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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능력있는 일꾼으로 세우소서 (엡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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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뀔 때면 누구든지 꼭 하는 한 마디가 있다.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는 말이다.
시편 90편 말씀에 보면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의 인생이 날아간다는 표현이다. <<동영상을 잠깐 보자>>

이렇게 빠른 세월이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정말로 무엇을 위해서 어디에 투자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중요한 주제이다. 특히 요즈음의 시대가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1967년에 미국의 어느 대학 신입생들에게 부유하게 사는 것과 인생을 의미있게 사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중요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 여론 조사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의미있게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응답하였다. 그런데 1986년에 같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80% 이상의 학생들이 의미있게 사는 것 보다는 부유하게 사는 것이 더 좋다는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만일 요즈음에 2006년을 시작하는 이 시점에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돈도 좋지만 재미있게, 즐기며 사는 것이 좋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돈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크다.
이같이 엄청나게 빨리 흐르는 세월 속에서 의미있고 보람있고 후회없이 사는 삶은 뒤로 하고 하루 하루를 재미있게, 즐기며 사는 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되었다.
이러한 삶을 향하여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심판의 날에 임한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얼마나 우리에게 심각하고도 중요한 말씀인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이렇게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주의 일은 헛되지 않는다.

어느 의과 대학생이 쓴 글을 소개한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해부학 첫 실험 시간에 해부실로 들어갔다. 해부도구와 수술용 고무장갑 그리고 비닐로 된 앞치마에 흰 실험복까지 갖춰 입고 실험실의 문을 여니, 거기에는 실험대마다 한 구씩 모두 32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시체의 피부를 벗기는 것이 첫 해부학 실험 시간의 과제였는데. 그 작업을 하는 동안 그것이 단지 시체일 뿐 사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공 모형 배를 가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착각과 함께 나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이 사람들도 살아 있었을 때에는 모두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며 살았겠지. 돈도 있었고, 명예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고, 또 죄를 짓고자 하는 사악한 마음도 있었겠지. 그런데 이제 그들은 자신의 머리털조차 다 깎인 채 실험대에 누워 있다. 부끄러움도 없이 발가벗긴 채로 말이다. 이제는 옷이 아니라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이 잘리고, 내장이 도려내지고, 뼈가 추려지고 있다. 그것도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신출내기 의사지망생에 의해서 말이다. 이 아주머니의 얼굴에 평생 동안 발라졌던 화장품은 얼마어치나 되었을까? 저 아저씨는 저 손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만졌으며 그것으로부터 얼마만큼의 만족을 얻었을까?

그 순간 갑자기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지금의 나 자신과 이 시체들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단 말인가?

우리가 살아있지만 삶과 죽음의 차이가 그리 멀지 않다. 죽은 자와 산 자와의 차이는 산 자는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도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빠른 인생을 사는 동안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인가?

여러분이 오늘 죽는다면 묘비에 뭐라고 써 놓을 것인가? 어떤 부자가 숨을 거두자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비석에 글을 쓰려고 한 시인을 찾아갔다. 그 시인은 아들에게 아버지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물었다. "저의 아버지는 조용히 편안하게 사시다가 편안하게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시인은 그에게 사흘 후에 오라고 했는데 그 때 내어준 비명은 너무 간단했다. 그것은 "태어나다. 먹다. 죽다" 였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니 그 글이 틀리지는 않는 것이다.
나의 수첩에 내가 써가지고 다니는 글이 있다. 이것은 마치 나중에 이런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곽주환 목사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몇 년 전에 이러한 글을 적고 다시 읽어보고,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도 괜찮은 것 같다.

브라질 상파울로 시립 묘지의 비석에 모두 똑같은 표시가 있다. 태어난 날에는 별, 죽은 날에는 십자가를 하였다. 관리인에게 물으니 관리인의 대답이 "사람들이 이 세상에 출생할 때는 저마다 스타(별)인 것처럼 태어나지만, 갈 땐 저 길 밖에 더 있겠어요?"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모두가 별이 되고 싶어한다. 부모의 기대 속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마지막 인생을 마무리 할 때에는 결국에 십자가만 남는다. 결국에 내가 예수를 위해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가?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특히 2006년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올해의 주제를 “능력있는 일꾼으로 세우소서”라고 정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로 주의 능력있는 일꾼으로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헛된 수고가 아니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능력있는 일꾼은 “복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다. 복음의 열정이 있다. 목표가 뚜렷하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살았던 일꾼이었다. 복음의 열정을 지닌 자이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못 사는 사람이 잘 살게 되었다. 이것도 복음이다. 아픈 사람이 낳게 되었다. 이것도 복음이다. 힘이 든 사람이 힘을 얻었다. 이것도 복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두 번째 세 번째에 해당하는 복음의 능력이다. 복음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죄 사함의 역사이다. 오늘날 교회가 왜 힘을 잃어가는가? 죄 사함의 역사를 강조하기 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주는 위로와 소망 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핵심은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요, 복음의 핵심이다.

바울은 복음에 미친 사람이었다. 복음을 위하여 올인한 사람이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던졌던 사람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이다. 생각하는 것도 허망한 생각만 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생각을 하여 결국에는 살았지만 죽은 존재이다. 시편 말씀에 우리에게 정확한 표현으로 가르쳐 준다. “사람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시 49:20) 사람은 참으로 존귀한 존재이다. 태어날 때에 얼마나 귀하게 태어나는가? 사람은 존귀한 존재이지만, 이 복음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에는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 복음의 능력으로 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이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바란다.

그 다음 말씀을 보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다양한 달란트, 다양한 재능을 주신다. 다양하게 축복해 주신다. 그것을 통해서 복음을 위하여 쓰임받기를 원하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바로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주신 선물이다.

무디(D L Moody)는 자기의 전도 강연을 들은 사람으로부터 이런 충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당신의 강연은 문법적으로 틀리는 게 많습니다. 대중연설은 좀 삼가시는 것이 좋겠는데요.” 그는 학자였다. 그러자 전도자 무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예, 미안합니다. 저는 그렇게 부족하지요. 그래서 말하는 것도 서투르고 많이 틀립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을 위해 쓰이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당신의 그 좋은 지식과 통찰력과 판단력이 참 부럽습니다. 당신은 그것들을 주님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시는지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총동원되어서 복음을 위하여 쓰임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주어진 달란트가 잘 활용되려면 교회 안에서 서로 격려하고 칭찬해 주고 서로 인정해 주는 노력이 참으로 필요하다. 요즈음에 축구에 관계된 뉴스를 보면 왜 그렇게 배고픈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다. “히딩크도 승리에 배가 고프다고 말하더니, MU의 퍼거슨감독이 64세인데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라고 말했다. 승리에 배가 고프다는 이야기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 모두가 격려와 칭찬에 배가 고프다. 그것은 담임목사인 나도 칭찬과 격려에 배가 고픈 사람이다. 어느 권사님이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목사님 한 해 동안 말씀 고마웠습니다. 힘 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어느 권사님은 도서비를 살짝 전해 주면서 “좋은 말씀 기다릴께요 설교준비하는데 사용하세요.” 내 마음에 얼마나 큰 격려가 되는지 모른다.

우리 교회에 각 사역팀이 많아지고, 다양한 소그룹이 많아질 텐데 그 안에서 서로 격력하고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그러한 분위기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처음에 들어가서 가득이나 어색한데 텃새가 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운 일꾼들이 능력있는 일꾼으로 자랄 수 있겠는가? 서로 위하여 격려하고 인정해 주는 그런 모습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지난 중국에 갔다오면 대한항공을 탔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비행기 회사의 사장이 우리 교회 장로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목사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다니시는 곳은 제가 어디든지 책임을 지고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있는 일꾼이 주변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에 소원도 가져보면서 이러한 사람이 생기기를 위하여 기도했다.

사랑하는 성도여! 빠른 세월지나는데 능력있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께 칭찬받고, 후손이 잘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곽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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