우리가 예수님의 오른손이 되겠습니다.’” 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성도들이 큰 감명을 받아, 모았던 돈은 다른 곳에 귀하게 쓰고, 대신에 예수님의 동상 밑에 그 사람이 제안한 글귀를 써서 넣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독일의 라이프지히에 있다는 오른 팔이 없는 예수님의 동상을 우리 교회 앞에도 세워놓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동상 앞에 역시 “예수님은 오른손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오른손이 되겠습니다.“라는 글귀를 새겨 넣어 오고 가는 사람들의 심령을 깨웠으면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예수님의 오른 손이 되어야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닌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오른 손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오른 손이 되어 주님의 계획을 위해서 쓰임 받는 도구로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하나님과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06년도 금년은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하시기를 원합니다. 예배는 우리의 신앙을 성숙하게 합니다. 예배는 우리의 사명의 소중성을 인식하게 합니다. 예배는 믿음의 강한 힘을 가지게 합니다. 예배에는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 있습니다. 올 한 해 말씀과 기도 찬송의 예배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영적인 새힘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을 살리는 복음전파의 사명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각 기관에서 또한 주어직 직분을 가지고 소명의, 사명의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목표와 직분에 자원하여 주님의 팔이되어 쓰임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의 출입을 지키시는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

초행길은 어렵습니다. 여기 저기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매우 어려운 길입니다. 바로 이러한 초행길에 2006년도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우리는 출발했습니다. 전에는 가보지 못했던 길입니다. 또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초보운전자와 같은 심정으로 마음 한 곳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길은 곧게 뻗어 있는 길도 있지만 어떤 길은 꼬불꼬불한 길도 있습니다. 때로, 어두운 곳도 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 곳도 있고 어떤 곳은 이정표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동행해 주셔야 합니다. 주님이 내 인생과 금년한해 운전하는 일들에 핸들을 잡아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험산준령이라도 두려움이 없지만 나 혼자서 미지의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내건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성도가 되기위해 매사에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주님과 먼저 상의하고, 먼저 기도로 여쭤보고 주님과 동행하며 나아가길 원합 니다.

새해엔 주님이 동행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승리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거룩하도록 십자가에 피흘려 죄의 값을 지불하여주시고 대속해 주신 은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2006년 신년 한해는 소명을 깨닫는 목적의식, 하나님께서 내가 필요하셔서 맡겨주셨다는 사명의식, 네가 필요하다는 음성을 이시간 들으셨으니 자원하여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선한도구로 살수 있도록 능력의 손으로 붙잡아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을 위해 쓰임받는 한해가 되게 하시고, 거룩한 삶을 사는 한해가 되게 하시고, 승리하는 한해가 되게 하옵소서.

세상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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