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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은혜안에서 강하게 하소서 (딤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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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안에서 강하게 하소서

새 해가 밝아 왔습니다.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렸던 새해가 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희망의 새해가 밝아 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한 해동안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이 시간 어떤 분이 여러분에게 새해도 되었으니 덕담 한마디 해보라 하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건강하게 하세요”. “마음의 뜻을 이루세요”. “기쁜 한 해가 되세요”. “성공하세요”. 또 어떤 분은 말할 것입니다. “부자 되세요”. “행복하세요”. “하나님 축복 받으세요”. 여러분은 이 시간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옆에 있는 분에게 축복의 말 한 마디씩 하겠습니다. 

저도 새 해를 앞두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교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한 해동안 우리 교인들이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축복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했더니 제게 감동된 말씀이 있었습니다. “강하라”. 그래서 제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도 이상하다. 왜 하필 강하라인가? 그 좋은 말씀 다 제쳐 놓고 왜 하필 전투적인 냄새가 나는 강하라 인가?”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다른 것 없습니까? 강한 것 말고 조금 부드러운 것으로 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습니다. “강하라”. 그러다가 오늘 말씀 딤후2:1-4절 말씀을 읽었습니다.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고“.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쓴 마지막 성경입니다. 바울은 주후 64년경, 로마의 썰렁한 지하 감옥에서 순교의 날을 기다리며 이 편지를 썻습니다. 그가 편지를 보낸 사람은 디모데였습니다. 디모데는 말하자면 바울이 복음안에서 낳은 영적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부를 때마다 “내 아들아”하고 불렀습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말입니까? 모든 교육중 최고의 교육은 선생은 부모가 되고 제자는 자녀가 되는 교육입니다. 선생은 아비가 되고 제자가 아들이 되면 그 교육은 끝납니다. 아버지와 아들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바울이 편지하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고”. “강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목회자였습니다. 바울이 개척한 에배소 교회를 목회하던 목회자였습니다. 목회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켜라. 부지런해라. 성실해라. 전도해라. 기도해라. 설교 잘해라”. 그러나 바울은 그 많은 말중에서 “강하라”고 말합니다. 다같이 “강하라”. 왜 강하라고 말했을까요? 강하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됩니다.

과연 우리는 강해야 할 상황에 있습니다. 2006년도를 시작하면서 올 한 해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한 해가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경제 성장은 둔화되고 침체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직자는 많아지고 직장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10대 청소년들도 아르바이트로 나서고 가정을 지키던 40-50대 주부들도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작년 말 현재 280만명의 4-50대 주부들이 밖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온 가족이 생존경쟁의 가파른 대열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간신히 직장을 얻은 사람도 직장을 지키기 위해 목숨걸고 일해야 합니다. 어떤 통계를 보니까 우리 나라 모든 직장인의 35%가 야근을 한답니다. 채용전문업체인 잡코리아의 조사에 의하면 직장인의 34.9%가 1주일에 6일 야근합니다. 야근 시간도 하루 평균 2-3시간이 28.5%로 가장 많고 3-4시간이 27.4%, 심지어 4-5시간도 13.7%나 됩니다. 왜 야근하냐고 묻는다면 답은 뻔합니다. 사람은 적게 뽑고 일은 많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2006년은 국민 모두가 거대한 경제전쟁에 돌입할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우면 범죄가 더 기승을 부릴 것이고 마음이 편치 않으니 질병도 더 생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 암환자는 1995년 이래 4배나 증가했습니다. 씀씀이는 많고 경제는 어렵고 거기다가 자연재해까지 우려됩니다. 이런 때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강해야 합니다. 경제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정치가 금방 안정되지 않는다면, 자연재해가 그치지 않는다면, 남북관계가 꼬이고 분쟁과 테러의 위협이 계속된다면,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대안밖에 없습니다. “강하라”. 강해지는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28년의 자랑스러운 역사는 승계받았으나 여러 가지 땀과 눈물이 요구됩니다. 안으로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 과감하게 시스템을 정비해야 하고 밖으로는 내년부터 시작될 판교개발의 먼지 구덩이와 싸워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재산과 소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켜야 하고 3년후 개발이 끝난 후 우리에게 다가올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큰 비전의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강해야 합니다. 약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중요합니다. 올 한 해 강한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첫째. 은혜안에서 강해야 합니다.
바울이 “강하라”고 말할 때 그냥 강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은혜안에서 강하라”고 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왜 바울은 그냥 “강하라”고 하지 않고 “은혜안에서 강하라”고 했을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은혜안에 강하라”고 말하면서 모델로 군인을 제시합니다.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여러분, 군인이 누구입니까? 많은 특징이 있지만 무엇보다 군인은 명령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군인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조직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위에는 상관이 있고 밑에는 부하가 있습니다. 상명하복의 질서체계가 생명입니다. 위로부터는 끊임없이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군인에게는 “아니요”가 없고 “예”만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끔 오해하는 것중의 하나는 복종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자존심상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차가 레일에게 구속되는 것이 싫어 벗어나면 그때부터 기차는 자유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 것이 재미없다고 물을 떠나면 그때부터 물고기는 자유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방종이 자유와 다르듯이 굴종은 복종과 다릅니다. 굴종은 마지 못해 무릎꿇는 것이고 복종은 동의해서 무릎꿇는 것입니다. 굴종은 힘이 없어 포기하는 것이고 복종은 힘이 있으나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의 총칼앞에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한 것은 굴종이고 주기철 목사님이 3번 감옥에 갇혔다 순교한 것은 복종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 죽는 것은 굴종이고 스스로 죽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은 복종입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의 군세에 야합하여 무릎을 꿇는 것은 굴종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앞에 무릎꿇는 것은 복종입니다. 굴종이냐 복종이냐의 차이는 내가 내 의지로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 내가 내 자유로 스스로 결정하느냐 억지로 결정하느냐 입니다. 복종의 최고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고 자유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자유를 버렸습니다. 이것이 복종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복종합니까? 딤후2:3을 다시 보십시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뜻에 기쁘게 동의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무릎꿇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좋은 군사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부대에 속한 십자가 군병입니까? 군인이 상관에게 복종하면 그때부터 상관의 보호를 받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약하지만 여러분이 속한 하늘의 군대는 강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약하지만 사령관이신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그렇게 믿습니까?

오래전에 강동만이란 장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사냥을 좋아해서 시간만 나면 사냥하는 데 한번은 눈에 펑펑 쏟아지는 날, 사냥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한참 가다보니 하얀 눈길에 동물 자국이 보이는 데 오랜 사냥 경험으로 그것은 호랑이 발자국임을 직감했습니다. 그 순간 같이 가던 두 마리 사냥개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앞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호랑이가 앞에 있는 데 사냥개가 달려갔으니 사냥개들은 호랑이에게 큰 일을 당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정신을 집중시킨 강동만씨는 총을 장진하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고개를 넘어 보니까 언덕위에 나무 한 그루가 있는 데 밑에서는 사냥개가 열심히 짖고 호랑이는 무서워서 나무위에 올라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호랑이가 으르렁거리고 사냥개가 무서워해야 하는 데 거꾸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냥개가 호랑이를 밀어 붙일 수 있습니까? 심리학을 전공한 한 학자가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사냥개 뒤에는 주인이 있었다. 주인은 총을 가졌다. 세상에 어떤 짐승도 주인이 쏘는 총앞에는 힘없이 쓰러진다. 내 뒤에 주인이 있으니 나는 염려가 없다. 그러니 할테면 해보자“.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이 뒤에 있습니까? ”내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졌다. 세상의 어떤 마귀도 사람도 권세도 그가 가진 권세앞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 뒤에는 최고의 super power 예수님이 계시니 나는 염려가 없다. 그러니 할테면 해보자. 붙을테면 붙어보자“. 그 힘이 바로 이 세상에서 여러분을 강하게 할 힘의 비밀입니다. 그 힘이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았으니 은혜의 힘입니다. 그 힘이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공짜로 주어졌으니 은혜의 힘입니다. 그 힘이 우리의 착한 행실과는 상관없이 주어지니 은혜의 힘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달라고만 하면 주시니 은혜의 힘입니다. 우리가 더 간구하고 갈망할수록 더 많이 주어지니 은혜의 힘입니다. 결국 은혜에서 강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의 삼손을 아십니까? 삼손은 힘이 센 용사였습니다. 그의 힘의 비밀은 그의 머리카락에 있었습니다. 머리가 자라면 힘이 생기고 머리가 없으면 힘이 사라졌습니다. 그 힘의 비밀을 어느날  드릴라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결과는 엄청난 파멸이었습니다. 머리가 잘리자 삼손은 붙잡혀 눈이 뽑혔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삼손이 그때 알았어야 했던 것은 진정한 힘은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의지했던 것은 머리카락이었지만 머리카락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는 머리카락을 의지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했어야 했습니다. 그는 머리카락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 망했습니다.

다윗은 물매돌 다섯 개로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물매돌이 골리앗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이 골리앗을 죽인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엘라 골짜기에 가면 다윗이 들었던 반질반질한 물매돌이 지천으로 깔렸습니다. 그러나 그 물매돌은 다윗이 들었던 것과는 다릅니다. 다윗이 들었던 것은 돌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삼상17:45,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가노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나니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속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모든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요 하나님이 주셔서 받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안에서 강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강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은혜안에서 강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훈련이 은혜를 강하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또 하나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는 훈련을 강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훈련을 낳고 훈련을 은혜를 강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모두 은혜입니다. 물, 공기, 자연, 부모, 우리 몸, 조국, 학업, 친구,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고 공짜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작은 것은 노력해서 받고 큰 것은 은혜로 받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구원해주신 은혜만큼 큰 은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은혜되기 위해서 우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은혜는 훈련을 통해 강해지고 훈련은 은혜안에 있는 그 가능성을 풀어냅니다. 

보십시오. 성경의 인물중에 누가 훈련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는지. 아브라함은 75세에 은혜로 아들 주겠다고 약속을 받았지만 그 은혜의 약속은 25년의 긴 기다림과 훈련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이삭은 40에 결혼해서 20년만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야곱도 하란에서 20년동안 수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은혜로 약속했지만 그 은혜의 약속은 광야생활 40년의 길고도 긴 기다림과 고통스러운 훈련 끝에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스라엘 왕국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40년간의 사울 통치와 2O년간의 긴 광야 유랑 생활을 통해 드디어 60년만에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3일동안 십자가지기 위해 33년을 훈련하셨고,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고도  아라비아 사막 3년, 다소 은둔생활 11년, 도합 14년이 지난 후에 드디어 사도로 활동하여 주후 64년, 순교할 때까지 무려 21년간이나 유럽 전역을 누비면서 피나는 노력과 자기 훈련의 선교를 계속했습니다. 누가 훈련없는 은혜를 말합니까? 누가 은혜는 공짜라고 말합니까? 은혜가 정말 값비싼 은혜가 되려면 훈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훈련없는 은혜는 종이조각 은혜, 값싼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분야에서 영감의 땅입니다. 제가 한번 유다 광야를 여행하는 데 유난히도 눈에 띄는 식물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가시나무였습니다. 왜 그렇게 가시나무가 많은지 종류도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형형색색의 이름 없는 가시나무가 유다 광야에 수도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엉겅퀴가 가시나무입니다. 여름에 말라 비틀어진 채 삐쭉 솟은 가시만 남은 엉컹퀴는 보기만 해도 무섭습니다. 출애굽시대에 법궤를 만들었던 조각목도 가시나무요 요담의 비유에 나오는 나무도 가시나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불을 보았던 떨기나무도 가시나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썻던 가시관도 사실은 “크라이스트 쏜”, 가시나무입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 주변에 많습니다. 그 중에서 “케이퍼”라는 가시나무가 있는 데 이 나무는 땅에 바짝 엎드려 키를 낮추고 삽니다. 그 많은 가시나무들을 보면서 물었습니다. “왜 광야에는 가시나무가 많은가? 왜 광야에는 가시나무가 잘 자라는가?”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아하, 척박한 땅이니까 가시나무가 많구나”. 그리고 한 가지를 더 깨달았습니다. “아, 광야같은 세상에서 살려면 가시나무같이 훈련받으며 살아야 한다”. 옥토에 있는 나무는 물마시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광야의 가시나무는 물도 없이 살아갑니다. 정원에 있는 꽃나무는 누군가 돌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아무도 돌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강해져야 합니다. 강해지려면 광야의 무더위를 견뎌내야 합니다. 물 한 방울 없는 광야의 고통을 이겨내야 합니다. 광야에 살아 남으려면 광야ㅔ 맞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가시나무 근성과 가시나무 훈련을 받은 을 나무만 광야에서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누가 이 영적 광야에서 살아 남습니까? 광야의 모진 훈련을 잘 견뎌내야 합니다. 광야의 근성과 광야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훈련해야 합니까? 

셋째. 충성된 사람이 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은혜안에서 강해야 할 이유를 말했습니다. 2절입니다. 딤후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여기 “충성된 사람”이 나옵니다. 이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은 능력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충성된 사람을 좋아합니다. 능력있는 사람은 자기 능력을 믿습니다. 그러나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안에서나 밖에서 충성된 사람으로 훈련시키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강하고 충성된 사람으로 훈련시키실 때 세 가지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높은 표준입니다.
강한 사람은, 그리고 충성된 사람은 그 표준이 높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은 표준의 꿈이 있고 그 꿈을 위해 과감한 훈련의 대가를 지불합니다. 가령 어느 고등학교에 유도선수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만일 이 학생이 반에서 가장 유도잘하는 학생이 되기로 목표를 세웠다면 그는 그렇게 힘들게 연습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누구도 반에서 자기만큼 유도하는 학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학생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표하고 유도했다면 그는 슬슬 놀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표가 높고 큰 만큼 많은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주일날 겨우 교회 나오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목표한다면 그는 별로 교회안에서 할 일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토요일 늦게 까지 T,V 보고, 늦게 까지 인터넷하고 새벽녘에 한 숨  자도 오전 11시 이전에 일어나 교회만 오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닮은 철저한 제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는 적당히 교회 나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성경 66권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할 것이고 성경암송카드를 들고 다니며 주야로 성경을 외울 것이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각종 성경공부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자신과 싸워 새벽에도 일어날 것입니다. 목표가 크고 표준이 높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인중에 명성교회 교인이 하는 것을 보고 잘하기로 마음 먹은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평소에는 적당히 예수믿는 분이었는 데 옆집에 명성교회 나가는 신자를 보고 너무 도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회사 중역으로 그렇게 바쁜 분이 새벽마다 일어나 교회가고 어려운 중에도 그렇게 많이 헌금한 것을 보면서 “아, 나는 무엇인가? 똑같이 집사인데 명성교회 집사는 저렇게 하는 데 나는 무엇인가?” 생각했답니다. 신앙의 표준을 높이 세워야 합니다. 이루려는 훈련의 목표를 크게 잡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믿어온 신앙을 표준삼지 마십시오. 수준과 표준은 다릅니다. 자기 수준을 표준삼지 마십시오. 자기 수준에 거룩한 불만을 느끼십시오. 최고로 잘하는 사람을 표준삼으십시오. 표준을 크게 세워야 강한 자가 됩니다.

우리가 표준을 높이 세워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2절 후반절입니다. 딤후2:2,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여기에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강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안에서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는 나 자신의 성취나 성숙이 목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 혼자 잘되기 위해 강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강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 강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 말고 또 다른 사람을 충성된 자로 만들고 그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목표가 다르고 생각이 다릅니다. 불교처럼 부처가 되고 해탈하기 위해 강한 사람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찌나 빈라덴처럼 남을 죽이고 정복하기 위해 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주님의 제자로 삼기 위해 강해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훈련받아야 하겠습니까? 얼마나 강해져야 하겠습니까? 

엘리야는 엘리사를 키웠더니 엘리사가 수많은 선지생도들을 키웠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가르쳤더니 12제자가 120문도, 120문도가 3000명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가르쳤더니 디모데가 수많은 에배소교인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 강해져야 하고 다른 사람을 제자로 만들기 위해 강해져야 합니다. 잠언의 말씀대로 잠27: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다른 사람을 철로 만들기 위해 강해져야 합니다. 신앙의 목표를 높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목표대로 됩니다. 

다음은 내일을 위하여 오늘의 즐거움을 유보해야 합니다.
스코드 펙이란 사람이 그의 책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훈련”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훈련이란 고통을 먼저 선택하고 즐거움을 나중에 누리는 것이다. 내일의 더 큰 즐거움을 위하여 오늘의 작은 즐거움을 유보시키는 것이 영적 훈련이다”. 같은 내용을 미국의 맥스웰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놀면 내일 지불한다. 오늘 지불하면 내일 논다” "play today pay tomorrow, pay today play tomorrow". 성경 마13장에 보면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가 나옵니다.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남의 집에서 일하는 농부가 어느날 주인의 밭을 갈다가 우연히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무엇인가 달가닥 달가닥해서 보니까 금은보화를 가득 담은 항아리가 땅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아무도 몰래 훔쳐갈 수 있지만 그렇게 하다 발각되면 큰 일날 것 같고 그렇다고 그 엄청만 금은보화를 못본 체 하고 지나갈 수가 없어서 아내에게 와서 집을 팔자고 말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아내는 반대했지만 남편은 듣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빚까지 냅니다. 어머니도 목숨걸고 반대하고 집안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 데 농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팔아 밭을 삽니다. 두 말할 것 없이 농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자기 것을 팔지 않으면 그것을 살 수 없습니다. 며칠 헛간에서 잘지라도 금은보화가 있는 밭을 살 수만 있다만 헛간에서 자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인생의 최고 보화를 압니다. 그 보화가 예수님안에 있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보화를 얻기위해 우리는 투자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얻을 축복보다 오늘 당장 헛간에 살 걱정부터 합니다. 그래서 이대로가 좋다면서 하루 하루 삽니다. 그러나 영적인 법칙은 지금 고생하면 나중에 즐겁고 지금 즐거우면 나중에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play today pay tomorrow, pay today play tomorrow". 오늘 놀면 내일 지불하고 오늘 지불하면 내일 논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대로 롬8:18,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니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는 것입니다. 지금 즐거움을 유보해야 나중에 더 큰 즐거움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규적이고 지속적으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강하게 되기 위해 받아야 할 훈련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낙수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주도 용두암이나 거제 해금강, 부안의 채석강은 수많은 세월, 부드러운 파도가 바위를 때려 만들어진 절경입니다. 비록 연약한 물방울이지만 수천년, 수만년 바위를 치면 그 바위는 기암절벽이 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물론 계란이 깨집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백만번 치면 바위가 깨집니다. 이것이 반복의 능력입니다. 영적 훈련의 요체는 지속성과 반복입니다. 방향을 정하고 꾸준히 반복하면 반드시 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올 한 해 교회를 강하게 하기 위해, 교인을 강하게 하기 위해 많은 목회적 방법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 중심은 한신제자훈련원에서 실시하는 훈련 프로그램입니다. 주일날 교회 오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훈련원에 와서 훈련받으십시오. 성경을 배워 진리를 깨닫고 영적 훈련을 통해 예수님 닮은 인성과 품성이 개발되고 진리를 연구함으로 신앙의 깊이에 이르십시오. 조금 하다 중단하지 말고 지속하십시오. 세계적인 명품 바이올린도 로키산맥 해발 3,000미터 위에서 비바람을 맞고 자란 나무로 만듭니다. 광야의 연단을 이겨낸 가시나무만이 법궤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지만 약한 자를 통해 일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지만 상한 갈대로 집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지만 꺼져가는 심지로 세상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도 사랑하지만 강한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약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받든지 강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쓰임을 받든지. 실패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동정을 받든지 승리한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든지. 매일 죽는 소리만 해서 하나님의 근심을 끼치든지 믿음으로 강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 되든지.

한 해동안 강한 자가 되십시오. 은혜안에서 강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강한 군사가 되십시오. 훈련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강한 용사, 믿음으로 승리하는 한신의 십자가 군병, 그 능력으로 광야같은 한 해를 가시나무처럼 승리하고 명품 바이올린처럼 하나님께 쓰임받고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남도 강하게 하는 성공적인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신년주일(딤후2:1-4)                              2006.1.1(일)

      은혜안에서 강하게 하소서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고”.

첫째. 은혜안에서 강해야 합니다.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삼상17:45,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가노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나니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속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둘째. 훈련이 은혜를 강하게 합니다.

셋째. 충성된 사람이 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딤후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하나는 높은 표준입니다.
딤후2:2,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다음은 내일을 위하여 오늘의 즐거움을 유보해야 합니다.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지막으로 정규적이고 지속적으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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