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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눅 1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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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일 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Sarah Jang)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었습니다. 연주곡목을 보니 제게는 생소한 것이어서 별로 재미가 없으려니 하면서도 워낙 유명한 연주자인지라 기회를 놓치기가 아까워서 한번 가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날 제가 처음 듣는 그 곡을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가 얼마나 황홀하고 감미롭고 심오했던지 저는 연주 내내 그야말로 숨도 제대로 크게 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현관홀에 내려오니까 장영주 양의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이 끝없이 줄지어 있었는데, 저도 생각은 간절했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일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유명 인사들 주위에는 절로 열렬한 팬들이 모여듭니다. 연주자이든지 프로운동선수이든지 혹은 정치가이든지, 하여튼 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 그 주위에 운집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경우에는 아주 특별한 부류의 팬클럽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고 기록했듯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그 주위에는 항상 '세리와 죄인’들이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세련된 문화인들이라 할 수도 없었고 경건한 종교인 무리도 아니었고 사실 평균 수준의 사회인들도 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온 유대사회로부터 멸시와 미움의 대상이었던 그 ‘세리와 죄인’들이 우리 예수님을 가장 사모하던 열성분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을 감동시키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하여 베푸시는 죄 사함과 구원의 복음을 그들에게 들려주심으로써, 그 죄인들의 마음속에 이전에는 그 어디서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놀라운 감동과 기쁨이 느껴지게 만드시는 분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그 당시 ‘세리와 죄인’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켰던 그 역사, 오늘도 택함 받은 죄인들에게 꼭 같이 일어나고 있는 ‘죄인의 회개’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죄인의 회개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구원의 과정입니다.

본문 3절부터 10절까지에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는, 만약 서툰 해석을 갖다 붙이려 하다가는 오히려 사족이 되기 쉬운, 정말 쉽고도 멋있는 비유의 말씀인데, 이 두 비유들이 결론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꼭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잃은 것을 찾게 된 기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바 되었던 죄인을 도로 찾게 되는 기쁨이란, 사람이 자기의 중요한 소유물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게 되는 기쁨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비유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탕자의 비유’의 결론에 해당되는 32절 말씀,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는 말씀에서도 꼭 같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비유는 탕자의 비유와 비교해 볼 때 조금 다른 점을 하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주된 내용은 탕자 자신의 언행으로서, 그야말로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과정을 잘 묘사해 주는, 너무나도 감동 같은 비유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개란 것이 사람 편에서의 체험과 고백과 행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죄인의 회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람 쪽에서 그 어떤 행위를 하기 이전에 반드시 먼저 선행되어져야만 하는 요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두 비유에서 보면 잃어버려진 쪽, 즉 ‘길 잃은 양’과 ‘버려진 드라크마’는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양은 제 힘으로 목자를 찾아올 수 없고, 동전 역시 스스로 주부의 발 밑 으로 굴러 찾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찾게 되는 과정이란 전적으로 목자와 여인의 정성과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목자 쪽에서 “들에 두루 다니며” 잃은 양을 찾으려 하고, 여인 쪽에서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에 가면 두 비유에서 모두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잃었던 것들을 찾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목자와 여인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고 양과 드라크마 쪽은 순전히 피동적으로 발견되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과정이 곧 ‘죄인이 회개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바로 죄인이 회개하는 과정 역시 하나님 편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은, 사람 자신 속에서 절로 일어나는 심리현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죄인의 회개는 오직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을 찾아 주셨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 과정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길 잃은 양을 찾고 잃어 버려진 드라크마를 찾듯이 이 땅의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먼저 주도권을 행사해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택자의 심령 속에서는 비로소 ‘회개’라는 영적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사실을 깨닫고 시인하지 않으면, 그 회개란 것까지도 결국은 사람 자신을 높이는 일이 되고 맙니다. 회개란 것이 하나님께서 주도하는 과정이 아니라면,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양심 작용의 결과가 되는 셈입니다. 그것은 곧 사람이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양심만 가지고도 선한 것, 옳은 것, 의로운 것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언뜻 듣기에는 아주 당연한 말 같고 아주 옳은 논리 같지만 사실상 이것이야말로 바로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 했던 말,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거짓말과 꼭 같은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 자신의 도덕적 판단과 행위가 바로 종교의 본질인양 착각하는 것이며, 사람의 양심을 하나님의 선택보다 더 높이 올리는 인본주의적 우상종교가 되고 마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회개하는 데에 있어서 분명히 그 사람의 양심이 작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양심을 움직이고 그 양심을 회개하도록 만드는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있는 것을 꼭 깨닫고 인정하며, 자신에게 회개하는 양심이 일어나게 해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죄인의 회개는 하나님을 떠났던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11절 이하 24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 역시 너무나도 유명한 것이고 많은 교훈을 상고할 수 있는 말씀이지만, 이 시간에는 그 중에서 한 가지 요점만 중점적으로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둘째 아들, 즉 탕자의 생각과 경험과 행위를 통하여 반영되는 사실, 즉 ‘죄인이 회개에 이르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 둘째 아들에게 어떻게 회개할 마음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17절을 다시 보시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은 ‘정신이 들어서 생각하기를’이라는 뜻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를 떠났을 때와 아버지 곁에 있을 때에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이제 와서야 자기 머리를 스스로 때리면서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을 떠나도 돈만 있으면 아무 문제없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몫으로 돌아올 유산을 미리 가불받아서 다 현금으로 바꾸어 가방에 넣고 “먼 나라”로 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그의 인생은 “허랑방탕”이 되었고 그의 믿었던 재산은 “허비되고 다 없이”되어 버렸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얻은 일자리라는 것이 남의 돼지 키우는 것이었는데, 그래봤자 돼지 사료인 “쥐엄 열매”란 것조차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 둘째 아들은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이 “주려 죽는” 비참한 현실이 바로 아버지 곁을 떠난 이 한 가지 때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도 자기 아버지 곁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형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품군들까지 “양식이 풍족한” 것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바로 그 차이, 지금이라도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면 살아남을 수 있고 만약 끝까지 아버지를 떠나 살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 결정적인 차이를 이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작정을 했습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은 것” 생각하면 정말 낯을 들 수 없는 일이지만,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일컬음” 도무지 감당할 길 없는 부끄럽고 창피한 처지이지만, 그 아버지 곁에 있는 “품군”만 되어도 지금 아버지 곁을 떠나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것을 이제는 돌이켜 깨닫게 된 까닭에 그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려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인이 회개하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하나님 곁에서 멀어지면 나는 다른 인생에게 찢겨 죽을 위험만 가득한 ‘길 잃은 양’의 신세이며, 아무 곳에도 가치 있게 사용되지 못할 ‘버려진 동전’의 처지인 것을 우리는 꼭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 없으면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인지를, 돈만 있으면 내 인생의 다른 문제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다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얕고도 위험한 인생관이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 남은 것이라고는 내 육신 즐겨하는 대로 해 주느라고 스스로 자기 정욕의 종이 되어 매여 살다가 내세에 영벌의 지옥에 떨어질 일 밖에 없는 것을 우리는 늦기 전에 지금 ‘스스로 돌이켜’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떠나 사는 인생이라는 것이 자유롭고 행복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 형편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빨리 자각하고서, 아직도 우리를 기다려 주고 계시는 이 하늘 아버지께 속히 돌아옴으로써 남은 금세를 참 사람답게 살고 내세에 하나님의 양자의 자격을 회복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죄인의 회개야말로 천상과 지상 교회에 동시에 최고의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25절 이하 32절까지에서 예수님께서 이어 말씀하시기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그처럼 큰 기쁨을 주었던 ‘죄인의 회개’에 대하여 실로 싸늘하기 짝이 없게 반응한, 아니 오히려 분을 폭발시킨 “맏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맏아들은 그날도 “밭에 있다가” 돌아오고 있었다고 했으니, 두말할 것 없이 아버지의 일을 성실히 도우고 있던 아들이었습니다.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는” 그야말로 부모 공경하고 순종할 줄 아는 아들이었으며,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그의 동생과는 정말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모범적이 효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둘째 아들이 앞에 나왔던 ‘세리와 죄인’을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하다면, 이 첫째 아들은 누구를 비유하신 것이었겠습니까? 그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하고 예수님을 비방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객관적으로 볼 때 정말 모범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율법 말씀 바로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구약 성경책을 필사하고 또 연구도 하는,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맏아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결정적으로 결핍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잃은 아들을 찾아 기뻐하는 아버지의 기쁨을 전혀 함께 나눌 줄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은” 아들을 인하여 기뻐하는 아버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처럼 훨씬 모범적인 아들에게 “염소 새끼”로라도 대접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는 또한 자기 동생에 대해서도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동생’이란 말도 쓰지 않고 ‘이 아들’이라고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 맏아들은 자기의 행한 것을 근거로 하여 제 나름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동생은 아예 사람으로 칠 가치조차 없는 존재라고 낙인을 찍어 버렸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처럼 세리와 죄인들을 판단했던 까닭에 그런 사람들을 영접하고 교제하는 예수님까지 비난했던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인은 바로 이런 ‘맏아들’이 됩니다. 자기만큼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사람, 즉 자기라는 기준에 미달되는 다른 교인들을 도무지 눈뜨고 볼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잘 순종하고 항상 교회 일에 열심인 나와는 도무지 비교도 안 되는 수준 낮은 교인이 한 교회, 같은 전도회, 같은 구역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못 견디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이 ‘잃었던 것을 찾게 된 기쁨’이란 것은 결코 생길 수 없고 오직 차가운 경멸만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어떤 한 모범 신자, 모범 장로, 혹은 목사의 신앙 수준이 기준이 되어 거기 통과되는 사람만 모이게 되는 곳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너나 할 것 없이 다 자기 자신을 오직 ‘세리’요 ‘죄인’인줄로만 알고 고백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의 식탁에 모이는 곳입니다. 나보다 신앙생활 좀 더 못한다고 여겨지는 교인이 보이면, 바로 그 순간에 자기 자신이야말로 바로 그 교인보다 더 못한 죄인이라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나보다 훨씬 못해 보이는 교인과 나란히 앉게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이야말로 예수님 앞에서는 바로 그 교인보다 몇 배 더 형편없는 세리와 같은 인생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만, 우리 교회는 그 예수님을 식탁의 주인으로 모신 상 주위에 다 같이 기쁨의 잔치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상 교회에서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회개하는 것은, 천상 교회에 계신 우리 주님과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도 최고의 기쁨이 됩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기쁨이 없는 교회는 그저 사람들끼리의 교제에서 오는 정도의 기쁨만 남게 될 것이며, 죄인을 전도하여 회개시킬 줄 모르는 교회는 우리 하늘 보좌에 계신 우리 주님께 사실상 아무 기쁨도 드리지 못하고 자기들끼리만 좋아하는 염치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써 불신자들로 하여금 ‘저 교회 사람들은 도대체 뭐가 좋아서 저렇게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까?’하는 궁금증이 절로 생기게 만들고, 또한 친구와 이웃들을 전도하여 같이 구원받게 함으로써 오늘도 저 천상 교회에서도 기쁨의 환호성이 터지게 만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바리새인들의 종교에는 신앙생활 관한 한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한 구절 한 구절, 아니 한 단어 한 단어까지 줄줄 외우고 도가 트인 자들이었습니다. 자기네들 딴에는 완벽한 경건인이 되겠다고 남들보다 수십 배 노력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정기적으로 많은 시간 동안 기도도 했으며 한 주일에 두 차례의 금식도 예사롭게 행하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종교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참된 회개가 결여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죄 회개’가 빠진 그들의 종교생활은 자연히 외식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죄 회개’가 선행되지 않았던 그들의 경건이라는 것은 바른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없는 헛수고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영접 받고 용서받게 되어 기뻐 어쩔 줄을 모르는 ‘세리와 죄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남보다 낫다’고 자처하는 중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해 하며, 더 나아가서 자기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중에 자기가 아예 하나님 자리에 앉아 버리는 ‘바리새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오직 이 둘 중에 하나, ‘회개하는 죄인’ 아니면 ‘교만한 바리새인,’ 이 둘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서약할 때에 네 가지 서약들 중에서 제일 먼저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며 마땅히 그 진노를 받을만한 자”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주 의미심장하고도 중요한 것입니다. 죄 회개 선행되지 않으면, 두 번째 서약,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구원 받는’ 과정으로 넘어갈 길이 없으며, 세 번째 서약인 ‘경건한 생활’로 이어질 수가 없으며, 네 번째 서약대로 ‘교회의 정결함과 화평함을 이루는’ 교회의 참된 정회원이 되는 것 역시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하는 데에는 무슨 어렵고 복잡한 미구여구가 절대로 필요 없습니다. 둘째 아들도 처음에는 그것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라고 18절과 19절에 기록된 대로, 미리 외우고 리허설을 하면서 아버지께로 왔던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그 준비해 두었던 대로 회개의 대사를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거기까지는 잘 나왔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바로 그 다음에 “~하나”라는 말이 있고 그 다음에 이어서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하면서 잔치 준비를 시켰습니다. 원래는 여기서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는 말과 그 다음의 “~하나”라는 말 사이에 더 들어가야 할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열심히 외우고 준비해 왔으니까 둘째 아들이 잊어먹은 것은 결코 아닐 터인데, 왜 여기서 그 말이 빠졌겠습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왜 그 말이 빠지게 하셨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아버지가 더 이상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 아들의 말을 막으면서 당장 잔치 벌일 준비부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아들로서는 정말 부끄럽고 죄송한 까닭에 자기 딴에는 정말 진정한 고백과 겸손한 각오로써 회개의 대사를 준비해 왔지만, 아버지 쪽에서는 그 말을 다 들을 필요조차 없이 그저 반갑고 기쁘기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도 하늘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회개하는 탕자들을 영접해 주시는 방법입니다.“주님,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나님 떠나 살던 지난날을 부끄러워하며 손들고 나아오는 우리의 첫마디가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긴 말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시고, 아예 우리가 무슨 죄를 회개하는지에 대해서 벌써부터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당장 저와 여러분을 당신의 친자녀로 인정하는 새 옷을 입히시고 가락지를 끼워주시며 잔칫상을 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무슨 친목회를 백번 가지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진짜 기쁨을 나누게 해 줍니다. 하나님 떠난 나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깨닫고 그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가는 것, 이 체험이 없으면 아무리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마음에 무슨 평안과 위로를 얻었다 해도 다 헛일일 뿐입니다. 이런 회개가 내 마음 속에 일어나게 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 회개한 후에 이것을 할 줄 모르면 그것은 오직 인간 자신의 양심만을 찬양하는 한갓 인본주의 종교로 끝날 따름입니다. 우리 각자가 모두 이처럼 ‘회개하는 죄인’이 됨으로써 이 교회 안에서 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신 구원의 잔치를 큰 기쁨으로 함께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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