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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왕으로 오신 예수님 (마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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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쁜 성탄절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에게 축복합시다. “오늘 예수님 오셨습니다. 성탄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성탄절이 올 때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한 사건이 기억납니다. 서울 방배동에 산 한 사람이 연말 송년회에 참석하여 너무 많이 술을 마셨습니다.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데 마침 방배중학교 근처에서 작업중인 맨홀을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가다가 맨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려 8일 동안이나 갇혀 있었습니다. 깜깜하고 칠흑같은 하수구에서 8일동안이나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결국 구출되었습니다만, 근처에 사는 한 아주머니가 물을 부으려고 아침 일찍 하수구로 갔더니 하수구쪽에서 사람 소리가 나더랍니다. 하루도 이틀도 아니고 계속 사람 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119에 신고하여 뚜껑을 열어보니 한 사람이 하수구에서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출한 뒤 왜 뚜껑을 열고 나오지 못했느냐했더니 그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말도 마세요. 통 어두워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있어야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8일동안 헤맸던 하수구는 불과 200미터 길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200미터 안에서 그는 8일간을 헤매면서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왜 그 사람은 하수구에서 나오지 못한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어두워서 그랬습니다. 칠흙같은 어두움, 그 어두움에 갇혀 그는 8일간이나 헤맨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사는 세상도 어둡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온통 방황하고 헤매고 있는 이유는 어둡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3절을 보십시오.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에 듣고 소동한지라”. 헤롯 시대의 이스라엘은 소동하고 있었습니다. 왜 소동했습니까? 로마가 군대를 주둔시켜 강권통치 했기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여기 저기서 로마에 대항하는 열심당들의 반란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헤롯이 무자비하게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헤롯 시대 과도한 세금, 강권통치, 무자비한 정적숙청, 계속되는 자연재해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여기 저기서 배고파 죽는 사람, 자살하는 사람, 이판사판으로 로마에 대항했다가 테러분자로 붙잡혀 죽는 사람, 나라가 온통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로마에 반대하는 사람, 로마에 협조하는 사람, 율법을 지지하는 사람, 율법에 반대하는 사람, 백성들은 여기 저기서 파당이 일어나 서로 물고 죽이는 대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무엇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습니까? 주인때문입니다. 누가 다스리냐가 문제였습니다. 만일 좋은 주인, 좋은 왕이 다스렸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소동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경제입니까? 경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세끼 밥은 다 먹고 삽니다. 오늘의 가장 큰 문제는 도덕적 타락과 가치관의 혼란입니다. 왜 도덕이 타락하고 가치관에 혼란에 빠진 것입니까?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다스리고 세상을 다스리는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전에 통계를 보니 전국에 윤락여성이 100만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것은 그중 많은 수가 주부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자녀들 몰래 부업으로 윤락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윤락하는 여대생들의 수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교도소마다 작고 큰 범죄로 인해 초만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워 범죄한다고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가 아니라 도덕입니다. 도덕의 상실은 그를 지배하는 가치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중의 최고의 상실은 주인을 잃어버린 상실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주인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목표와 의미를 주고 여러분의 생각과 영혼을 다스려 보다 높은 삶을 살게 하는 주인이 있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왕이 있습니까? 성탄절의 문제는 곧 왕의 문제입니다.   

첫째, 우리에게는 두 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던 당시 이스라엘에는 두 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헤롯왕이었습니다. 1절 보십시오. 마2: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헤롯은 주전 37년부터 주전 4년까지 33년간 왕으로 재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본래 왕이 될 사람도 아니었고 왕이 되어야 할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에서의 후손인 에돔족속이었습니다. 마땅히 유대인은 유대인이 다스려야 했지만 혼란의 시절, 미쳐 왕을 세울 경황이 안되었던 유대나라에 로마 황제에게 뇌물을 바쳐 낙하산을 타고 왕으로 부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헤롯이었습니다. 그는 돈많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로마를 몇 번 왕래하면서 로마 황실과 사귀다가 드디어 주전 37년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왕의 직분을 하사 받아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왕으로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칼로 나라를 다스렸는 데 왕위에 오르자 마자 무자비하게 정적을 숙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정권에 방해가 사람은 누가 되었든 숙청했습니다. 그 중에는 대제사장도 있고 자기 처남도 있고, 자기 아내의 할아버지, 심지어는 자기 두 아들도 자기가 직접 처형을 지시해 자기 보는 앞에서 처형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가이사랴 항구등 대형공사를 벌여 백성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했으나 자신은 여름에는 시원한 에루살렘궁에서, 겨울에는 따뜻한 여리고 궁전에서 수많은 노비를 부리며 목욕탕에 사우나 시설까지 하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헤롯 왕”입니다. 

이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두 살 미만의 어린이들을 집단으로 살해한 유대왕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그렇게 기세가 등등하더니 나이 70이 넘어 여리고에서 쓸쓸하게 죽었습니다. 옛날 왕들의 무덤은 크고도 화려합니다. 헤롯의 무덤도 경주의 고분 몇 배되는 커다란 성을 쌓고 그 안에 온갖 호화로운 금은보화와 함께 이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헤롯이 묻혔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지금 이 무덤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관광객 몇 사람만 버스타고 슬쩍 지나가다 볼 뿐입니다. 거기서 평소 헤롯의 높은 뜻을 기리고 위대한 덕을 찬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헤롯의 무덤에 가면 적막감과 함께 무서움마저 듭니다.

전승에 의하면 나이 많은 헤롯이 여리고에서 죽자 아무도 울지 않았다고 합니다. 헤롯은 악명 높던 그를 위하여 백성들이 울어주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당시 백성들에게 존경받던 대신 몇 사람을 죽이도록 그가 죽는 날 그의 심복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들이 죽어 백성들이 울면 같은 날 죽은 자기를 위해 사람들이 우는 줄 백성들이 알까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의 심복은 이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고 결국 헤롯은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채 초라하게 그가 만든 베들레헴 무덤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헤롯이 묻히자 열심당 유대인들은 그의 무덤에 들어가 그의 시신을 꺼내 갈기 갈기 찢었고 그리고 유대 광야에 던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무덤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헤롯 시대에 또 하나의 왕이 태어났습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마2:1-2,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시대에 태어난 또 하나의 왕은 예수님이었습니다. 헤롯과 예수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은 이상하게 여러 가지 점에서 인연이 있습니다. 둘은 우선 같은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헤롯이 약간 앞서 태어났지만 크게 보면 1세기 전후 비슷합니다. 둘은 똑같이 33년과 인연이 있습니다. 헤롯은 33년간 통치했고 예수님은 33년간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33년이 영적 통치라고 본다면 두 사람이 통치한 해가 같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베들레헴과 관련됩니다. 헤롯은 베들레헴에 묻혔고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무엇보다 둘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헤롯은 로마가 인정한 왕이었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인정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제외하고 예수님은 헤롯과 전혀 다른 왕이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에게는 헤롯처럼 거대한 왕궁이 없었습니다. 헤롯은 평소에는 예루살렘 왕궁에 살았고 겨울에는 예루살렘에 춥기 때문에 사시사철 따뜻한 여리고에 겨울궁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피신중에 지은 마사다 왕궁은 588미터 절벽 난간에 지은 거대한 3층 왕궁입니다. 지금도 마사다에 가면 당시 헤롯이 사용하던 냉탕, 온탕, 사우나탕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헤롯이 이렇게 호화스럽게 살았지만 예수님은 평생 머리 둘 곳도 없었던 외로운 왕이었습니다. 그는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자랄 때는 나사렛 지하 목수 집에서 살았으며 공생애 기간동안에는 가버나훔 작은 집에서 가난하게 살았고 죽은 후에는 에루살렘 성문밖 1평도 채 안되는 작은 돌 무덤에 묻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는 헤롯에게 있었던 수많은 노비와 신하들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헤롯이 가졌던 노련한 정치술과 카리스마도 없었으며 헤롯이 가졌던 10사람의 아내와 18명의 아들, 딸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왕다운 왕이었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누구를 왕으로 생각했겠습니까? 당연히 헤롯입니다. 헤롯에 비해 예수님은 너무 초라한 왕이었습니다. 그나마 죄수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헤롯을 예배합니까? 헤롯을 위해 죽은 사람이 있으며 헤롯을 전파하고자 땅끝까지 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헤롯은 갔고 예수님은 남았습니다. 헤롯은 잊혀졌고 예수님은 기억되고 있습니다. 헤롯은 저주의 상징이요 예수님은 축복의 상징입니다.

지금도 베들레헴에 가면 두 건물이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탄생교회와 헤롯이 묻힌 헤로디움 무덤입니다. 두 건물은 약 2킬로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보며 수많은 역사가운데 말없는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두 왕이 있습니다. 헤롯왕과 예수왕입니다. 우리는 세상은 역사는 결국 두 왕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헤롯왕 아니면 예수왕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왕을 왕으로 모셨습니까? 헤롯왕입니까? 예수왕입니까? 예수 안믿는 사람은 물론 헤롯을 왕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믿는다고 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는 않습니다. 가장 불행한 것은 교회는 나오면서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헤롯을 왕으로 모신 사람입니다. 예수믿는다는 것은 교회나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야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왕입니까?

둘째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왕입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면 어떤 왕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빌2:6-7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여기에 “본체”란 말과 “형상”이란 말이 나옵니다. “본체”란 말과 “형체”란 말은 본체는 몸이고 형체는 옷이라고 쉽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몸과 옷은 서로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고 또 그 신분을 가진 사람은그 옷을 입어야 합니다. 판사가 판사옷을 입고 죄수는 죄수복을 입습니다. 그러나 판사가 죄를 짓지 않는 한 죄수옷을 입었다고 죄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본체는 본질이고 형상은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본질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본질이 바뀐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사람의 옷을 입었을 뿐입니다. 

“형체”란 탈춤할 때 쓰는 “탈”이나 “마스크”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탈춤을 추면서 양반탈을 씁니다. 그러면 양반이 됩니다. 양반탈을 벗고 각시탈을 쓰면 각시가 됩니다. 한 사람이 양반이 되었다가 각시가 됩니다. 이것이 옷이요 탈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탈을 바꿔써도 사람 자체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의 옷을 입고 사람의 탈을 썻습니다. 사실 그러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그래서 빌2:7-8절이 나왔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에 “비웠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케노센”입니다. 이 말은 “포기했다”라는 말입니다. “버렸다”는 말입니다. 공동번역에는“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비워야 했습니까? 무엇을 내어 놓아야 했습니까?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내어 놓아야 땅에 오기 위해 하늘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왜 하나님이 굳이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까? 제가 약 10년전 서울에서 어린 아들을 잃어본 적이 있습니다. 마침 주일 아침이라 교회가기 위해 바쁘게 준비하고 있는데 아들이 없어졌습니다. 보통은 집 근처에서 놀고 있는데 그 날은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예배시간이 되어 할 수 없이 교회를 갔는 데 전혀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설마 어디를 갔겠는가? 어디 있겠지”하고 짐짓 의젓하게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불안했습니다. 설교하는 시간에도 설교가 안됩니다; 교회 뒷자리만 쳐다 봅니다. “하나님, 제 아들을 찾아 주십시오”. 속에서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점심을 먹는 둥 마는둥 하고 찾으려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데 누가 그럽니다. “전도사님, 애기가 1층에 놀고 있어요. 그 잘까부는 애기가 전도사님 애기가 아니예요?” 뒷말이 약간 걸리긴 했지만 뛰어가 보니 1층에서 다른 아이들하고 놀고 있습니다. 그때 제가 생각했습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 마음이구나”.

아들을 반갑게 껴안고 있을 때 옛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 시절은 저에게 방황의 시절이었습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저는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조숙하여 많은 방황을 했습니다. 지금도 신앙의 방황을 하는 사람들을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날도 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을 나갔습니다. 며칠동안 밖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시골이라 방에는 호롱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순간 밖에서 집으로 들어가야 할지 말지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돈도 없고 더 이상 밖에 돌아다니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헛기침소리를 하고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방문이 열리면서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윤재냐?” 어머니의 목소리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소리를 듣지도 않고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신발을 신지도 않고 마루를 건너 마당으로 뛰어 내려 오셨습니다. 고혈압에 심장병까지 있었던 어머니가 그렇게 용감하게 뛰어오는 모습을 저는 처음 보았습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기다리다 수척해진 어머니, 저는 그 분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비워 자식 하나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 마음, 그 마음이 하나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자주 속습니다. 우리에게 너무 자주 모멸을 당합니다. 너무 자주 우리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립니다. 버선발로 마당을 넘어 순식간에 다가옵니다. 그래서 유대인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바늘귀만한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하나님은 금마차를 타고 들어오신다”. 사랑은 언제나 먼저 찾아가게 만듭니다. 사랑하면 앉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먼저 가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려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는 하늘의 왕입니다. 그는 땅의 사람을 섬기려고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그는 종이면서 왕이고 왕이면서 종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세상을 통치하는 왕입니다.
그 예수님이 종으로서 이 땅에서 와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빌2:8절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것이 이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이 인간을 살리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고 합시다. 그것도 믿기 어려운데 그가 종이 되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는 것, 그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8절에 보면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를 자세히 번역한다면 “오히려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이 되었고”입니다. 강조점이 “스스로”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을 뿐 아니라 스르로 종이 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종이 됩니다. 전쟁때 포로로 잡히면 노예가 됩니다. 영화 벤허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로마에 가면 콜롯세움이라는 원형경기장이 있습니다. 일시에 5만명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후 70년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침략해서 이스라엘 노예들을 데리고 와서 지은 집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전쟁이 지면 무조건 노예가 됩니다. 또 하나 가난해서 빚을 지면 노예가 됩니다. 종이 되는 방법은 둘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노예가 되었습니까? 전쟁에 패하여 노예가 되었습니까? 가난 때문에 빚지고 종이 되었습니까?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십자가”까지 졌습니다. 이 세상 왕중에서 스스로 십자가 진왕이 있습니까? 후세인처럼 잘못해서 재판받은 대통령은 있습니다. 연산군처럼 폭군이 되어 폐위된 왕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잘못도 없는 데 거기다가 십자가까지 진 왕은 없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십자가진 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패로 끝났습니까? 죽었으니 끝났습니까? 성경이 말합니다. 빌2:9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끓게 하시고“. 여기서 중요한 말은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입니다. 십자가에 죽고 끝났다면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했고 승천했고 그리고 지금도 살아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사도 신경은 이것을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로 표현합니다. “앉아 계신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왜 누어 계시지 않고 서 계시지 않고 “앉아 계십니까?” “앉아 계신다”는 표현은 옛날 왕들이 보좌에 앉아 나라를 다스린다는 표현입니다. 쉬기 위해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화하기 위해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스리기 위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왕은 앉아 신하의 경배를 받습니다.

세상을 통치하는 분은 십자가에 달린 분입니다.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은 제가 이스라엘에 있었던 1994년, 성 금요일에 일어났습니다. 마침 예수님의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님이 돌아가신 “성묘교회”에 갔습니다. 그때 저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한번 공부하려고 바다를 건너 이스라엘에 왔는 데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은 안보이고 유대교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지만 어쩌면 가장 예수님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성탄절때 베들레헴에서 반짝하고 평소에는 유대교, 회당, 랍비, 율법만 보이는 곳이 이스라엘입니다. 모든 것이 유대교에 묻혀 기독교의 진수나 예수님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공부하는 것은 영광이면서도 또한 조심할 일도 많습니다. 그 무렵 저는 예수님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이 땅에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이 겨우 초대교회 유적 몇 개밖에 없다는 것에 실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과정에 따라 유대교, 유대문헌, 랍비문학등을 주로 공부하다 보니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약해지고 예수님에 대한 유대교적 이해에 점점 물들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떠나 유럽 기독교 국가에서 공부하기로 마음 먹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인사나 하려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성묘교회에 갔습니다.

고난주간 아주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아직 사람들이 별로 없는 시간에 성묘교회에 들어가 예수님 무덤에 마주 앉았습니다. 무덤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데 한참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 사람이 저에게 뚜벅 뚜벅 다가왔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를 따라갔는 데 그 집 한 가운데 계단이 있고 계단위에 의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가 계단에 올라 의자에 앉았는 데 놀랍게도 그를 보니 예수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는 데 그가 의자에 앉자 마자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그를 쪼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입은 옷은 헐벗은 옷이었습니다. 그리고 군데 군데 피도 묻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의자에 앉자 마자 하늘에서 찬란한 빛과 함께 왕관이 내려와 그 머리에 쓰여졌고 그가 왕관을 쓰자 그 얼굴은 큰 기쁨과 승리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환상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것이 환상인지도 몰랐습니다.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어서 환상인지 실제인지 몰랐는 데 정신을 차려 보니 제가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제가 “아, 이것은 환상이구나” 하는 순간 제 마음에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말씀이 있었습니다. 고전1:22-24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때 제 마음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깨달아진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십자가에 죽으린 그 분이 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고 예수님에 대한 회의가 생겨난 상황에서 예수님이 나타났으니, 저는 그 뒤로 한번도 예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눈으로 보기에 이스라엘에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환경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하늘의 왕관을 쓰고 통치하고 있다는 생각에 늘 전율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 뒤 한국에 돌아와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속에서 목회했으나 어떤 어려움도 참아 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하늘 우편에서 나와 역사를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뭐라고 해도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이 세상의 왕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살아서 하늘 보좌에서 승리자로 통치하고 있습니다. 지금 고난가운데 계십니까? 그 분이 아십니다. 지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 분이 의로 통치하시매 반드시 잘될 것입니다. 지금 안되는 일 때문에 속상해 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믿고 계신 그 분이 지금 당신을 돕고 있습니다.

그 분에게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시 성경으로 가 보십시오. 11절입니다. 마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다같이 “엎드려”. 그 분에게 우리가 할 일은 먼저 엎드리는 일입니다. 동방박사처럼 엎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계속 11절입니다. 마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려야 합니다. 황금은 “왕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유향은 성전에서 기도할 때 피운 향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몰약은 방부제로 사용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에 이 몰약을 바릅니다. 몰약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생명이신 그 분이 나를 죽음에서 건져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셨슴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합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찬양이요 경배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하늘의 보좌가 나옵니다. 4장에서 하늘 보좌가 열리면 수많은 천군 천사와 네 생물과 성도들이 찬양합니다. 계5:10절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하시옵니다”. 요한 계시록에 너무 자주 나오는 말이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예수”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 이 하늘 보좌입니다. 땅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힘들고 피곤합니다.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늘 보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지금도 살아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어린양 예수님이 보입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 그가 왕입니다. 그가 우리와 세상의 왕입니다. 그가 다스립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찬양이 “선포하라”. 저는 거룩한 성탄절 아침, 우리 마음과 정성을 다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먼저는 제가 먼저하고 다음은 영상을 보면 같이 하겠습니다(찬양-선포하라).

사랑하는 주님, 성탄절에 오신 하나님
사람들은 다 부와 명예와 쾌락을 가진 헤롯을 왕으로 섬깁니다. 우리도 가끔 헤롯을 부러워 하고 헤롯을 섬기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의 왕은 주님이십니다. 스스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 그 십자가는 죽음을 정복한 하늘의 보좌입니다. 십자가에 죽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지금도 나와 내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와 민족과 세계 열방을 통치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 하나님의 아들 어린 양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왕, 황금을 바칩니다. 당신은 우리 기도를 들으신 분, 유향을 바칩니다. 당신은 부활이요 생명, 몰약을 바칩니다. 거룩한 성탄절, 동방박사처럼 엎드려 당신을 경배하오니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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