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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범사에 형통하는 삶을 살라 (창 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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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성서에는 인생의 여러 가지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 대립하거나 대적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의 대상으로 살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 가룟 사람 유다에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고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어진 그대로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뚜렷한 삶의 목적이나 특성 없이 주어진 일상성의 그대로의 삶을 산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거나 피해를 주지도 않고, 도움을 받거나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안에서 안주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는, 없어서는 아니 되는 필요한 자의 인생으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대상으로 산 사람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러한 삶의 선두 자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수님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 17:5)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400년 간 생활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애굽에 살게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주도하여 이끌어간 야곱의 아들 요셉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요셉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창 39:2)고 기록했습니다. 
  요셉은 형통한 사람임과 함께, 범사를 형통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형통이란 말을 ‘success’란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형통한 삶이란 하나님께 합당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꼭 귀중하고 필요하며 없어서는 안될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형통한 자의 삶은 아브라함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축복의 근원 자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범사를 형통케 하는 자는 그가 있는 곳에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 드러나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역사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형통은 어떤 투기나 우연한 사건으로 횡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형통은 고난이나 역경이 없는 쉽고 편한 환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의 사건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어렵고 힘든 고통의 과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귀하고 유익하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한 삶입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 39:5)
  그런데 성서본문은 요셉의 형통한 삶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2)
  요셉이 죄수가 된 후에도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 39:23)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에는 우리 모두 형통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참된 성공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케 하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진실한 믿음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믿음은 진실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매사에 진실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생활은 어떤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 진실함이 생활의 성실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행복했던 요셉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형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애굽의 미디안 상인에게 팔렸고,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에 노예로 팔려 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불행하고 억울한 환경 중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진실했습니다. 그의 진실함은 불행한 환경을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의 환경을 받아드리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성실함입니다. 이 성실함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보디발에게 신임을 받도록 했습니다. 보디발은 그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보디발의 가정은 요셉으로 인하여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에게 더 큰 시련의 고난이 찾아 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반하여 요셉을 성적으로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요셉을 모함했습니다. 결국 요셉은 옥에 갇혔습니다. 노예에서 죄수로 전락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곳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변함 없는 믿음의 진실함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진실함은 형통케 하는 자의 삶을 이룬 것입니다.
  금발 미녀 제인이 왼쪽 젖가슴을 내 놓은 채 급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경찰관이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왔습니다. “아가씨, 당신의 왼 쪽 젖가슴이 노출됐다는 것을 아십니까? 노출 죄로 당신을 체포할 수도 있습니다. ”오 마이 갓! 너무 서두르다가 아기를 버스에 내려놓았어요“
  현대인들은 세속의 바쁜 삶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삶에 성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세속의 차안에 내려놓고 부끄러움을 드러내면 살고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진실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실함에서 나오는 성실함으로 주어진 자기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도박이 아닙니다. 믿음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얻어지는 횡재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최선의 모습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축복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노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으로 한해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진실함이, 생활의 성실함으로 드러나게 하십시오. 그곳에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는 삶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죄악에 대하여 단호함과 분명함입니다.

  죄악은 하나님과 멀어짐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등을 진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는 더욱 큰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따라가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요셉의 용모의 준수함과 성실함에 반한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동침하기를 요구하는 여인에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치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8-9)
  요셉은 죄악에 대해 분명하고 단호한 태도를 가졌습니다. 죄악의 유혹에 대하여 주저하거나, 망설이거나, 기웃거림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계속되는 죄악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옷을 잡아당기며 동침하기를 강요하는 주인의 여인에게서 겉옷을 벗어버리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죄악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죄악의 즐거움 보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분명한 태도입니다.
  죄악의 유혹을 물리친 것은 패배를 안겨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요셉은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옥으로 향하는 길을, 애굽을 지배하는 총리가 되는 길이 되게 하셨습니다. 죄악에 대한 단호한 뿌리침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더 큰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범사를 형통케 하는 역사입니다. 인생의 위대한 성공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죄의 능력에 패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의 길로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죄악에 대하여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새해를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악에 대한 분명하고 단호함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형통한 삶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삶의 전문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애를 다루십니다. 모든 사람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치 있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뜻에 따라 우리들을 섭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그 섭리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분명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알아보고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5-8)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이 혹시 자신들을 미워하여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같은 표현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19-20)
  요셉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야곱의 자손들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자손인 언약의 백성과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요셉이 7년 흉년에 앞서 노예로 팔리는 과정과 죄수가 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후손가운데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태어나시게 하기 위해 약속의 백성들을 7년 흉년의 어려움 속에서 보호하셔야 했고, 그 일에 요셉을 필요로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불행한 환경 중에도 원망하지 않고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내가 내 인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노예와 죄수로의 삶일지라도 하나님이 이끄는 삶이 될 때에 그것이 오히려 축복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살아가는 인생이 될 때에 노예로 팔리는 것과 노예의 삶이 불행이 아니라 축복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죄수로 전락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살아갈 때는 그것이 바로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광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살아가지 못했다면 그것은 불행과 비극 자체로 남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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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 중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소중한 인생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살아가는 사람이 범사를 형통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은 무엇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끝까지, 그 섭리 안에서 그 섭리와 조화된 삶을 사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인류구원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구세주로서의 형통함과 우리 인류구원의 형통함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사건들은 그 어느 하나라도 우연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역사에 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많은 사건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속에 내 인생의 의미와 함께 가치와 형통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각자의 생활의 정황은 어떻습니까? 어렵고 힘든 모든 과정을 감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삶의 과정을 어떻게 걸어가고 있습니까? 새해에는 이런 모든 것들을 감사의 사건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모두에게 유익함을 전해주는 삶의 역사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바로 형통케 하시는 역사로 살아가야 합니다.
  새해에는 주어진 조건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살아가는 지혜로움에서 형통하심으로 승리하십시오. 아멘.
(김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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