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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샘, 우리 교회 (요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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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가 생명의 샘

하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 마음속에 마르지 않는 샘구멍 하나씩 뚫어 주시고 하늘에서부터 깨끗하고 맑은 물을 계속 흘려 보내주십니다. 나쁜 사람들이 샘가에서 장난을 치고 흙탕물로 흐려 놓아도 가만히 기다리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은 흙탕물을 밀어내고 맑고 깨끗한 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서 흐르는 생명의 샘'을 가지고만 있을 뿐! 그 맑고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마실 줄 모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약수보다도 더 좋은 생수를 자기 안에 두고서도 가게에 가서 돈을 주고 생수를 사먹고, 탄산음료를 사먹으면서 살아가는 셈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마음속에 하나님이 갈한 영혼 시원하게 해갈시켜주는 생명의 샘을 주시는데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실 줄 모릅니다. 그 샘은 바로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입니다.

생명에는 생물학적 생명과 영생과 같은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며(요20:31),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 자체이십니다(요14:6).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요일 5:12).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오셨습니다(요 10:10). 즉, 그리스도가 생명샘입니다.

생명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회를 주시고, 그리스도 자신은 그 교회의 머리라 하시며 교회를 몸이라 하셨습니다(엡 4:15).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교회가 생명을 주는 샘이 됩니다. 이제는 우리 영암교회가 생명수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생명의 샘이 되어 백성의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위로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2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그 한 사람은 자신을 말한 것입니다(고후 12:1). 그리스도 안에는 공간적 위치를 말하기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을 가리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이라 하시고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5:4-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 생명과 새로운 신분,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의 회원권이 주어집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가족이 됩니다(갈 3:26-29). 몸 된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생명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백성의 위로가 됩니다.

참된 생명과 위로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변의 상황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우울하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주변의 현실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아무런 희망도 위로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과 위로가 있습니다. 가장 극심한 어두움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살 길이 있고,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의 위로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우리의 생명이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6에“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이를 줄여서 말한다면 주님은 우리의 참된 생명의 길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로의 복음과 위로자로서 교회의 사명

삼위일체 하나님이 위로의 근원이시라면, 그 하나님의 복음은 위로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합니다(롬 7:24). 그러나 여기에 참된 생명의 위로가 있습니다.“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생명과 위로의 복음입니다. 교회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는 위로자요,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하는 샘입니다.

칼빈은 교회를‘신자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오직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며, 어머니의 품 안에서 양육을 받고, 그 생명을 유지하며 성장할 수 있는 것처럼 신자들도 그 어머니인 교회 안에서 복음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태어나며, 교회 안에서 영적인 양식으로 영적 생명을 유지하며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신자의 어머니’라면 교회는 동시에‘영적인 생명의 샘이요, 위로자’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상에 존재하는 위로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위로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위로자이며,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사람들을 살리며, 온 피조물들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위로자의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과 고난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그리스도의 위로를 전달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날 혼란과 고난과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전달할 위로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예부터 전해 오는 복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그 복음의 위로입니다.

받는 삶보다 주는 삶을 살자

영암교회 성도 여러분! 2006년에는 우리 모두가 서로 간에 받는 삶보다 주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 나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아프리카에는 건천이 많다고 합니다. 건천은 큰 강이나 개천인데, 비가 오는 우기에는 강물처럼 물이 창일하다가도 우기가 끝나 비가 그치면 금방 흐르던 물은 마르고 강은 바닥을 드러내어 모양만 강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건천의 존재 이유는 우기에 의존되고 있는 것입니다. 건천과 같은 신자란 위로부터 은혜가 임하면(우기)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헌신하기도 하고, 원수를 사랑하기도 하고, 물질을 드리기도 하고, 아멘도 크게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섬기기도 하고, 눈물로 찬송하기도 하고, 교회서 살기도 하고,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가슴 뭉클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은혜의 우기가 끝나면, 곧 심령의 바닥, 본심을 드러  냅니다. 그러면 큰물로 가라앉았던 강바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감추어 졌던 육의 본성이 송두리째 드러납니다. 성질이 올라오고, 짜증이 나고, 원수를 맺고, 이웃을 미워하고, 조급해지며, 마음은 좁쌀처럼 오그라듭니다. 예배가 짐이 되고, 헌금이 아깝고, 헌신이 유치하게 느껴지게 되고, 걱정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또 비가 내리면 다시 물이 흐르지만, 비가 그치면 언제나 바닥을 드러냅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데 어쩔 수 없는 바닥은, 신앙생활을 무미건조하게 만들며 타성과 위선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분명, 물이 흐르던 골짜기의 흔적은 있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흔적 눈물로 기도하며 손들어 찬송하던 흔적 가슴을 설레이며 말씀에 춤을 추던 흔적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했던 흔적, 낮은 마음으로 섬겼던 흔적, 아까운줄 모르고 나누었던 흔적, 큰 골짜기를 이루지만 골짜기뿐, 그곳에 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습니다. 그 시절을 그리워 하지만 한번 메마른 건천은 다시 회복되지 않습니다. 막연히 우기만 기다릴 뿐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건천 바닥을 드러내고, 하루는 생수신앙의 흉내로 가슴앓이 합니다. 건천은 땅인지 강인지 비가 오지 않으면 구분이 어려운 곳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건천이 되면 그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됩니다. 혹 우리의 영혼이 쩍쩍 갈라지는 건천의 바닥처럼 건천심령은 아닙니까? 교회 다녀와도, 예배를 드려도, 기도를 해도, 밤새워 주의 일에 힘을 써도 아무 기쁨도 없고 감동도 없다면 건천신앙일 수 있습니다.

옹달샘 신앙

건천 신앙의 반대는 옹달샘 신앙입니다. 옹달샘은 화려하지도 큰 웅덩이도 아니지만 끝없이 솟아오릅니다. 건천의 존재이유가 외부에 있다면 옹달샘의 존재이유는 내면에 있는 것이고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지 밖에서 흘러들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충만함의 근거가 우기에 의존된 것이 아니라 내면에 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그 주님과 끝없이 교제하며 관계를 유지함으로 속에서 솟아오르는 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닌 것은 곧 마르고 닳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곧 바닥을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오직 생수의 근원되시는 주님만이 마셔도 먹어도 목마르지 않을 생수이십니다. 변함없이 귀한 믿음을 지켜온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의 우기를 의존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 계신 주님과 사귐으로 옹달샘 같은 생수를 마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충만의 흔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충만함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영적인 지식이 뛰어나다고 영적인 사람이 아니며,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좋아한다고 영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면에 솟아오르는 옹달샘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건천 신앙인도 열심도 있고, 영적인 지식도 많고, 영적인 용어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뿌리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후에, 예배 후에, 말씀 묵상 후에, 헌신한 후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기진해 하며, 허무해 하는 성도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삼아 하는 것이 아니고 관념이나 지식은 더 더욱 아니며 체험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풍성함이며, 실재입니다. 은혜가 되어야 기도가 되고, 은혜가 임해야 아멘이 나오고, 은혜가 뜨거워져야 찬송을 크게 부르고 한다면 그분은 건천 신앙인일 확률이 아주 높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상황이 최악이며, 사방이 가뭄인데도, 어디서인지 솟아오르는 생수를 경험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옹달샘 신앙입니다. 옹달샘의 은혜를 사모하고 전심으로 간구하고 마음으로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비오기를 기다리는 우기형 성도입니까? 아니면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옹달샘 신자입니까? 우리의 승리는 겨우, 근근히 하는 승리가 아니라 넉넉하게 충분하게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건천신앙에서 생수신앙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진짜 은혜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들어오는 은혜와 솟아나는 은혜는, 우리를 건천신앙과 옹달샘신앙으로 구분하게 될 것입니다.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은혜의 힘으로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가뭄 같은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즐거움으로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겨우, 겨우 하는 일이 아니고 기쁨으로 집중해서 사명으로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소리보다, 주님의 내성이 더 크게 들리며 주변의 외부의 환경보다, 솟아오르는 내면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옹달샘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의 옹달샘을 찾아와서 목을 축이고 쉴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보람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까? 예수님께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다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로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질병의 고통 속에서 영생에 이르는 생수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의 문제로 인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진리에 갈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친히 옹달샘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치료의 옹달샘이 되셨습니다. 진리의 옹달샘이 되셨습니다. 사랑의 옹달샘이 되셨습니다. 누구나 와서 마실 수 있는 열려진 옹달샘이 되어 주셨습니다.

주는 삶을 산다는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옹달샘은 주게 될 때에 옹달샘의 가치를 느낍니다. 우리 인간이 기쁨을 느끼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게 될 때 비로소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가지고 소유할 때 기쁨을 느낀다고 하지만 소유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기쁨보다는 주는 것에서 오는 기쁨과 희열은 한층 더 높은 차원의 기쁨인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게 될 때 삶의 참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기를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우치도록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 예수를 우리 가운데 주셨습니다. 우리는 멸망당할 존재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주셨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러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주는 것은 사실은 우리 것, 내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주신 것, 공짜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주게 될 때에는 그 은혜를 생각해서 거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주긴 주는데 의무감을 가지고 주지 말고 너희 자신을 그냥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억지로 주지 말고 자발적으로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따라서 주지 말고 사랑으로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벌벌 떨면서 주지 말고 마음의 중심에서 줄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줄 때에는 속으로 계산하면서 주지 말 것이며 이렇게 베풀면 나중에 나에게 이런 면으로 돌아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주지 말고, 지금 이렇게 손을 써놔야 다음에 그 덕을 보아서 내 계획대로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값없이 주신 것을 나도 주님의 뒤를 따라 나누어준다는 생각으로 주어야 합니다.

영암교회 성도 여러분! 이제 2006년에는 여러분들이 값없이 받은 주님의 은혜를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도 주고, 용서도 주고, 지식도 주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나누어주고, 먹을 것도 함께 나누어주고 복음도 열심히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므로 생명의 샘, 영암교회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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