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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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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연초부터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식들 날마다 당면하는 현실은 근심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세상 많은 사람들이 근심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세상의 소식들을 보십시오.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들려오는 많은 소식들은 근심어린 소식들입니다.
사학법 때문에 학생들을 볼모로 정부와 사학관계자들이 서로 된다 안된다 싸웁니다.
대통령은 어떤 한 사람을 장관을 여당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데도 장관을 시켰습니다. 그러자 대통령과 보조를 맞추어야 할 여당에서는 안된다하면서 서로 대립합니다.

요즘 영동지역에서는 심각한 가뭄으로 일부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물부족 때문에 근심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강릉 지역은 혁신도시에서 떨어져서 앞으로 이 지역은 너무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닌가 근심하면서 혁신도시 탈락으로 인하여 근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주님은 이런 근심많은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기쁨을 약속합니다.
근심이 기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외적인 특징이 기쁨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외모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가정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가 이 세상에서 가장 구별되는 외적인 특징은 바로 기뻐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기쁘고 일이 기쁘고 공부가 기쁘고 삶이 기쁩니다. 심지어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고 죽음 앞에서도 기뻐합니다. 항상 기뻐하는 삶 항상 기뻐하는 인생의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와 부딪히고 여전히 이런 근심의 문제 속에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근심을 기쁨으로 역전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기쁨의 근원이 되십니다.저수지에서 물을 공급하여 주듯이 주님은 기쁨의 저수지가 되어서 우리에게 물을 기쁨을 충만하게 부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내 삶에서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말하기를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고 또 조금 있으면 본다는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19절에서 답하시기를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고 합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은 사실 무슨 중요한 내용을 담을 이유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15-24절까지의 본문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자꾸 되풀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이 이야기가 13장에서부터 계속 간헐적으로, 그러나 꾸준히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본다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루실 대속의 사역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대속의 사역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서 오셔서 결국 조금있으면 그 크신 사역을 감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난뒤에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남아있는 고통입니다.여기 제자들에게 20절 “곡하고 애통하리니 그리고 근심”이 일어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20절을 보십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근심”의 문제가 없다고 하시지 않고 일어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성도들에게는 근심할 수 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근심할 것을 아십니다.아예 근심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우리 입장에서는 “근심”이 없기를 원하지만 주님은 근심자체를 없애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근심 때문에 우리의 삶이 부정적이고 근심에 패배하는 삶을 원하고 계시지는 않습니다.하늘로 주님이 떠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마음에 근심이 찾아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주님은 근심을 기쁨으로 역전시키는 대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 근심하는 문제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라

23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여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근심을 이기는 길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아버지께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 자녀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구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주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확신하시고 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어떻게 구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마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고 합니다.구하되 “간절히 구하라”는 것입니다. “힘써 구하라”는 것을 강조합니다.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강청하라”고 하십니다.눅11:8 “그 강청함을 인하여 그 소용되로 주리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간절하게 구하셨습니다.
눅22: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간절하게 아버지께 구하셨습니다.

여러분 절실한 문제를 놓고 간절하게 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생활은 어린아이같은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아버지 앞에 자녀처럼 떼를 쓰면서 간절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부모에게 떼를 쓰는 경험을 우리가 해보았을 것입니다. 때로는 말도 안되는데 떼를 씁니다.그런데 자녀들이 아무 사람에게나 그렇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떼를 쓰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바로 그렇습니다.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바로 떼를 써도 좋을 아버지에게 자녀가 하듯이 우리가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땅에서 갖는 신분의 축복입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무엇을 근심합니까? 아버지에게 근심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할 수 있는 문제는 “무엇이든지”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범사에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근심하는 모든 문제가 기도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물질의 문제,영혼의 문제,생명의 문제,질병의 문제,자녀의 문제,학업의 문제 모두가 해당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길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우리들 각자마다 근심하는 것들이 다를 것입니다.
“근심”의 무엇을 갖고 먼저 우리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종종 근심거리가 있고 근심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다 아시지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하여 주시겟지요”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대단히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미련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중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 누구인가하면 근심거리가 있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누가 가장 지혜로운 성도인가 ? 바로 기도하는 성도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내가 하고 내가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교만을 보일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루를 열기 전에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시작하기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차를 타기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기 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전도하기 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공부하기 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삶 속에서 기도는 모든 일에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결국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가 곧 삶입니다. 모든 일을 기도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일을 하는데 있어서 “기도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큰 일이 있을때에는 특별히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사탄이 역사합니다.
교회가 보면 큰 일을 겪으면 꼭 사탄이 역사합니다. 그것은 결국 기도의 부족입니다. “모든 일”에기도하지 않으면 “욕심”이 우리를 미혹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항상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특공대를 조직하여서 기도합니다. 밤을 새워가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가 결국 영적으로 승리합니다.
항상 교회는 모든 일에 기도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간절하게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종종 기도에 실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시도해 보기는 합니다. 결심을 단단히 하고 몇번 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마음 한 구석에 정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기도생활에 대해 확신을 갖기 전에 그랬습니다. 기도를 가르치면서도 정작 제 자신의 기도생활은 형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능력을 체험한 뒤에 기도에 대한 제 믿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고 무엇이든지 절대 기도하시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강조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이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움직이는 보증 신용은 오직 에수님 이름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우리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많은 문제 해결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용카드입니다. 우리들의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만들어 사용할 때 필요한 것을 구입하고 신용카드로 결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빚을 갚지 못하거나 하면 신용불량자가 되어서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신용불량이 되어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용불량자가 되면 아무리 내가 필요해서 물건을 사고 결재를 하려고 해도 결재할 수 없고 이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번 당하게 되면 모든 카드회사에서 냉정하게 짤라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신용카드인 예수님의 이름은 그런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항상 우리가 이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도록 허락하신 의미가
첫째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열렸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시기 전의 상황입니다.그러나 제자들에게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라고 합니다. 이것은 결국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온 천지가 심히 어두워졌다고 했고 또 성전에서 지성소를 가리워 주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갈라졌습니다. 이 휘장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단절을 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휘장이 갈라짐으로 누구든지 지성소로 들어 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직접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나아가서 직접 나아가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그런 분이 있습니다. 본인은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부탁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기도 좀 해주세요” 합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본인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아들이 있다고 합시다. 동생이 학용품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학용품을 사 달라고 해야 하는 데 형에게 부탁했습니다. 형이 아버지에게 가서 동생의 요청을 전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왜 네 동생이 직접 나에게 요청하지 않니?' 아버지의 마음이 아픕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친근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멀리서 다른 사람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요청하는 자녀를 보는 것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물론 아버지께서 화가 나셨거나 용서치 않으시는 죄가 있으면, 아버지께 나아가고 싶어도 나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좋으신 아버지되심을 믿지못하고, 근심과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살면서도 아버지께 구하지도 못하고, 구해도 직접 구하지 못할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아프 신 것 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은혜는 기도의 문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문만 열려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문제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문이 닫혀 있을 때는, 성도는 가장 약하고 두려운 때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겐 기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하심으로 이 기도의 문을 열어 주신 것 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불완전한 믿음과 부족한 생활 중에서도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이름과 우리들의 연약함 중에도 기도할 수 있는 축복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의 최대의 걸림돌은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없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기도하지 못하며 살아왔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음을 느꼈을 때, 뿐만아니라 죄악된 생활에 빠져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생각나면, 우리는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만 스스로 기도에 자신을 잃고 좌절하고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갈 것이니라”

우리들은 다 연약합니다. 기도 생활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한 중에도 우리가 기도생활에 좌절하지 않게 하시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결코 우리 자신의 공로를 보시기 때문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보시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 사도행전12장에 보면 초대 예루살렘교회에 큰 시험이 닥친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사도 야고보가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고 사도 베드로 마저 옥에 갇혀 목베어 죽기 직전의 위기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그때 교인들은 다락방에 숨어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지만 야고보사도의 일도 있고 해서 베드로가 살아 나리라고는 별로 믿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정작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살아 나왔을 때, 제자들은 믿어지지 않아서 당황했던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집아니가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다고 하니까 그 계십아이에 “네가 미쳤다”고 야단을 칩니다.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오히려 놀랐습니다.하나님은 그들이 적은 믿음 중에도 열심히 모여 기도한 것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믿음이 연약한 가운데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주님의 기쁨을 경험할 줄 믿습니다.

3. 응답받음으로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24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는 구하는 것인데 구하는 것은 받는다고 강조하십니다.
그 받는 가운데 모든 근심이 바뀌어 충만한 기쁨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땅에 부재하시지만 그 자녀들에게 기쁨과 주님의 살아계심의 확신을 기도를 통하여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활하여 살아계시기 때문에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응답하십니까?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충만함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좋은 것으로 응답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마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마7:11“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여기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응답하여 주십니다. 이 약속에 의지하여 믿음의 확신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독교와 이방 종교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기도생활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방 종교에도 기도의 내용과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뜨거운 마음으로 아침마다 목욕제개를 하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방 종교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응답의 확신이 없습니다. 그들의 기도에는 응답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받는다는 믿음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신이 약속해 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이 기도하면 내가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약속이 없기 때문에 확신이 없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기도합니다. 그래서 더 간절히 기도하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열심히 빌기만 하면 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생활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약속을 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들추어보면 구구절절이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약속이 있기 때문에 내가 기도하면 받는다라는 확신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수 없이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또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어떤 절망 가운데 있더라도 낙심하거나 근심하시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면 됩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하고 기대하면 기쁨이 일어납니다. 기도하고 기대하면 기이한 기적이 일어나고 기대되는 기쁨이 생기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비록 어렵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기쁨의 풍성함을 누리시길 바랍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주님께 기도하는 자가 결국 미움 속에서도 근심 속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기도응답으로 기쁨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내 속에 기쁨이 없다는 것은 곧 기도가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의 신앙으로 기쁨의 모습이 되기 바랍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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