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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선을 베풀고 나누는 교회 (히 1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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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말씀은 히브리서의 마지막 결론 부분으로써
히브리서의 목적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신자답게 살도록 하느냐?>에 대한 답변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먼저 눈이 뜨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우월하고, 모세보다 우월하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 십자가의 사랑을
왜, 어디서,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본문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2006년 이 한해는 다시금 결심하고
신자답게 살아가는 내일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2절 [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
그러므로 하는 것은 구약의 제사를 예를 들어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다가 피는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르는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답이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위험한 파도 속을 헤엄쳐 가서 바다에 빠진 한 소년을 건져주었습니다.
얼마 후 의식을 차린 소년이 구해준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제 생명을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모르겠읍니다.」
「괜찮다 꼬마야,
다만 너의 생명이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거라는 것을
앞으로 살아가면서 너의 인생에서 증명해 보이거라」했습니다.
참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살아가면서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주는 삶이 아닐까요?

그럼 신자답게 사는 삶이 어떤 삶입니까?

13절「그런즉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를 위한 고난을 각오한 삶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볼 때도 십자가 하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표상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종교적 표식으로
교회 종탑 꼭대기나 성직자의 양복 깃에나
성도들의 목거리에 달고 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십자가의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신앙이란?
바로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예수께 나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즉 주를 위해 고난 받을 것을 각오한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이 십자가가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들려준 말씀
갈6:14절에
[ 내게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없다 ]
는 고백이 점점 퇴색되어 마치 선반위에 올려놓은
먼지 않은 명심보감 속의 어느 경구쯤으로 들릴 정도입니다.
그러나 골2:3절에
하나님은 십자가 속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감추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신앙이 되지 아니하고는
영구한 도성에서 장차 우리를 위해 예비해놓은
은헤와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것에서는 영원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만이 영원하고 값진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고서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십자가의 길이
고생의 길이요 죽으로 가는 길 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생명의 길이요 영원한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마저 이 십자가가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너무 자주 듣고 대하다 보니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처럼
무관심 하거나 내 가는 길에 거치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십자가의 신앙을 소유하지 아니하고는
기독교의 진정한 생명과 축복을 누릴 수 없고 나타낼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베스트 셀러였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란 책의 2권째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무리의 유목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빛이 그들을 에워쌌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특별히 자기들을 위해 준비된 천상의 메세지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 너희는 지금 가능한 많은 돌을 모으라. 그것들을 너희 배낭 속에 넣으라.
그런 다음 그것을 짊어지고 하루 동안 걸어라.
내일 밤이 되면 그 돌 때문에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할 것이다. ]
유목민들은 서로 실망과 분노의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는 노골적으로 불평을 털어 놓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와 장수를 가져다주고
세상에 온 목적을 실현시켜줄 위대한 진리를 듣기를 기대했는데
아무 의미도 없는 힘든 노동만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찬란한 빛 때문에 그들 각자는 두덜거리며
마지못해 몇 개의 돌을 주워 배낭에 넣고 짊어졌습니다.
그냥 걸어가도 지친 사막길인데 돌멩이를 지고 갈려니 더 힘들고 고됩니다.
하루 동안 걸어간 뒤 밤이 되자 천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배낭에 있는 돌들을 꺼내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돌들은 모두가 다이아몬드로 변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더 많은 돌을 줍지 못한 걸 후회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가치를 증명해 줄 실제적인 사건이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돌 대문에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할 것이라는 메시지처럼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우리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가
배낭 속의 돌덩이처럼 나의 삶을 더 무겁고 지치게 하는
거치장스러운 것이라 여겨질 줄 모르지만
언젠가는 십자가의 신앙이 나의 생애에
최고의 영광과 값진 삶을 보상해 줄 날이 올 것입니다.
고전1:18절에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합니다.
능력 있는 유대인 같은 사람들이나 똑똑한 지혜로운 헬라인 같은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신앙의 삶이 미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십니다.
십자가의 신앙의 진가는
주를 위해 고난 받을 것을 각오하고
구원받을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예수께 나아가자 ! ]
그리스도인이 신자답게 사는 길은 이 길 밖에 없습니다.
영문 밖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길이야 말로
하나님이 계시는 영구한 도성으로 나아가는
가장 가치 있는 생명의 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마16: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의 제자 베드로 처럼
[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게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고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막상 에수님께서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십자에 못 박혀 죽으리라 할 때
[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 하는 베드로처럼
우리는 예수 따라간다고 하면서 편한한 것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16:24절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십자가를 질 각오 없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신앙생활 거기에는 진정한 축복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를 위해 고난 받을 각오를 하고
예수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십자가의 신앙을 소유했다는 첫 번째 표식이 무엇일까요?

15절에
[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 신앙의 첫 번째 표식은 입술의 열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십자가의 신앙을 가졌다면
늘 하나님 앞에 찬미의 제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다분히 형식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찬미의 제사는
자원하는 심령으로 드려지는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찬493장 4절에
[ 주 따라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 찬송을 부르며 뒤따라가리다 ]
도살장에 끄려가는 소와 같은 죽을 인상이 아니라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는 살아 있는 예배가 되어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신앙은
십자가 신앙은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신앙입니다. 찬송이 언제 나옵니까? 심령이 살아있을 때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예배를 드릴때 가만히 보면
두 부류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예배 순간, 순간 표정이 달라지면서
마음의 감격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교인이 있는가 하면
예배를 드려도 세상에서의 틀에 박힌 삶 그대로
얼굴의 근육이 굳어져서 무표정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표정한 사람들 - 얼마 전까지
스포츠 감독하고, 고속도로 톨게이트 표 받는 직원하고
왜 그럴까요?
감독은 상대편을 꼭 이겨야 하니
상대편 허점만 살피다 보니 얼굴이 굳어져요.
친선 게임 할 때 보세요. - 웃음바다입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표 받는 사람들
하루에도 수도 없이 계속해서 차가 몰려오니 기계적으로 반복하다가 시간이 되면 요금박스에서 나와 퇴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톨게이트 직원은 많이 달라졌어요.

미국 센프란시스코 금문교 다리위에 통행료 징수대가 17개나 있다고 합니다.
모든 근무자들의 표정은 다 굳어져있는데
그런데 비단 한 징수대 청년은 음악을 틀어놓고 몸을 흔들며
지나가는 운전자에게 손을 흔들며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상해서 한 운전자가 물어보았답니다.
[ 당신 지금 뭐하는 거요? ] [ 춤추고 있지요. ]
[ 왜? 당신 혼자만 그렇게 신이 나지요? ]
[ 그걸 물을 줄 알았소.
다른 사람들은 아침에 출근해서 다 저 관속에서 죽어 있지만
난 그럴 수 없지요.
나는 에어로빅 선생이 되는게 꿈인데 지금 연습하고 있소. ]
그러면서 건너편에 사무실을 가리키면서
[ 저곳에서 내 월급을 주지만 말하자면
저 사람들이 내 강습소 강습비를 대 주고 있는 거지요. ] 하더랍니다.
정확히 똑같은 상황에서 열여섯 명은 죽어 있는데 한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사흘만 있으면 지겹다고 하는 관속 같은 곳이지마는
한사람은 거기서 꿈을 꾸면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 같은 시간에 거의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많은 교인들은 똑 같은 순서 속에서 영안실 신자가 되어있지마는
그러나 어떤 교인은 감격하며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한 사람을 주목하시는 분이십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뉴튼 베이커>가 직접 목격했던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전쟁 중 어느 야전병원을 방문하였는데
그곳에서 매우 끔찍한 부상을 입은 미국인 병사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병사는 두 다리와 한 팔,
그리고 한쪽 눈까지 잃어버린 처참한 상태로 누워 있었습니다.
모든 부상 병사들은 신음하고 불평을 하고 있었지만
이 병사는 찬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베이커씨가 두 번째로 그 병원을 방문했을 때
그 병사의 모습은 눈에 띄질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원장에게 물어 보았더니
간호원과 결혼하여 퇴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몇년의 세월이 흘러 베이커씨는 국방장관직에서 퇴임하였으며
존 홉킨스 대학 재단이사장으로 봉직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봄, 재단이사장으로서 졸업식을 주관,
박사학위를 수여하던중
베이커씨는 휠체어에 앉아 박사학위를 받으러 나오는
그 병사를 발견케 되었습니다.
5년 동안 집념을 불태운 끝에 박사학위를 받게 된 그 병사를 보자
그는 너무도 놀랍고 반가와서
그 학생의 남은 한손을 붙잡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때 그 청년이 베이커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베이커 장관님, 은퇴하셨다는 것을 신문 지상을 통해 알았습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보람 있는 일이 많이 있지요 ]
대부분의 부상 병사들은 신음하며 불평할 때
이 한 사람, 찬송하며 감사하는 사람만이
세상을 보람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감사가 있고 우리의 예배에 찬미가 있다는 것
바로 입술의 열매라고 합니다.
열매있는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십자가의 신앙을 가진 자의 특징이 살아 있는 예배라면
살아 있는 예배가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사랑의 손길로 나타나야 합니다.
16절 [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십자가의 신앙은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앞장 성경 야고보에서도 그렇고 히브리서에서도 그렇고
둘 다 배경은 환란과 핍박 속에 처해있는 교회의 형편입니다.
그런데 꼭 같이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나눠주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어려울 수록 함께 사랑하고 나누라는 하나님의 계명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신앙과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고후4:10절에 보면
[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 진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의 신앙을 소유했다면
우리의 삶에 예수 생명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생명이 때로는 역동적인 생명으로 나타나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꺼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하는
역경에 굴하는 자가 아니라 환경을 바꾸어 놓는자들 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때 미국전역에 이런 슬로건이 퍼진 적이 있었습니다.
[ 때로 너의 인생에 엉뚱한 친절과 정신 나간 선행을 실천하라 ]
사건의 발단은 이러합니다.
한 여성이 톨게이트에서 자동 매표기에서 산 7장의 티겟을 내 밀었습니다.
[ 한 장은 내 것이고 나머지 6장은 내 뒤에 오는 차를 위해
내가 대신 내어주는거요 ]
뒤에 따라오던 여섯 대의 차들에게 징수원은 말했습니다.
[ 앞에 가는 어떤 여성이 당신들의 요금을 미리 내었소 좋은 하루 되시오. ]
이런 정신 나간 선행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
미국 전역에서 이런 선행운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교회는 너무 계산적인 선행만 하지
이 여인 같이 정신 나간 선행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선행을 행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정신 나간 선행 한 가지 소개할게요.
수년 전 뉴욕 집회 때 한 장로님이 부인 권사님과 함께 기도해 달라고 해요.
그런데 권사님이 너무 힘없어 보여요.
어휴, 예수를 믿어도 왜 저렇게 생기가 없어,
그렇게 생각이 드는데 얼굴은 평온해요.
그런데 장로님이 하시는 말이
[ 목사님 이 정신 나간 할망구하고 같이 못살겠다 ] 하면서
사유인즉 얼마 전에 서울 자식한테 다녀왔는데 장로님하고 상의도 안하고
자기 신장을 그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떼 주고 왔다 해요.
[ 이런 할망구가 어디 있습니까? ] 그러니 옆에서 목사님이
[ 권사님 제가 부끄럽습니다. ]
저도 그랬어요. 속으로「저도 부끄러워 할 말이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도 엉뚱한 친절과
정신 나간 선행을 베풀 줄 아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게 진정 나눠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의 신앙을 가졌다면
그 신앙은 교역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이것은 무얼 말하는가 하면 바로 권위 문제입니다.
빌2:5-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8절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아버지의 권위 문제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에 대한 권위 앞에 순종의 표상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하나님의 권위를 인도하는 교역자에게 위임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어느 때 까지 자라는가 하면
지도하는 목사에 대한 순종하고 복종하는 마음이 있을 때까지입니다.
교역자에 대해서 이단 안 가르치고 자기 욕심 부리는 것 아니거든
순종하는 교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는 수만 있다면
목회자 즐거웁게 목회 하도록 도움 주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앙을 가진 자의 다른 한 면입니다.

<결론>
내가 어떻게 하면 신자답게 살아갈 수 잇겠습니까?
십자가의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예수께 나아가는 십자가의 신앙의 소유자 되시기 바랍니다
주를 위해 고난 받을 각오하면 두려울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십자가의 신앙은 예배를 통해 찬미의 제사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신앙은 형제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도 엉뚱한 친절과 정신 나간 선행을 만들어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십자가의 신앙은
교역자와 관계에서 순종하고 복종하며
나아가 즐거웁게 목회하도록 도와주는 교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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