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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섬기는 삶 (마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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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에 대한 인류의 기대

메시야 곧 구세주의 오심은 온 인류의 오랜 염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죄악과 불의가 가득할수록 사람들은 메시야를 더욱 갈망했습니다. 메시야가 필요하다 함은 더 이상 인간들에게 희망을 걸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메시야에 대한 인간들의 기대는 자주 거짓 메시야에 의해서 좌절되곤 했습니다.

거짓 메시야 니므롯과 바벨탑

인류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은, 자칭 메시야가 자주 출현했습니다. 대홍수 이후에 인간들이 새롭게 번성하게 되자 그들은 넓은 땅을 찾아 동방으로 옮겨가던 중에 시날 평지를 만나자 거기 머물렀습니다. 그 때 니므롯이라는 영걸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결집시켜서 거대한 사업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기를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므롯과 그를 따르던 자들은 바벨탑을 중심으로 흩어짐을 면하자 했으니 하나님의 명을 정면으로 거역한 것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자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니므롯을 메시야로 알고 그의 선동에 넘어가 바벨탑을 쌓는데 협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니 성 쌓기를 그치고 온 지면으로 흩어졌습니다.

공산주의는 실패한 현대판 메시야 운동

니므롯 이후에도 메시야를 자칭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출현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제왕들도 있고, 종교가들도 있고, 사상가들도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에 의해서 시작된 공산주의는 현대판 메시야 운동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대신해서 공산주의가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기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해서 말살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없고 농민과 노동자가 착취당하지 않는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이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신으로 추앙하고 있지만 그들의 운명도 불을 보듯 뻔합니다. 거짓 메시야들은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 위에 군림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을 하도록 만듭니다. 세속 종교와 이단들 역시 거짓 메시야에 해당합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영적 가르침에 속아서 영혼을 도적질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그러나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는 저들과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거짓 메시야들은 타락한 인간들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전자는 범죄한 아담에게서 난 자들이지만, 후자는 아담과 상관없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주전 750년경에,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탄생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동정녀의 몸에서 나실 메시야가 곧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때가 되매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신 예수님이 바로 그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도 이후에도 또 다른 메시야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요 10:8)라고 하셨습니다.

섬기기 위해 오신 메시야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사람이 되셨으니 이보다 더 낮아질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그야말로 힘의 논리만 통하는 정글과 같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살벌한 곳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살기에 바빠서 다른 사람들의 처지를 돌아볼 겨를을 갖지 못합니다. 그뿐입니까? 사악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의 권익을 빼앗는 자들이 활개 치는 세상입니다. 국법이 있어도 백주에 버젓이 납치와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갈수록 세상이 더 악해져 가고 사람들의 심성이 강퍅해져 갑니다. 그러니 내가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기대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저는 외롭게 살아가는 노인들을 볼 때 저분들도 젊어서는 자식들을 낳아 애지중지 키웠을 텐데,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허리가 휘도록 고생했을 텐데, 늙고 나니까 돌보는 자식 하나 없이 고생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를 낳아서 길러준 부모조차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것이 인간들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허물로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우리 인생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이 땅에 죄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와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하나님도 예수님도 알지 못하던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사랑이요 기이한 사랑입니다.

성경은 메시야를 증거하기 위한 책

기독교 신앙은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속아서 바른 말을 해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이 사실은 진실입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면 성경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므로 오류가 없고 진실합니다(밷후 1:20). 누가 이 사실을 입증해 주어서가 아닙니다. 성경 스스로가 그 내용의 진실함을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이신지 아닌지는 그 분의 탄생과 행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생애는 선지자들의 예언과 일치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행하신 가르침과 행동과 표적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의심 없이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요구하기를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요 14:).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누가 선량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그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느냐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그가 얼마나 재산이 많은지, 또는 지위가 높은지를 보는 것도 아닙니다. 기준은 단 하나, 그 사람의 말과 행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언행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이기적인지 아니면 이타적인지, 또는 교만한지 겸손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고 하셨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길 잃고 방황하는 양들을 찾으러 오신 선한목자와 같은 분이십니다. 죄짓고 불의한 우리 인생들을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로 보지 않으시고 길 잃은 양들로 여기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마태는 증언하기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고 했습니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님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죄인 시 해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리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으며, 그들이 초대하는 식탁에 함께 앉아 음식을 드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르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오는 병자들을 물리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으며,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생하는 자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어 온전케 만들어주셨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면 유대인의 전통과 규례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한번은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데 그 자리에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여자를 불러내어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보고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기를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한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게 된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인명 경시의 풍조가 매우 뿌리 깊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무수한 인명이 파리 목숨보다 더 하찮게 취급당합니다. 삼국지에 보면 오촉 연합군이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수십만 군사를 강물에 수장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수십만의 백성이 무참하게 죽었지만, 정작 이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제갈량을 칭송하는 것 일색입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백성들에 대한 동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50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갔으나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와 적군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서 대패하였습니다. 나폴레옹과 함께 살아온 군사는 겨우 몇 백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칭송할 뿐, 그의 야욕 때문에 죽어간 수십만의 백성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목숨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로만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이해타산에 따라서 변질되는 우정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버리는 우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들을 친구로 삼아주시다니 세상에 이처럼 파격적인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 그러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제자들의 오해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점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때였습니다. 하루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절하며 청이 있으니 들어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하시자 그 어머니는 말하기를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건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높은 지위를 청탁해 두려고 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이 일을 알고는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기를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말씀은, 너희가 나를 믿고 따르는 것은 성공 출세해서 대접받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면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겨주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제자

사랑하는 성도님들, 열 두 제자들만 주님의 제자들인 것이 아니고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다 주님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는 스승의 언행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복 받는데 신앙생활의 목적을 두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혼의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의 시민이 되었으면 말할 수 없이 큰 복을 받은 것인데, 더 무슨 복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이제 우리의 관심은 복 받는 것에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기도 응답을 많이 받고, 많은 복을 받아 누릴지라도 그 사람이 예수님을 닮는데 관심이 없다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미신과 신앙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신은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고, 신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 미신을 섬기는 자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도 황금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면 섬김의 삶을 힘써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또한 이 사회에서 섬기는 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거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언젠가 간디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에 따라 산다면 인도에는 힌두교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충실하기를, 언행에 모순이 없기를 바랍니다.“

섬김으로 복음을 전하라

우리는 불신 이웃에게 말로써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선한 행실로서 전도해야 합니다. 섬기라고 하니까 무슨 어려운 일을 해야 되나 보다 생각할지 몰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 호남지방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눈이 얼어서 길이 빙판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사람들이 자기 집 앞조차 치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이 내리면 자기 집 앞의 길을 치우는 것, 비록 작은 일이지만 이것이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장기를 떼어주는 것과 같은 거창한 행동만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사랑으로 친절한 말 한 마디, 위로의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병든 형제들을 찾아가서 병문안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행하면서 교통질서를 지키는 것도 섬기는 것이고, 깜빡이를 켜고 들어오려는 차에게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상식에 속하는 교통질서를 지키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다른 차에게 끼어들기를 허용하는 것을 죽는 것처럼 싫어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끼어들기를 밥 먹듯 합니다. 이렇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대접받을 줄만 알았지 섬길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간혹 보면, 차에 기독교인인 표를 부착하고 다니면서 교통질서를 어기고 얌체 운전을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차라리 십자가나 고기표시와 같은 것을 부착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낮은 차원의 섬김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을 본받아서 성숙한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숙한 섬김은 곧 사랑에 입각한 섬김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기 위하여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서로를 사랑한다면 희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마더 테레사)

사랑에 근거한 섬김

오늘날 가장 흔한 말이 사랑이지만, 진정한 사랑은 고통과 희생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진실한 사랑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희생 없이, 고통 없이 사랑하기를 원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사이비 사랑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진실한 섬김도 사랑에 근거하기 때문에 아무나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자신이 진실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로 18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세상 사람들이 섬김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사랑으로 섬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사랑도 섬김의 행동으로 나타낼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우리는 성도들 간에 서로를 섬기는데 힘써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어린신자와 성숙한 신자가 있습니다. 신앙연조가 오래다고 다 성숙한 신자가 아니고, 섬김의 삶을 사는 신자가 성숙한 신자입니다. 믿음이 어린 신자들은 대접 받기를 좋아하지만 성숙한 신자들은 섬기기를 좋아합니다.

마지막 당부와 축복

저는 금년에 우리 성도님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교회와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섬기는 자리에 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본받아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데 힘쓰는 성도님들에게 성령님의 감화와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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