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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칠 결심 (스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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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7:1)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저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스 7:2)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손이요 아히둡의 육대손이요
(스 7:3) 아마랴의 칠대손이요 아사랴의 팔대손이요 므라욧의 구대손이요
(스 7:4) 스라히야의 십대손이요 웃시엘의 십 일대손이요 북기의 십 이대손이요
(스 7:5) 아비수아의 십 삼대손이요 비느하스의 십 사대손이요 엘르아살의 십 오대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 륙대손이라
(스 7: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
(스 7:7) 아닥사스다 왕 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스 7: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년 오월이라
(스 7:9)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스 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1.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열심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간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적인 환경, 가정적인 환경, 재정적인 환경 등 다양한 환경의 문제로 자신의 현실을 합리화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더 이상 그러한 환경 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모습을 환경 때문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환경으로 인하여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아시며 미리 조치를 취하시고자 하시지만 그 결과를 환경 탓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그에 대한 풍성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의 현재 모습이 악한 모습이라면 그 모습은 환경 때문에 형성된 모습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열심이 부족해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어떤 환경 가운데 처해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열심만 있다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열심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열심을 내도록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열심이 없는 가운데서 행하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를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심을 먼저 회복한 후에 하나님의 일을 향한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열심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에 대한 열심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스 7:1의 “이 일 후”라는 표현은 그러한 증거를 짧은 세 단어로 집약하여 나타냅니다. “이 일 후”라는 표현 속에는 수십 년간의 역사가 집약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압축하여 표현합니다. 스 1:1-6:22에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바벨론의 1차 포로귀환자들이 성전 건축을 끝내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 7:1의 “이 일 후”는 그 역사를 끝내고 58년이 지난 B.C 457년입니다.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대적들의 방해를 극복하고 성전을 완공한 후 반세기가 지난 다음입니다.

바벨론 1차 포로귀환자들도 처음에는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열심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열심 때문에 성전재건을 위한 1차 귀환자 대열에 합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전재건의 일에 열심을 내며 대적들과의 갈등 속에서 그 일을 마무리한 후부터는 그 열심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열심이 사라지고, 일에 대한 열심만이 남았다가, 그 일이 끝난 후부터는 모든 열심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열심이 사라진 58년 후의 모습은 참으로 기가 막힌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늘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어떤 큰 행사를 끝낸 후마다 영적인 게으름과 부패가 찾아오곤 합니다. 그리고 그로인해 나타나는 각종 갈등과 분열과 다툼과 타락의 모습들을 환경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환경 탓이 아니라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열심이 사라진 탓입니다. 환경적으로는 이스라엘로 귀환한 사람들의 환경이 바벨론에 종으로 있었던 환경보다 훨씬 좋은 환경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유대인보다 더 부패하였습니다.

2.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람을 인도한다.

“이 일 후”에 보이는 모습은 이스라엘에 돌아 온 자들의 신앙을 오히려 바벨론에 여전히 종으로 남아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더 염려하고 걱정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바벨론에 종으로 남아 있던 자들의 영적인 모습이 이스라엘에 돌아온 자유자들의 영적인 모습보다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환경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열심에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환경에 관계없이 그 열심의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이 바사에게 넘어간 후에도 종으로 남아서 종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심을 포기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이방인의 땅에 끌려와 사는 종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외적인 환경과 신분이 다양하게 변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자신의 정체성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제 에스라가 직접 이끄는 바벨론 2차 포로귀환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부패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적 개혁 운동을 시작합니다. 스 7:1-6은 에스라의 인물됨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에스라의 육적인 모습, 영적인 모습, 말씀에 대한 열심, 일에 대한 성실함 등 전반적인 모습을 소개합니다. 이 모든 모습은 바벨론이라는 악한 환경 속에서 에스라가 지켜 왔던 모습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환경을 탓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영적으로 타락할 때 드러난 에스라의 모습입니다.

에스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의 인물입니다. 육신적으로는 이방인인 페르시아의 강력한 왕권에 굴종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대제사장 아론의 십 륙대손”으로서 제사장 계열의 정체성과 신분을 유지해 온 인물입니다. 1대 대제사장인 아론으로부터 아버지 스라야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어 오던 제사장 신분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해 온 인물입니다. 이방인의 땅이며 강력한 우상과 신상의 경배를 강요당하는 바벨론 땅에서 지켜 온 하나님의 제사장 신분입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로부터 출발한 바벨론 땅에서의 제사장들의 삶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가장 곤고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목에 칼을 들이밀며 강요하는 우상숭배의 이방인의 땅에서 제사장의 신분과 정체성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라의 가문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열심을 통해 그 신분과 정체성을 유지해 왔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중심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삶을 유지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차매 그를 불러 이스라엘을 회복케 하십니다.

특히 스 7:6은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라고 그 인물됨을 소개합니다. 에스라는 첫째로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였습니다. “익숙한”이라는 단어는 “빠른, 즉석의, 숙련된, 준비된”이라는 뜻으로서 “준비를 갖춘, 자격을 갖춘”이라는 의미입니다. 에스라는 영적인 책임을 느끼고 준비를 갖추어 온 학사였습니다.

고난의 환경, 악한 환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준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에스라는 그 준비를 갖춘 자입니다. 에스라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인 문제를 책임져야 할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대제사장의 반열에 뽑힌 자로서 영적 책임을 느끼는 자였습니다. 악한 환경을 탓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열심 속에서 준비해 오던 자였습니다. 그의 말씀에의 열심은 율법에 익숙하게 하였습니다.

둘째로 그는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였습니다. 이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던 자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이방인의 왕으로부터도 구하는 것을 다 받는 은혜를 입어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에게 준비된 것을 이룰 수 있는 환경까지 갖추었습니다. 환경을 구하던 자들은 하나님도 잃고 환경도 잃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구하는 자는 둘 다 얻게 됩니다.

셋째로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비전”으로 살았습니다. 에스라의 모든 준비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열심과 성실은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고 행한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다”라는 표현이 6, 7, 8절에 세 번이나 연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현실적인 지배자인 바벨론과 바사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중심인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비전 중심의 인생을 살아 온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쓰셨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람은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는 계획성 있는 사람이다.

에스라의 세 가지 인물됨은 에스라의 세 가지 준비사항과 동일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심이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첫 번째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회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물질적 환경의 도움을 위한 왕의 도움을 입을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회복을 위해 언제든지 몸과 마음으로 순종하며 행할 수 있는 에스라 자신의 개인적인 비전의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고난과 악한 환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준비해 온 에스라는 하나님의 때가 되자 비전을 향해 몸을 움직였습니다. 스 7:7-9는 “아닥사스다 왕 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년 오월이라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라고 그 움직임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에스라는 자신이 준비한 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수고를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위해서 그 먼 거리를 4개월의 긴 시간을 들여가며 이동하여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렵더라도 우리가 준비한 것을 사용할 곳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에스라의 움직임은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각성과 부흥의 시각이 더욱 크게 하였습니다. 준비된 자의 움직임이 공동체의 회복을 이루며, 공동체가 하나님과 세상의 도움과 인도함 속에서 형통한 삶을 회복하게 됩니다.

준비되지 않은 자의 열심은 공동체의 문제를 만들어 내지만 준비된 자의 열심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은혜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심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열심은 우리로 하여금 에스라와 같은 세 가지의 준비를 갖추게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익숙함으로 준비되게 하며, 주변 환경의 도움을 입을 수 있는 육적인 조건을 갖추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비전을 정리하게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여전히 곤고한 환경에 처해 있는 성도들은 환경을 탓하지 말고, 그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찾는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은 낼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과 말씀을 찾는 열심은 그 어떤 환경도 가로막을 수 없는 것으로서 모든 환경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라와 같은 세 가지 준비를 갖추고 새해를 맞이하는 성도들은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듯이 비전의 땅을 향해 직접 열심을 내어 올라가야 합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삶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하여 결심하였습니다. 스 7:10은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라고 알려줍니다. 에스라의 결심은 세 가지가 순서대로 나타납니다. 에스라의 결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결심입니다. 그러나 이 결심은 한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결심이 아닙니다. 바벨론의 고난의 환경 속에서 준비되어 온 결심이며, 에스라의 산 증거이며 고백입니다.

첫째로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기로 그의 마음을 확고하게 하였습니다. “율법(토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법이며, 삶의 방향과 삶의 방법에 대한 유일한 기준입니다. 자신이 바벨론에서 제사장의 신분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말씀 연구를 첫 번째 결심의 영역에 두었습니다. 모든 악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물로 설 수 있게 하셨던 말씀 연구에 첫 번째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자유자로 돌아왔을지라도 그 우선순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율법을 준행”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준행(아싸)”이라는 단어는 “만들다”라는 의미가 가장 강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라가 연구한 말씀을 준행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연구한 그 말씀 그대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들어 가겠다는 결심입니다. 먼저 자신이 말씀의 준행자로 만들어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말씀의 준행자로 만들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자신이 연구한 말씀을 자신이 준행할 때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율례(호크)”는 지휘나 명령, 규칙이나 규정 등이며, “규례(미쉬파트”는 모든 영역의 다스림의 의미를 지닌 법률적인 판결, 정의와 같은 것들입니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이것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에스라의 결심은 즉흥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준행하는 삶을 살았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철저히 계획적이었습니다.

4. 하나님은 우리에게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칠 결심을 원하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는 계획성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즉흥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 감화는 즉흥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십니다. 그러나 사역은 즉흥적인 역사가 아닌 오랜 기간의 준비와 계획 속에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도 즉흥적인 인생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의 준비와 계획이 진행되고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위해서 우리를 태초부터, 모태로부터 준비해 오셨습니다. 에스라의 삶은 그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에스라처럼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칠 결심을 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움직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열심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말씀의 연구에 대한 열심이 없이는 자신과 공동체에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을 품고 움직일 때마다 공동체가 더욱 큰 짐을 지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 연구에 대한 열심에서 출발하지 않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은 교만과 불만 등 악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이하며 새롭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모든 사역자들은 그 일보다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일에 대한 열심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심이 더욱 크게 나타나야 합니다. 성령께서 말씀 연구를 통해 강권하시는 열심을 통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칭찬만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자로서 헌신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교회나 다른 사람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평가를 가장 두려워하며 사역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이러한 사역을 기본 원칙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자들이 행하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교회적으로, 또한 담임목사가 별도로 어떤 칭찬도 격려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인간의 칭찬과 격려는 그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으며, 그의 교만을 부추기는 것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 잘못 전달되게 되며, 하나님께 받을 상급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오직 어린 성도나 연약한 성도의 경우에만 선별적으로 칭찬과 격려가 있을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 연구로부터 출발한 사역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때마다 교회적으로 그 사역을 후원하지 않습니다. 그 사역을 가급적 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말씀에서 출발하지 않은 사역은 그 자신과 교회 공동체에 어려움을 주며, 어떤 영역에서도 유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먼저 말씀 연구에 집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자신이 준행하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말씀이 준행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한 해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소망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기로 결심하는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최소의 소망이며 결심입니다. 자신의 환경을 구하는 결심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고자 하는 결심보다도 더욱 중요한 결심이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고자 하는 결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결심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에스라의 결심이 우리의 결심이 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직분의 쓰임을 위해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에스라가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제사장 계열의 신분임을 잊지 않고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삶에 최선을 다한 것처럼 하나님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신분과 위치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에 처할지라도 그 신분을 유지하는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양한 환경적인 어려움이 밀려와도 그 신분을 위한 삶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방법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행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는 자로 살아가면 됩니다. 자신이 비천한 위치이든지, 고귀한 위치이든지, 악한 환경이든지, 선한 환경이든지 그곳에서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칠 때 자신의 신분은 견고해집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신분이 견고해질 때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공동체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발걸음을 옮길 때 하나님의 역사가 임합니다.

이제 에스라가 완성된 성전에서 지내는 자들의 영적 회복을 위한 결심을 한 것처럼, 완성된 교회 공동체 안에 거하는 연약한 지체들의 회복을 위한 결심을 할 때입니다. 말씀을 연구하는 목적이 공동체의 비전을 향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연구는 자신의 준행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다른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임을 알고, 그 비전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공동체의 연약한 지체를 가르치고자 하는 성령의 감동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김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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