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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통한 사람, 불통한 사람 (삼상18:6-16, 행 2:37-42, 마 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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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배 한척이 파선을 했습니다. 선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 극적으로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서든지 이 무인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으로 땀을 흘리며 수고하여 한 달 만에 몸 붙여 살 수 있는 조그만 오두막집을 만들었습니다. 이 오두막이야말로 무인도에서 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요 안식처였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깊은 숲 속에 들어갔다가 밤이 되어서야 다시 자기 오두막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그렇게 애써지어놓은 오두막집이 불길에 휩싸여 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이 고독한 섬에서 자신이 의지하고 살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인 오두막집이 이렇게 타버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망연자실이었습니다. 그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 물러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밤은 점점 깊어워지기 때문에 그는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해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였습니다. 거의 한 달여를 수고하여 겨우 마련한 집을 잃은 아픔을 안은 채 임시 거처에서 벧엘에서의 야곱처럼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어 뜻밖에 인기척이 나서 잠을 깨어보니 놀랍게도 지난밤에 배한척이 도착하여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 무인도에서 영원히 혼자 살게 될 것 아닌가하고 불안에 빠져 지나던 이 사람은 너무 반갑고 놀라워서 달려가 사람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의 대답은 이 섬 앞을 지나다가 섬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고 누군가 구조를 요청하는 것으로 알고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애써 지은 오두막이 불탈 때 이 사람은 얼마나 낙담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마침내 자기 목숨을 살려내는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일컬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불행이나 실패가 당장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이런 현실에도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대처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마침내 선으로, 성공으로, 축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오늘 사무엘서 본문을 보십시오.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에게 돌아 온 것은 사울왕의 정치적 보복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것이 실패하자 다윗을 왕궁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13절에 “그러므로 사울이 그를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군대로 말하자면 장성 급으로 있다가 위관 급으로 강등 당한 것입니다. 엄청난 추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운명이 사울 왕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창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12절에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는데 사울 왕이 어떻게 다윗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여기 형통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형통하기를 원하신다면 주님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시는 여러분, 반드시 형통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난 뒤 천명부대의 부대장으로 군인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서 싸우게 되었는데 13절에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므로 가는 곳마다 승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지혜롭게 행하였다”는 것은 그가 전쟁에 나가서 대승한 것을 말합니다.

다윗이 비록 왕에게서 쫓겨나는 비운을 당했지만 오히려 이것을 계기로 그는 “백성 앞에 출입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윗의 인기가 충천해서 요새말로 하면 “다사모” 즉 “다윗을 사랑하는 모임”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16절에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다”고 했습니다.

왕으로부터 쫓겨나는 불행이 오히려 다윗으로 하여금 더욱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했고, 나중에 그가 왕이 되어 통일 국가를 이룰 수 있는 토대가 여기서부터 마련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형통케 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2. 그러나 사울은 어떠합니까? 그는 불통하는 사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먼저 사울의 불통의 근원은 그가 하나님을 떠난데 있습니다.

성령이 떠나고 악령이 그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지만.....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은 나중에 불에 태워버린다고 했습니다. 알곡이 아니고 쭉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주변의 어떤 나라도 그들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시절도 우순풍조하여 풍년이 왔고, 하나님은 그들의 여호와 라파가 되셔서 질병도 막아주셨기 때문에 정말 샬롬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임마누엘의 축복보다 더 귀한 복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보다 더 귀한 보배가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신앙중심, 신앙제일, 신앙우선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마음이 곧 사람인데 마음 씀씀이가 옳지 못하면 불통하게 됩니다.

다윗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 이스라엘 각성에서 여인들이 환영단을 만들어서 사울 왕과 다윗의 개선을 환영했습니다. 그때 저 여인들이 환영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그러나 사실은 이 시는 히브리 문학 양식에서 소위 대구법이라는 것을 따른 것입니다. 꼭 천(千)을 사울에게 적용시키고 만(萬)을 다윗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럴 테면 “사울과 다윗 두 영웅이여, 당신들이 천만의 우리 적군을 물리치고 승리했도다” 이런 뜻입니다.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환영노래입니다. 아니 설사 다윗에게 만(萬)을 돌렸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패전의 위기에 있는 나라를 구했다면 왕으로서도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는 수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아와서 국민들 앞에서 포상을 했더라면 다윗은 끝까지 왕의 충성된 신하일 것이요, 국민들은 그런 사울 왕을 정말 존경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다윗의 이름이 자기와 같은 급으로 불려 지는 것부터 기분 나빴습니다. 하물며 다윗에게 만을 돌릴 때, 나중에 결국은 저 백성들이 자기를 몰아내고 다윗을 왕으로 세울 것이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시기심이라고 합니다. 그 마음에 불같은 시기심이 생긴 것이 바로 사울의 불통의 원인입니다.

잠언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자기 마음을 다스리겠습니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이 내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주님이 떠나고 악령이 그를 사로잡고 있으므로 이런 독한 시기심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오늘 누가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형통과 불통이 여기서 결정됩니다.

(3) 8절에 보면 “사울이 그 말에 심히 불쾌하여 심히 노하였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사람의 노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상고해 보십시오. 옛날에 가인이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고 자신의 예물이 열납되지 않았을 때 그의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분이 나서 붉으락푸르락한 것을 말합니다.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분노의 내용이요 결과입니다. 분노는 살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분노하게 되면 우리는 쉽사리 사탄의 밥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분내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얼굴을 붉히면서 까지 분내는 일은 없습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당회를 하건 제직회를 하건 부서회의를 하건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믿는 마음으로 의논하고 말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혈기를 부립니까? 그렇다면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일들이 하나님까지 무시하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고도 형통하겠습니까?

(4) 사울왕은 다른 사람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게 될 때 그들 서로간의 관계에 엄청난 변화가 왔습니다. 이제까지는 서로 돕고 협력하는 수평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주님 사역의 훌륭한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고 공포하고 난 후부터 제자들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동반자였던 그들이 이제부터는 경쟁자 관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누가 더 크냐?”라는 문제를 놓고 노상토론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주님의 예루살렘행과 얼마나 거리가 먼 행태이며, 주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해드렸습니까? 단적으로 말하면 이런 서열다툼 때문에 가룟 유다가 뛰쳐나가 우리 주님을 넘겨주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의좋게 교회를 협력하면서 섬기다가 직분을 선출한다고 하면 교회 내가 온통 경쟁관계로 바뀌면서 분위기가 냉랭하게 되어집니다. 이런 분위기가 결국은 형제를 용납하지 못하는 옹졸한 마음이 되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누가 선한 일을 해도 순수하게 받아주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일 때문에 우리 주님은 한없이 마음 아프시고, 또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러니 개인도, 이런 개인들이 모인 교회도 역시 불통하게 되는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3. 결국 문제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2006년 들어 두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아직도 새해를 출발하는 시점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무엘서를 보십시오. 삼상18:17에 “그가 생각하기를...”이라고 했습니다. 21절에는 “스스로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25절에는 “이는 사울의 생각에...”라고 했습니다. 생각이 문제입니다. 오늘 내 생각이 어떠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잠언에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생각이 곧 사람입니다. 생각이 건전하면 사람이 건전하고 그 인생도 건전하여 형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이 올바르지 못하면 그 사람도, 그 인생도 건전하지 못하여 형통할 수 없습니다.

요새는 사람마다 자가용차를 많이 이용합니다. 그래서 차안에서 라디오를 듣기도 하고 테이프나 CD를 통하여 듣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노래도 있고 설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테이프를 끼우느냐에 따라 우리가 듣는 내용이 달라집니다. 유행가 테이프를 넣으면 우리는 유행가를 들어야 합니다. 찬송가 테이프를 넣으면 우리는 찬송가를 들을 수 있습니다. 라디오 같으면 어떤 채널을 선정하느냐에 따라 듣는 내용이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생각의 테이프가 어떠냐에 따라 우리 인격과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연초에 우리 생각의 테이프를 제대로 갈아 넣는 일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과 상관없는 세속적인 가치관의 생각 테이프를 가지고 살아왔다면 그것을 빼내어야 합니다.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테이프로 갈아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 일년이 형통하게 됩니다. 나아가서 내 인생이 형통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생각의 테이프를 갈아 넣는 일입니까?  성경에서는 그것을 “회개하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라고 하는 말은 “처음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게 되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게 되고 결국 우리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범사에 형통하게 될 줄 믿습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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