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달라야 합니다 (민 14:1~10)

  • 잡초 잡초
  • 256
  • 0

첨부 1


<목회기도>
2006년을 살게 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날,
주일 아침에 아름다운 기둥제단에서 예배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기쁨, 소망, 참 생명 되시는 주님과 동행함으로
범사에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힘겨움의 자리에서, 모든 곤고함에서 모든 불가능한 환경에서, 온갖 어둠의 자리에서…
능하신 주님의 손을 붙들고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으로 전진하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 앞에 닥친 고난의 '산지'가 있을지라도
기둥교회 성도들 당당히 정복하고 올라 찬양하는 주인공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예배드릴 수 없는 이들이 있음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추운 겨울 군 복무에 임하고 있는 젊은이들, 외국과 객지에 나가 가족과 교회를 그리워하는 이들,
병상에 누운 이들… 저들을 붙들어 주셔서 각자 처한 위치에서
정복해야 할 산지를 정복하는 복을 경험하고 간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종을 강단에 세우신 하나님!
이 시간 성령으로 붙드셔서 신령한 말씀, 생명의 말씀, 능력의 말씀,
치료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 오면 "사용하는 말들이 낯설다"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은혜와 평강…> 그래서 어색하다고 합니다.
당연히 어색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부감을 갖지 말고 따라 하시고 사용하십시오.

학교에 가면 선생님과 학생들이 쓰는 용어가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군인들이 쓰는 말이 있고, 건축 현장에 가면 건축용어가 따로 있고
병원에 가면 병원에서만 쓰는 의학용어가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에는 교회에서 쓰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색해 하지말고 잘 쓰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오른손 들고 [할렐루야!]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옆의 분과 다시 한번 인사합니다.
[좋아 보이십니다] [멋지십니다] [귀티가 나십니다]
어떤 분이 기둥교회에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 자체가
"감사의 조건이고, 수준이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수준이 있으니까 기둥교회에 오신 것입니다.
"수준은 무슨 수준"하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은 우리 수준과 맞지 않는 [수준이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통곡하는 이스라엘백성

사람이 살다 보면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냅니다.
그 어려움은 오히려 새로운 축복의 통로가 됨을 믿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이 "고통이 축복의 근원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모리아산의 고통이 있었고,
-요셉에게는 팔려가 종살이를 하고 땅굴 감옥에 갇히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지은 시(詩) 대부분은 고통의 밤을 만났을 때 쓰여졌고,
-요한은 유배지 밧모섬에서 고통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으며,
-사도 바울은 눈이 멀었을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다가 최악의 상황을 만나도 당황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그때도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확신하고
흔들리지 말고 분발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역경을 만나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굳세게 서면
하나님은 놀라운 복으로, 역전의 복으로, 함께 하시는 복으로… 이기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그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축복의 현장에서 울부짖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있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의 역사였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이루어진 은총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으로 주신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12명의 정탐꾼들이 탐지하고 보고한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 할 만큼 좋았습니다.
그곳에서 난 포도 한 송이는 두 사람이 함께 들어야 할 만큼
농사가 잘되는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민수기 14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확인하고도 밤새도록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2절을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민14:2)
계속해서 3절에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민14:3)
그리고 어디까지 발전했냐 하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하매" (민14:4) 했습니다.

왜 그들이 밤새도록 통곡을 하였습니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슬프게 만들었습니까?
다수의 정탐꾼들이 보고한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그 보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안된다, 틀렸다,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그토록 슬프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집트에선 비록 노예살이였지만 밥은 먹고 생명은 유지하고 살았는데…
이젠,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사막에서 죽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신세가 한심했지요.
그러니 노예살이라도 좋으니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소리가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보고와 백성들의 눈물과 분노 앞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6절에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민14:6)
옷을 찢는 다는 것은 큰 슬픔을 말합니다.
"슬픔에 겨워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새번역)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7)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8)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 그들을 두려워 말라…" (민 14:9)

그러니까 백성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10절에 보니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민14:10)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돌에 맞아 죽을 위기를 겪으면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증거했습니다.
"…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13:30) 는 보고를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10명의 부정적인 지도자들과 달랐습니다.
통곡하며 원망하는 백성들과 달랐습니다. 어떻게 달랐습니까? 무엇이 달랐습니까?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명 중에 열 명이 본 것은…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민13:28)
"…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 (민13:32)
"…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13:33) 했습니다.
한마디로 나쁜 것만, 나쁘게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불가능합니다", "포기합시다" 하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말만했습니다.

이에 반해 갈렙과 여호수아는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 " (민 14:7~9)

똑같은 환경을 보고 왔습니다. 그러나 보는 시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열 사람은 인간의 눈, 불신앙의 눈으로 사람과 상황을 보았고…
두 사람은 신앙의 눈, 하나님의 눈으로 그 땅과 사람을 보았습니다.
보는 눈에 따라 펼쳐지는 세상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2006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경험이나 살아온 세월을 들며
2006년을 미리 절망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진 사람입니다. 이미 안되는 사람입니다.

현재의 내 모습, 지금의 환경을 뛰어 넘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2006년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찾고, 승리하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예수님을 자기와 똑같은 죄수로 여겼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우리를 살려봐."라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았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 NIV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 NIV

마지막 순간에 죽음의 자리에서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저는 병원에 심방가면 중환자실에 의식을 잃은 환자들에게까지도 귀에 속삭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생명의 주관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이제라도 확신을 가지십시오."
왜냐하면 그 마지막 순간에도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망의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좋은 것을 보는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죽음의 자리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찾는 믿음, 예수님께 맡기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있다는 확신으로 현실과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백성 앞에 당당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4:18) 했습니다.
'내가 다 봤어. 내가 다 알아. 내가 경험해 봤는데 안돼.'라고
누구 마음대로 단정지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가 더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덩치 큰 호랑이한테 물려 죽는 사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에 의해 죽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이는 것으로 함부로 얘기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듣는 귀가 달랐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제 마음에
'참으로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말씀이 많지만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화를 할 때도 상대방이 듣기 때문에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여러분이 입을 열어 기도하는 것, 허공에 맴돌지 않고
땅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부르짖음에도 귀를 기울이심에 감사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역사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
하나님 스스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귀로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이 지속적으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 (눅 11:28)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같은 말씀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마11:15) 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는 "들을 귀"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약2:26)
여러분은 어떤 소리를 즐겨 들으십니까? 어떤 소리에 아멘 하십니까?
강단으로부터 어떤 설교를 듣기 원하십니까?

독일 함부르트 대학의 총장을 지내고 수천명이 모이는
함부르크의 성 스테반교회에서 목회했던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 라는 분이 쓴
저서 중에 나오는 내용이 좋아서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설교학을 가르치며 읽어 주고
가슴에 새겨두라고 강조했던 것을 소개합니다.

[만일 교회와 교회의 설교에 소금이 들어 있다면
소금기를 거스르려는 격한 반작용이 반드시 일어난다.
왜냐하면 소금은 항상 우리 인간들이 쉽게 상처받는,
또는 이미 상처 난 부분에 아주 쓰라리게 스며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설교자의 메시지에 심한 반발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의 메시지에 참된 소금기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세상과 교회가 지나치게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그다지 탐탁한 조짐은 못된다.
그리고 교인들이 한결 같이 모두 그들의 목회자를 존경하는 것도
썩 좋은 징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 대체로 목회자는
강단에서 소금으로서 뿌려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 교인들은 목회자의 설교에 자극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건전하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그들에겐 전혀 상처 입을 일도 없고 혹 있다 해도
좋으신 하나님께선 그들이 온전하도록 돌보시기 때문이다.
종교적 열광과 목회자 또는 설교에 대한 과도한 만장일치는,
종종 그 설교가 심각한 결핍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A Little Exercise for Young Theologians." pp.86~87)

귀에 거스리는, 소금기 있는 짠맛의 설교자가 훌륭한 설교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의 짠 맛 때문에… 뜨끔함이 있어야 하고
짠맛이 주는 쓰라린 아픔을 감수하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저런 일이 많지만 주일 성수해야 한다"는 설교를 들으면…
주일을 곶감 빼먹듯 빼먹는 사람은 '아니 1년 52주 중에 몇 주 빼먹을 수도 있지…
뭘 스트레스 받게 그런 설교를 하는 거야'…
기도 생활해야 한다고 강조하면
'기도는 목사님이 대표로 하면 되지. 뭘 우리까지 해.'라고 말하는 분들…
찔림이 있는 설교가 좋은 설교입니다.
향락의 유혹, 더 즐기고 싶고, 더 갖고 싶은 유혹이 많지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며 살라고 하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또, 또 저 소리…' 하며 찔림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많이 배우고, 경험 많고 똑똑한 세대의 잘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겸손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겸손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일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아니 그냥 나와주는 것도 고맙지. 뭘 더 하라는 거야' 하면서 찔림 받은 소리를 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소리를 듣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이라면 '아멘하고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듣기 위해… 예배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하여 기도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2005년 살면서 수없이 많이 들은 얘기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얘기입니까?
실족하고 삐지고, 마음 상했던 것이 하나님의 소리 때문입니까? 아니면 사람 소리 때문입니까?
사탄이 하는 일 중에 한가지 확실한 증표는 '평안을 깨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평안을 깹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주일성수 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회도 뺏습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꼭 사탄이 시험을 합니다.
목회자와의 관계를 멀게 합니다. 마음을 주지 않게 합니다.
성도와 성도의 사이에 미움을 만듭니다. 이 모든 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보는 눈이 달랐고, 듣는 소리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하나님의 약속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06년 평안을 깨는 소리에 귀를 막으시기 바랍니다.
심령의 평안, 가정의 평안, 교회의 평안을… 깨는 소리,
소근대는 소리, 간사하게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는 말이 달랐습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소리를 내었습니까?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민14:1)

백성들은 지도자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고, 그 원망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10명의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불신앙적인 보고를 받고 나서부터였습니다.
(1) 그들은 그 가나안 땅을 악평했습니다. 나쁘게 말했습니다.
"…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13:32)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가나안 땅을 악평하면서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2) 그들은 가나안에 사는 사람들이 강하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했습니다.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자손을 보았는데
그들은 얼마나 큰지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 고 과장하며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3) 그들은 지도자를 원망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 모세 따르기를 거부하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새 지도자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수많은 돌보심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겁도 없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을 쏟아놓았습니다. 망할 소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죽을 것이다. 망할 것이다, 사로잡힐 것이다."라면서 복 받지 못할 소리만 골라서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입으로 말한 대로 10명의 지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불평하던 백성들도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돌며 모두 죽었습니다.(민14:36~38)

잘 들으세요. 여호수아와 갈렙은 구구절절이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복된 사람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소망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06년 복된 삶을 위해
부정적인 불신과 절망의 말을 입에서 버리시기 바랍니다.
잠언 18장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잠18:21) 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믿음의 말, 소망의 말, 사랑의 말, 승리의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원망하는 소리도 들으십니다(민14:27).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본문 9절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백성들에게 반복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밥이라"고 했습니다.
문제에 먹히지 말고 문제를 먹이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문제를 밥처럼 먹어 버리면 오히려 새 힘이 나는 계기가 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 믿는 사람도 세상에 살면서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몸부림 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데도 눈물나는 일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기신 주님께서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이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치는 역경은
결국 우리의 밥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간증하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흥하고 망하는 것은 시각의 차이입니다.
흥하는 사람은 흥하는 시각으로 보고, 망하는 사람은 망하는 시각으로 봅니다.
망하려니까 자신들을 '메뚜기'로 보았고, 흥하려니까 적들을 '밥'으로 보았습니다.

흥하고 망하는 것은 들음의 차이입니다.
흥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망하는 사람은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흥하려니까 '위로와 확신'의 소리를 듣고, 망하려니까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듣습니다.

흥하고 망하는 것은 언어의 차이입니다.
흥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말을 하고 망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흥하려니까 '여호와께서 그 땅을 … 주시리라' 확신하였고,
망하려니까 백성들이 '망할 소리'만 했습니다.

우리의 보는 것이, 듣는 것이, 입으로 말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제가 만났거나 들었던 외국 사람 중에 이름이 제일 까다로운 사람이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Juan Carlos Ortiz)입니다.
그 사람이 쓴 [제자입니까?]라는 책에 보면
어떤 사람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할렐루야"하고 노래하고
예배가 끝난 다음 밖으로 나왔는데 진눈깨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는 하는 말이
"날씨 한번 더럽네"라고 했답니다.
여러분, 날씨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앞에 닥쳐진 어려움들,
우리 앞에 닥치는 진눈깨비들도 우리가 헤치고 나가야 할 산지라면
'하나님 감당케 하시옵소서. 이 산지를 내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006년이란 산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우리를 짜증스럽게 만들고, 화나게 하고, 낙심케 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수많은 일들이 여전히 2006년에도 우리 앞에 닥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선교회에서, 속회에서…
별의별 일이 다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잘 들으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기리라, 능히 이기리라" 이기게 될 것입니다.

2006년 산지를 정복해 나가면서 내 앞에 닥친 수많은 산지,
어려움들을 "능히 이기리라"고 외치며 승리를 간직하며 사는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기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을 메뚜기로 보는 초라한 자가 아니라
적들을 밥으로 보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6년 1월 8일 고신일 목사 주일낮설교>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