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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소망으로 인내하는 교회 (살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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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끝날 즈음 고드름은 무척 슬퍼졌습니다. 곧 따뜻한 봄이 되면 녹아 버릴 테니까요. 그런데 곁에 있는 눈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고만 있었습니다. 고드름은 이상하다는 듯이 "넌 녹아서 네 몸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지 않니?" 눈사람은 빙그레 웃으며 "난 녹아서 물이 되어 산과 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꽃들을 잠에서 깨울 테야. 그리고 계속 노력해서 바다로 가려고 해, 바다는 우리의 고향이거든, 그것이 뭐가 두렵겠니?" 그 이후로도 겨울만 되면 고드름은 걱정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지내서 몸이 야위었고, 눈사람은 희망으로 늘 웃고 지내는 덕택에 살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고드름과 눈사람은 똑 같은 상황인데도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해 기쁨과 슬픔이 갈렸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어려움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도록 소망이라는 걸 주셨습니다. 소망이 있는 삶은 늘 기쁘고 아름다울 수 있지만 소망이 없는 삶은 어두운 밤길을 등불도 없이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소망으로 인해 십자가의 고난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소망을 가집시다. 우리의 소망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 줄 수 있는 소망이어야 더욱 아름다울 것입니다.(눈사람의 희망)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의 왕 빌립2세의 양자인 카산더에 의해 B.C. 315년 건설되었습니다. 살로니가 만(gulf)의 위 부분에 있는 온천 지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일행이 2차 전도여행 기간 중 3주간 머물러 야손의 집을 회당으로 삼고 가르쳤는데,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말씀을 받았는데, 이곳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되었습니다. 전도자인 바울이 기뻐하며 칭찬하며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언제나 같이 붙어 다니는 세쌍둥이와 같습니다. 그 중에 제일 큰 형이 누군가 하면 바로 '소망'입니다. 흔히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훗날 천국에까지 지속된다는 의미에서 제일이라고 한 것이고... 이 땅에서는 바로 소망입니다. 소망이라는 큰 형님이 제일 앞에서 이끌어가니... 그 뒤로 믿음과 사랑이 뒤 따라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소망이 있으므로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으므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 믿음과 사랑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소망은 믿음을 지속하게 하고 믿음을 자라게 하며,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 신뢰하는 마음, 즉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들음의 대상은 다른 소리나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롬 10:17).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에 대한 신뢰심을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듣고 깨달아야 결실을 이룰 수 있습니다(참조, 막 4:20).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히 귀 기울임으로써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으로 역사 했다고 했으니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했음이 분명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 2:14-16)라고 믿음 있는 사람들의 행동화를 요청했습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 믿은 대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야 그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믿는다면 믿는 대로 열심히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것을 잘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을 볼 때 감사의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거짓이 없는 믿음'(딤전 1:4)을 가져야 합니다. 곧 행동하고 실천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야 하는, 본능에 가까운 감정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했는지 모릅니다. 나라를 사랑한다, 백성을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독재를 휘두르는 정치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오히려 상대방을 학대하는 오만 불손한 파렴치한 연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자식을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그 개성과 인격을 무시하여 자기 뜻대로 하려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사랑의 진실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적인 사랑만이 참된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수고할 때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수고 없는 사랑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수고 없는, 감정적이며 추상적인 사랑은 쉽게 무너지고 깨어집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희생하는 수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소망이란 단어의 그 원어적인 뜻을 보면... '간절한 기대감으로 고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 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은 "인간이란 소망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다!" 그랬습니다. 인간은 소망을 갖고, 소망 때문에 사는 '소망의 존재'인 것입니다. 소망이 없으면 살 수 없고, 소망이 없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소망이 없으면 짐승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속담에 소망이란 무엇이냐?.... "소망이란 살아있는 자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문명과 기술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꿈이었습니다. 소망을 갖고 노력했던 사람들의 열매요, 소망의 실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누구나.... 사람이라면 제각기의 가슴속 깊은 곳에 소망을 간직하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내일 역시 한결같은 소망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다소곳이 바라는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이 없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은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바라는... 스스로의 마음의 작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은 소망으로 공부하고, 농부는 소망으로 농사를 지으며, 또 상인은 소망으로 상업을 경영합니다. 또 사업가는 소망으로 사업을 경영하고... 부모는 소망으로 자녀를 기릅니다. 사실... 모든 활동과 모든 노력의 배후에는 이 '소망' 이 잠재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각기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소망은 헛된 것입니다.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전 1: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이 참된 소망입니다.

시146:5절에"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고 하였습니다.

마야족 사람들은 소망이란 말을 "무엇에 걸려 있는 것이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걸려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걸려 있고, 연결되어 있는 한 소망이 있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바로 절망이요, 죽음입니다.

소망은 역경을 이기는 힘입니다. 2차대전시에 나치 수용소에서 기록한 프랭클린 박사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이라는 보고서에 의하면 『소망을 포기한자는 몸도 마음도 곧 쇠약해졌다. 그러나 끝까지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자는 자신도 건강했고 남까지 도와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망명살이에도 절망하지 않고 인내로 열심히 일하고 7년을 수일같이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하다가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을 때, 꾼 꿈이 사다리 꿈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꿈, 이것이 하나님과 자기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곳에서 말씀하기를 "너와 함께 하겠다.", "네 후손이 땅의 티끌같이 많아지겠다." "너 누운 땅을 네게 주리라.", "모든 족속이 너와 네 후손으로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는 평생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인내하고 기도하고 노력하며 결국 그 소망의 말씀을 현실로 경험하는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감옥 속에서도 소망의 줄을 끊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의 줄을 끊지 않았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 가운데서도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광풍 가운데서도 소망의 닻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소망이 있기에 이 세상의 시련과 슬픔을 능히 참아내게 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반드시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런던 외환은행 건물에 큰 메뚜기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 유래가 있습니다. 런던 교외에 살고 있던 한 소년이 메뚜기를 발견하고 그 메뚜기를 잡으려고 집 뒤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한 어린 아기가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년의 어머니가 그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아기를 구출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부모를 찾을 수 없이 이 가정에서 양자로 키웠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은행가로 성공하였습니다. 그가 행장으로 있을 때, 은행 건물을 신축하여 생명의 은인 메뚜기를 조각하여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메뚜기를 통해서도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역경 중에도 밝은 미래가 기약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고난의 보따리가 결국 은혜의 보따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6절)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을 굳게 믿는 믿음 위에서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근거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오시리라'고 고백합니다.

(살전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의 주제는 한마디로 재림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사가 '마라나타'였습니다. 주님이 곧 오십니다.

. "그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10)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다시 오심을 소망합니다.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우리가 소망의 찬송을 부릅니다.

믿음 생활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재림의식입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마라나타입니다. 지금 우리가 힘들더라도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산 것입니다. 인내를 하면서 소망을 두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주님 앞에 갈 것을 알고 소망을 가지고 사시길 바랍니다.

다시 오셔서 믿는 자를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상적인 교회는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입니다. 베드로는 말세가 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에 대해 비웃고 조롱하는 자가 있을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가슴에 간직하고 대망하며 사는 자를 주님이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은 장차 다가올 미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 소망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는 '휘포모네스'입니다. 이 말은 '용감한 군인이 극한 상황에서 꿋꿋이 버티어 가는 기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 소망을 둔 자는 환란이 극하고 사방에 우겨 쌈을 당했을 지라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할 때에 영육 간에 힘든 상황에서도 소망의 인내를 가졌습니다. 이 인내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인내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있는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절대 낙심하지 않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농부가 갖는 추수의 소망은 1년동안의 인내가 필요하며, 학생의 학업 대상의 소망은 10수년의 인내가 필요하고, 직업인내 영달의 소망은 평생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합니다.

소망이 인내 가운데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정치가요, 교육자였던 가다오까라는 분이 정치에 관한 일로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변소 청소를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을 발견하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면 나와 같은 죄인이 변소 청소하는 정도야 문제가 아니라고 깨닫고 그때부터 자진해서 결심하고 말하기를 "이제부터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의 발을 씻는데 헌신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출감할 때부터 자기가 출석하는 코오치교회에 가서 신발을 정리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장로님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더 나가서는 국회의장이 되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결코 교만하지 않고 교회 현관에서 교인들을 안내하고 신발을 정리하는 일을 계속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러 옴으로 전도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 인내도 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는 성도의 소망이야말로 최대의 소망이므로 최대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끝까지 인내하지 않으면 주님 재림에 대한 소망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존 엘리엇은 80살 죽는 날까지 인디언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습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그 일만은 계속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좀 쉬라고 해도 여전히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언제나 이웃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내가 더 이상 말씀을 증거할 힘은 없지만 이 불쌍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줄 능력은 남겨 주셨습니다." 그는 죽도록 충성하였습니다.

계3:10절에“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 할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바라며 소망으로 인내하는 모두가 됩시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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