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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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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크리스마스 특별 프로그램으로 크리스마스의 집없는 사람들이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이 TV 앞에서 93세 된 노인이 하나님께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빨리 데리고 가지 않습니까? 살만큼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하나님께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좋을 게 없는 사람입니다. 이젠 이 집도 더 이상 혼자 관리할 수 없습니다.”

이 노인은 TV에서 나오는 집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렇지만 내가 쓸 돈도 충분치 않은 처지에 그 사람들에게 기부금을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려고 자리에 눕습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자꾸만 아까 TV에서 본 집없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노인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와 살면서 대신 우리집을 관리해 주면 어떨까?’

그래서 다음 날 집없는 사람들이 임시로 모여 있는 구호소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 쪽에서 결혼한 부부 두 사람은 어떠냐고 묻습니다. 노인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부부가 노인의 집으로 들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했지만 나중에는 너무 좋았습니다. 집안일도 챙겨주고 식사도 챙겨주고 힘든 정원 일까지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석 달쯤 지난 어느 날 부인이 아주 미안한 듯이 너무 미안한 마음에 그동안 숨기고 있었지만 곧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말을 꺼냅니다. 노인은 한순간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일단은 부인을 안심시킵니다.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러나 어쩌나, 곧 아기를 낳을텐데. 다시 거리로 내 보낼 수는 없지.” 그래서 그냥 있기로 했습니다.

아기가 태어 낳습니다. 다시 크리스마스가 다 된 어느 날 노인은 성경의 한 구절을 읽게 됩니다. ‘첫 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노인은 옛날 그 옛날 아기 예수님이 머물 곳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지금 자기가 이 부부에게 방을 내어 주기로 한 것이 정말 잘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은 아기를 위해 난로에 불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위해 부부와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었습니다. 혼자 살다가 함께 트리를 만드니 너무 좋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노인은 처음으로 아기를 안아 봅니다. 아기가 방긋 웃습니다. 아기가 손을 들어 노인의 뺨을 만졌을 때 노인은 먼 옛날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아기 예수를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아기를 안은 채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다시 한 번 크리스마스를 맞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투정을 부리고 안달을 했는데도 저를 이 세상에 남아있게 해 준 것을 감사드립니다.’ 천국이 어떤 것인지 일깨워 주는 데는 가끔 아기가 필요합니다. 93세 노인에게 온 아기는 그 노인에게 천국이 어떤 곳인지 일깨워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아기 예수님이 오셨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 주실지 생각해 봅니다. 매년 맞는 크리스마스이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무엇을 일깨워 주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유대 남쪽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14년 마다 한번 씩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인구조사는 가문별로 이루어지므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부모는 그들이 사는 북쪽 갈릴리 나사렛에서 고향인 남쪽 유대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거리가 120 내지 150킬로 되므로 교통이 좋지 않은 당시로는 상당히 먼 거리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숙박시설은 아주 열악했습니다. 여관이란 곳이 헛간 같은 것을 몇 개 지어 놓은 것이었고 여행하는 사람들은 밥을 사먹을 곳이 없기 때문에 음식을 가지고 다녀야 했습니다. 여관주인은 손님들에게 다른 것은 전혀 제공하지 못하지만 동물 사료는 제공했고 또 여행객들이 가지고 다니는 음식을 조리할 수 있도록 불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여관까지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유에서 예수님께서 출생하게 됩니다. 구유라는 곳은 가축이 사는 곳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실 때에 얼마든지 좋은 데에 보낼 수 있는데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깊은 의미가 있는데 이것을 생각을 해 봅니다. 먼저는,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귀하고 아름다운 천국을 떠나서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즘 이 땅이 얼마나 혼란스럽습니까?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속상합니까? 추기경이 눈물 흘리는 것을 여기저기 일간지에서 큰 모습으로 낸 것을 봤습니다. 그것은 모든 국민이 이렇게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요란스러운 이 세상에 오셨는데 왜 이렇게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리던 천국, 평화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고 대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험하고 소란스러운 곳을 짊어지시기 위해서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힘있는 사람들이나 힘없는 사람들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과 같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그렇게 오셨습니다.

또 하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으로 오신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그것도 아기로 오셨습니다. 아기의 존재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아기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각할 때 제법 뭔가 좀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 인간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다 하나님께서 해주시는데 마치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같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처럼 죽지 않았습니까?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다 포기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권세와 능력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악한 자를 물리치고, 부정직을 정직으로 바꾸고, 험한 사람을 순한 양처럼 바꿀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무능한 아기로 오셨고 무능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희롱하던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머리에 쓰셨던 그 가시 면류관을 때리면 머리에서 피가 납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은 아무 힘없는 사람같이 당하고, 심지어 뺨을 때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 때도 아무 힘없는 사람처럼 다 당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무능한 사람이 되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그 능력, 풍랑도 잠잠하게 하고 불치의 병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게 되면 여러분들은 불쌍한 사람을 얼마든지 살릴 수 있고 병든 사람을 살릴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해결의 길을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먹이심을 통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고 살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두만강 변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북한에서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교회로 왔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증국에 살고 있던 친척이 초청장을 보냈다는데  일 년 만에 비자가 나와 와보니 초청한 사람이 이사를 가버리고 없었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 친척을 찾을 수 없어서 교회를 찾아 왔는데 목사님을 만나서 한없이 울었는데 감격과 서러움과 슬픔과 고통 때문에 그렇게 울었다고 합니다.

할머님의 감격은 70년 만에 교회를 처음 본 것이었고 슬픔은 자식이 장애자가 된 것은 70년 동안 예배당에 가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벌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또 교회를 보니 너무너무 좋아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도 여러분이 보내주는 헌금으로 북한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우리 돈으로 만 삼사천원 되는 중국 돈으로 백 원 정도를 나누어 주는데, 그 돈으로 북한으로 들어가게 되면 한 가족이 약 석 달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권세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해서 어떤 사람을 낳게 해 줄 수도 있고 기도해서 그 사람을 살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미 여러분에게 주신 이것만 해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 권세,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무능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왜 구유에 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화려한 궁전 같은 데에 보낼 수가 있을텐데 말입니다. 참으로 초라한 인생이지 않습니까? 참으로 초라한 인생들에게 이 땅에 사는 어떤 왕도 누리지 못하는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누리는 영광뿐만 아니라 앞으로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영광을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구유에, 자기 자신은 비천하고 초라한 것을 다 짊어 지셨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초라합니까? 잘난체해도 높은 체해도 가만히 보면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악하고 못되게 해도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힘 하나 쓰지 못하고 픽 쓰러져 버립니다.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악한 마음과 어떤 병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의사들 말로는 사람들의 몸속에 평균 20가지의 병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발명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안전운전해도 옆의 차가 슬쩍 밀면 끝나지 않습니까? 좋은 차도 아무런 소용없습니다. 초라하고 아주 연약한 인생, 참으로 처절하고 비참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최고의 영광을 주시기 위해 당신은 이렇게 비참하고 누추하고 초라한 것을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의미입니다.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절로 2005년을 마감합니다만 조금만 돌아보면 여러분 가운데서도 힘든 인생을 사시는 분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틈틈이 이것을 돌아봐야 합니다. 등록금 낼 때 힘든 분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옷이 제대로 있었습니까? 먹을 것이 제대로 있었습니까, 집이 제대로 있었습니까?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이나마 해도 이미 얼마나 영광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실 그 귀한 영광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풍성하고 풍요로운 것이 기다리고 있는 이 영광을 주시기 우리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천국을 주시고 권세와 능력을 주시고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가진 것도 다 줄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탄절의 의미는 무엇이든 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좋은 것을 다 주는 것이 성탄절의 의미입니다.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신 것은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 사람 간에 얼마나 죄가 많습니까? 알고 있는 죄, 알지 못하는 죄가 많습니다. 죄의 사슬을 끊어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죄의 사슬을 끊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이길 수 없습니다. 정말로 죄로부터 자유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불쌍히 여기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평화를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갈구합니까?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천사들도 노래했습니다.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탄절에 아이들이 트리에 양말을 거는데 양말의 의미가 본래는 주는 것입니다.

산타크로스의 유래는 4세기 초 소아시아의 성직자인 니콜라스에게 기원하게 됩니다. 니콜라스는 어릴 때에 상당히 경건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할 정도로 경건했고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10대 때 부모님이 전염병으로 두 분이 같이 돌아가셨습니다. 그에게는 유산이 좀 있었는데 그 동네에 돈이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한 자매에게 시집갈 수 있도록 돈을 주었고 또  밤에 돈이 든 주머니를 가난한 집 창으로 던져 주었습니다. 니콜라스가 이런 풍습을 만들었고 이것이 프랑스로 넘어가서 프랑스 수녀들이 성 니콜라스 기념일 밤에 오렌지나 호두같은 과일들을 바구니 담아 가난한 가정에 몰래 넣어주는 풍습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다시 네델란드로 넘어가서 어린 아이들이 성탄절 이브날 난로 곁에 나무 구두를 두게 되는데 구두는 빈 구두가 아니라 안에 당근을 넣어두는데 성 니콜라스가 아이들을 찾아다닐 때 말을 타고 간다고 생각하여 추운 날 힘들어 하는 말을 위하여 말이 제일 좋아하는 당근을 준비한 것입니다. 내가 선물을 받으려고 양말이나 구두를 내어 놓은 것이 아니라 내가 선물을 주기 위하여 걸어 둔 것이 양말의 유래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자들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방식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우리 아이들과 또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받는 사람은 잠깐 좋을지 몰라도 기쁨이 없고 행복이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가게 됩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쳐야겠습니다. 성탄절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이것입니다. 여러분 또한 우리 주님처럼 다른 사람에게 무엇이든 주는 것, 이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주기 원하십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받지 못해서 갈급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어떻게 하면 생깁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지 받지 못하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기독교 신자들만이 세상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사랑을 주지 않으면 세상에는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받은 평화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좋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르게 좋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을,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어떤 사람은 가진 힘으로 뭐든 좋은 것으로 주는 것입니다.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보십시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즐기면 좋겠습니다만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주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 파파파노라는 착한 구두 수선공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어느 크리스마스 전 날 꿈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할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파파파노 할아버지, 내가 크리스마스 날에 할아버지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꿈에서 깨어 기다립니다. 크리스마스가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에만 특별히 쓰는 커피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려놓고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구둣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예수님을 기다리다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추운 날 청소부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안된 마음에 추운데 몸 좀 녹이고 커피라도 한잔 하라고 청소부를 불렀습니다. 청소부가 너무 좋아하며 빗자루를 던져놓고 구둣방에  들어와서 커피를 마시고 몸을 녹이게 됩니다.

점심때가 되도록 예수님이 오시지 않습니다. 한 누더기 옷을 입은 여인이 아기를 안고 지나갑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이불이 너무 엷어서 추워 보입니다. 할아버지가 또 불렀습니다. 구두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쁘디 예쁜 아기의 천사같은 발이 빨갛게 되다 못해 파랗게 얼어붙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가게 안에 있는 작은 신발을 찾아서 아기에게 신겨줍니다. 저녁때에 여러 명의 거지들이 나타납니다. 노인은 늘 크리스마스 때마다 이 거지들을 챙겼는데 오늘은 특별합니다.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때 먹으려고 준비한 특별한 음식을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거지들은 너무너무 좋아하고 행복해 했습니다. 거지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도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어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는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아서 혹 꿈이었는지 혹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놓쳤는지 생각합니다. 그 때에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립니다. “파파파노 할아버지, 나를 보셨죠?” 꿈속에서 들은 예수님의 목소리입니다. “나는 오늘 할아버지 가게에 세 번이나 찾아갔습니다. 한번은 청소부로 또 한 번은 아기를 안은 어머니로 그리고 또 한 번은 거지로 말입니다. 파파파노 할아버지, 오늘 따뜻한 사랑 정말 감사했습니다.”

또다시 성탄절이 찾아왔습니다. 성탄절의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리고 사실입니다. 때로는 부족하고 모자라고 때로는 그것 때문에 힘들지라고 줄 때 복이 있습니다. 주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줄 때에 행복이라는 최고의 복이 우리를 찾아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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