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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새 역사의 대열에서 (민 1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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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교육학에서는 “환경이 사람을 바꾼다”고 믿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절 근처에서 시장 근처로,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글방 근처로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사실 맹자의 어머니는 교육환경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가를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의 사람은 환경을 바꿀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동물들은 환경에 적응하고 살지만 인간은 환경을 바꾸고 창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어진 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모습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의 눈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열 정탐꾼은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땅이라”고 했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넉넉히 우리는 정복하고야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어떤 의미를 발견했으며, 어떤 관점, 어떤 시각, 어떤 눈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엘리바베스 랜던은 “절망과 희망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 만 너무나도 가깝다. 언제나 절망이란 놈은 희망 바로 뒤에 따라 온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절망과 희망은 붙어 다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절망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늘 절망하며 살고, 희망을 보는 사람은 늘 희망 가운데 꿈을 꾸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창조적인 소수자”라고 불렀습니다.
이 창조적인 소수자들은 어두움 속에서도 빛을 보는 사람들이요, 절망가 운데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보았던 그 비전을 향하여 달려가는데 대가를 지불하기에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어제도 이 사람들에 의하여 역사는 굴러갔습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에 의하여 역사는 굴러갑니다.
그리고 내일도 이 사람들에 의하여 역사는 굴러가게 될 것입니다.

1.어떤 사람이 새 역사의 대열에서 버림받습니까?

부정적인 시각은 새 역사의 대열에서 버림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 속에는 믿음이 없고, 그들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시각을 가지고 믿음으로 창조적인 말을 해야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하고, 믿음의 말을 해야 하고, 성령과 함께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의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여러분, 어차피 세상에는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평생을 “문제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문제시하는 그것이 문제다”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공동묘지에 있는 사람뿐입니다.
따라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문제라는 것은 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맹장이 지금 터지게 생겼는데도 아프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람이 살 수 있겠습니까?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고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성공의 길 안내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회사에서 판매실적이 아주 부진해지자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불평을 하는 사원들에게 판매책임자가 흰 백지 큰 것을 벽에 걸어놓고 만연필을 뽑아서 한쪽에다가 뿌렸더니 먹물 두 세 방울이 튀겨져서 얼룩이 졌습니다.
이때 책임자가 “여러분 여기서 무엇을 보십니까?”라고 묻자 많은 사람들이 “얼룩을 봅니다. 까만 점을 봅니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때 판매 책임자가 “여러분 왜 얼룩만 여러분의 눈에 들어옵니까? 왜 까만 점만 여러분의 눈에 들어와야 되겠습니까? 까만 점은 한켠에 살짝 찍혀진 부분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이 희어져 있습니다. 왜 이 많은 부분을 보지 못합니까?”라고 말했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안된다고 생각하셨던 분들, 안된다고 말하며 사셨던 분들, 아직까지도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여러분 앞에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불행하다고 말하셨던 분들, 슬퍼서 우셨던 분들,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할 수 있는 요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삶이 의미가 없다고 자학하시던 분들, 가치 있는 일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햇빛이 나면 죽은 나무는 더 바짝 마릅니다.
그러나 산 나무는 더 싱싱하게 살아나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을 때에 점점 더 말라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문제의 햇빛 때문에 더 싱싱하게 살아 용솟음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인생의 정지 표시가 아니라 방향 표시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새 역사의 대열에서 버림받는 사람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능성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감동을 주었던 한 작자 미상의 시 한 토막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주라고 부르면서 순종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보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생명이라고 부르면서 소유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지혜라고 부르면서 열망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부요하다고 부르면서 추구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영원하다고 부르면서 바라보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신실하다고 부르면서 신뢰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고 부르면서 섬기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영광되다고 부르면서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공의롭다고 말하면서 두려워하지도 아니하니,
내가 너를 정죄하거든 나를 비난하지 말아라”

여러분, 언제나 그렇습니다.
나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을 빼버리고, 나와 함께 하는 성령님을 제외하고,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제외하고 나면 내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고, 성령이 역사하고 있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이 내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에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왜 그분을 믿지 않습니까?
그분을 우리는 아버지라 부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나를 더욱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새 역사를 이룬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열 정탐꾼이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하고 낙심하여 밤샘을 하며 대성통곡하고 있을 때에 갈렙과 여호수아는 소망을 가지고 “아니다 우리는 저 땅을 능히 정복할 수 있다”고 설레이는 가슴으로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확신에 찬 외침이었습니까?
이 얼마나 무서운 소망이었습니까?
이 얼마나 상황을 역전시키는 위대한 힘이었습니까?
여러분,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자신만만하게 했던 것일까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이심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의 구세주이심을 믿으십니까?
성령님은 여러분을 떠나지 않은 영원한 여러분의 보혜사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고 하면 세상에는 포기할 것도, 불가능한 것도 없는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 열 정탐꾼과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갈렙과 같은 말을 하고, 여호수아와 같은 생각을 할 때에 세상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입으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입으로 나를 죽일 수도 있고 나를 살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철학을 강의하는 사람들은 “사람은 누에고치가 자기 입에서 실을 뿜어서 집을 짓고 그 집 속에서 자기가 살아가듯이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자기 인생의 집을 지어 그 속에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분들을 칭찬하고 격려해 보세요.
갑자기 그분의 얼굴에 생기가 살아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칭찬 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칭찬 거리가 없는 것이 아니고 칭찬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도 칭찬거리입니다.
예수 자랑, 교회 자랑, 교회 교역자들을 자랑하는 것도 칭찬거리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자녀들을 망치는 비결 하나 가르쳐 드릴까요?
집에 가서 내일아침부터 식사시간마다 아침에는 교회 욕하고, 점심에는 목사 욕하고, 저녁에는 예수님 욕하고 한번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자녀는 자동적으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시골에서 도시를 오고 가는 버스종점에서 추운 겨울날 운전기사가 시동을 걸어놓고 출발하지 못하고 달달달달~ 거리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고등학생이 춥기도 하고 학교는 가야겠는데 버스가 달달달달~ 거리고 계속하여 정차하고 있으니까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저씨 이 똥차 언제가요?” 그랬더니 운전기사 아저씨가 뒤를 돌아보며 “똥이 차야 가지” 그러더랍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싸움하러 온 것도 아닌데 “누구든지 걸리기만 해 봐라”하는 듯이 일그러진 얼굴로 나에게 부담을 주는 사람을 볼 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따라서 내가 교회에 와서 큰일은 못해도 얼굴 밝게 하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교회에 큰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웃고 다니시기를 바랍니다.

시계 광고를 보면 시계바늘이 7시 25분을 가르키는 광고는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7시 25분을 가르키는 시계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그런 시계를 누가 사겠습니까?
그래서 시계를 파는 가계를 가보면 한결같이 10시 10분을 가르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나 밝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세상을 밝게 볼 줄 아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실 줄로 믿습니다.

한쪽 길이 막혔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다른 길이 여러분에게 반드시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어른들의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학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입만 벌리면 불평하는 사람들, 원망하는 사람들, 비난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신앙은 반드시 무너져 내리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우리 교회에 과제가 있다면 이런 희망적인 사람,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사람, 역사를 지배하는 인물들을 얼마나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지향하는 앞으로 몇 년간의 목표 중에 하나는 우리 성도들 가운데 이런 창조적인 소수자들, 꿈을 꿀 줄 아는 사람들, 목표를 가진 사람들, 역사를 이끌어 가는 리더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꿈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실시하고 있는 제자훈련, 사역훈련, 청지기 훈련, 크로스웨이, 성장반 성경공부에 부지런히 참여하시고, 부지런히 영성을 갈고 다듬어서 역사를 이끌어 가는 위대한 인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총회 정책개발위원회 모임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산업사회가 되었을 때에, 우리나라를 살린 사람이 60년대에는 서울 구로공단에서 노동을 하던 사람들과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쓰지 못하고 가발을 만들던 여공들에 의해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0년대 80년대에는 가방에 샘플 하나들고 전세계를 누볐던 이 사람들에 의하여 발전했고, 90년대 2000년대 와서는 땅을 가진 사람이 돈을 벌었지만 이제는 지식이 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가방에 샘플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전자 상거래, 즉 인터넷으로 제품을 사고 파는 정보시대가 온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믿음의 선진들이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배고파 가며 그냥 뛰어 다녔던 맨발의 목회자들에 의하여 교회는 발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제품 샘플들고 가방들고 다니듯이 목회자들이 심방하고 전도하고 발바닥으로 뛰어다니며 살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기에 믿음이 더해져야 세상을 정복하게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영성을 날카롭게 갈고 다듬어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지셔야 됩니다.
그리고 한가지 지식이라도 확신을 가지고 믿음을 가질 때에 세상을 정복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최근 일본에서 통계가 나왔는데 100대 재벌이 10년마다 90%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눈감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동안 한국교회를 이끌어 왔던 굴지의 교회들이 지금 한국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까?
오히려 많이 무너지는 모습이 자꾸 우리 귀에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영성을 갈고 닦아 하나님 앞에 “하나님 우리를 쓰시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 주소서”라고 우리 모두 두손들고 기도하여 하나님 앞에 깨끗한 순종의 제물이 되지 아니하고서는 30년 100년 우리교회가 쓰임 받는 교회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보다도 더 아름답게 쓰임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진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자 틸리케는 “겨자씨에서 새소리를 듣는 것이 믿음이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작은 씨앗이지만 거기서 거대한 나무를 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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