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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사랑하기 때문에...(요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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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악성췌장암에 걸려 6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선고를 받고, 면회도 금지된 병원 독방에서 응급조치를 받으며 하루하루 죽음과 싸우는 아버지 한분이 계셨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의사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고지식하고, 완고하고, 감정이 메말라 있어서 자식들에게 애정 표현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습니다. 또 자식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고, 항상 자기주장대로 해버리니, 그 아들이 나중에는 아버지만 보면 가슴에서 분이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둘 사이가 멀어져서 수십 년 동안 겉으로만 아버지 아들 사이지 내적으로 사랑이 오가는 일이 없는 삭막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돌아가실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아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서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기 위해서는 안아 주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병문안을 와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어요.”

그리고는 아버지를 꽉 껴안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느닷없는 행동에 오히려 잔뜩 긴장하고는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굳어져서 안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그렇게 했지만 아버지의 굳어진 팔은 여전히 펴질 줄을 몰랐습니다. 아들은 이에 아랑곳 않고, 병문안 올 때마다 계속 아버지를 안아 드렸습니다. 어떤 때는 “아버지 팔을 저에게 둘러보세요. 절 좀 꼭 껴안아 주세요. 그래요. 됐어요. 좀 더 힘 있게 껴안아 보세요.”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계속 유도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아버지의 긴장된 자세가 점점 풀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껴안을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점점 깊은 애정과 염려를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2백 번째의 포옹이 있던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야. 널 사랑한단다.”
평생 아버지로부터 들어 보지 못한 사랑의 표현, 애정의 표현을 처음으로 들은 것입니다.  그 아들, 헤럴드 블롤필드가 쓴 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수도 없이 안아 주셨습니다. 2백 번? 아니, 2천 번, 2만 번, 수도 없이 우리를 안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사코 안기려 하지 않았던 것 아닌가요? 냉철하지 않았나요? 오히려 뻣뻣하게 버팅기지 않았던가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아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라고요? 차라리 울어 버리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랑을 체험할 수는 있고, 그 사랑을 체험하고 보면 그저 감격과 기쁨 밖에 없는 겁니다. 그저 감사할 뿐인 겁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산다는 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으니 천국에야 들어갈지 모르지만, 그 인생은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주고받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완전한 사랑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받는 사랑도, 주는 사랑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산다는 게, 심지어 사랑하는 것조차도 불안하고, 두렵고, 불평과 원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어느 누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잠도 안자고, 심지어 졸지도 않고 밤이나 낮이나 여러분을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시겠습니까? 그것도 지금부터 영원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심을 믿습니다.

요한일서 4:8,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9-10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된 것이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아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영원히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그 아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죄로 망가진 세상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제 마음대로 사는 세상입니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요한복음 9:39,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려 세상에 왔으니”
요한복음 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뭐가 기적인 줄 아세요? 바로 제가 지금 여기 서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지 않으셨다면, 만약 하나님께서 저의 죄에 대해 물으셨다면, 저는 벌써 지옥에 떨어 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누가 여러분 대신 죽으려 하겠습니까? 누가 여러분 대신 십자가 지려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지요. 말로 그렇게 하고, 다 그렇게 살려고 애도 쓰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죽기까지?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사람이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짜증냅니까? 화를 냅니까?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 아닙니까? 내 기분에 따라 변하는 것 아닙니까? 죽고 못 살 것 같이 사랑하다가도 어느 순간 원수가 됩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언제나 끝이 따라 다닙니다. 그래서 사랑하면서도 늘 조마조마합니다.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언제나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서약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사랑은 따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향유 부은 여인. 이 여인의 행위가 특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값비싼 향유 때문에? 물론 결코 적은 돈 아닙니다.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기 때문에? 그것도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을 향한 거룩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따집니다. “저게 얼마짜리인데.” “내가 어떻게 해서 번 건데.”

남편이 들고 온 꽃다발. 그런데 그것을 받는 아내, “이거 얼마 들었어요? 며칠이 지나면 다 시들어 버릴 거 뭣 하러 샀어요?” 그런다면? 그게 쓸데없는 일인가요? 그게 낭비인가요? 그 꽃다발에는 돈으로 계산한 수 없는 남편의 사랑이 담겨 있는 겁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과 어른의 차이. 어린아이는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어른은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이 없으면 어린아이 같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사랑이 있으면 어른입니다.
신앙생활 두 그룹.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을 더욱 경험합니다. 불행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따집니다. “그거 꼭 해야 합니까?” “저거 날 사랑한다는데 다른 꿍꿍이 있는 거 아닐까?”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행동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물어 봅시다.
임원 중 자기가 직분에 합당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자격 없는 사람이 직분을 맡으면 그건 문제입니다. 그러나 교회 임원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좀 배워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고, 사회적으로 이름도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요? 그럼, 베드로는? 그럼, 바울은?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받을 때 자격 있어 받았어요? 예수님의 사랑 받을 때 자격 있어 받았어요?
세상의 눈으로 따지지 마십시오.
그렇게 따지니까 “난 못 합니다.” 그러거나, “저게 무슨 집사라고, 권사라고, 장로라고, 목사라고” 그러는 겁니다.

교회 일꾼, 곧 주님의 일군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베드로 찾은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물으셨어요.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고 일감 주셨어요.
그런데 왜 우리가 하나님께 인색 합니까? 왜 예배시간 빼 먹어요? 먹 살기 위해서? 왜 물질 드리는 것, 헌금하는 것 인색 하세요? 왜 봉사하는 것에 불평하세요?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런 겁니다.
그리고 일꾼 교회 일군에게 필요한 것은 열정입니다.
“시켜주면 하겠습니다.” “시켜주셨으니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게 열정입니다.
찬양대, 전공한 사람 있어요? 자격이 없는데 어떻게 찬양해요?
교회 학교 교사들 자격증 들고 하나요?
교회 봉사는 열정으로 합니다.
이 열정은 어디서 생기는가? 이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고 믿는 것, 곧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일을 주셨다” 고 믿는 은혜에서 생기는 겁니다. 일을 맡기실 때 능력도 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따지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주심을 경험하는 겁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 예수님과 제자들 식사자리. 그런데 아무도 마땅히 해야 할 일 안하고 있습니다. 서로 발을 씻기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다 씻기시고 이제 남은 사람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구하나 나와서 예수님의 발을 씻기려는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속으로 “누가 높으냐?”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예수님의 발을 씻으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생각할까? “저 놈 점수 따려고? 그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아무 것도 못 하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니까 못 하는 겁니다.
그냥 하세요. 왜 하느냐?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따지셨어요? 예수님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따지지 않고 거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일서 4:7-8,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 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 하나니 이는 하나님을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이미 사랑이십니다. 이제 그 사랑의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린 겁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길가다가 지쳤습니다. 목은 마르고……. 마침 그 곳에 샘물이 있었습니다. 이 샘물이 시원한지 아니 한지는 그 여행하는 사람이 그 물을 마셔봐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의 맛을 경험하는 것이고, 이 사랑의 맛을 경험하지 못하면 원수커녕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닌 지 10년, 20년, 100년, 천년을 된다하더라도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천국에는 갈 수 있겠지만 그이 삶은 여전히 불행한 삶인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 위대한 성자로 추앙된 세상을 떠난 테레사 수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다 할 줄을 모릅니다.”
무슨 말?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던져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또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베드로. 3년 동안 예수 따라 다닌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셨다.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그것은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 하느냐?” 그런 물음입니다.
여러분이 병들었을 때, 찾아오신 주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여러분이 남 모를 아픔으로 혼자 슬픔을 삭이며 한숨지을 때, 주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떠나 혼자 있을 때, 주님은 여러분 곁에 오셔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나는 끝까지 너를 사랑한다.”는 주님의 음성 들으십시오.
“그렇게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 했는데 하나님 이게 뭡니까?” 그럴 때도 주님 찾아오셔서 “그래도 난 끝까지 너를 사랑한다.” 여러분 그 음성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39절, “내가 확신 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우리 한 번 외쳐 봅시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래도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신다.”
(정연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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